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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성에서 바라본 오키나와 나하시.
 수리성에서 바라본 오키나와 나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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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카데나 미공군 비행장 활주로.
 오키나와 카데나 미공군 비행장 활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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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 왕국(琉球王國)으로 술 기행을 떠났다. 유구국은 조선과 교류를 했던 사라진 왕국이다. 유구왕국은 1429년에 건국해 1879년까지 지속됐는데, 일본에 폐망하고 오키나와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폐망한 나라의 운명은 슬프다. 그 슬픔을 공유할 만한 이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게 더 쓸쓸하다. 오키나와 나하시 국제거리 뒷골목에서 유구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소책자를 봤다. 유구의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있는 듯하나, 이방인이 감지하기는 어려웠다.

유구의 궁궐이었던 수리성은 세계2차대전 때에 미국의 공격으로 황폐해졌다가 복원됐다. 그래서 옛것이 무엇이고, 지금 것이 뭔지 구분하기 어렵다. 유구 땅은 2차대전의 격전지가 되고 패전의 멍에를 뒤집어쓰면서, 27년 동안 미군의 식민통치를 받다가 1972년에 일본에 다시 귀속됐다. 지금도 오키나와에는 미군 공군기지가 있고, 미국의 통치 기간에 형성된 나하 국제거리, 미하마 아메리칸 빌리지 들이 외국인들이 접근하기 편한 현란한 관광지가 되어, 옛날의 영화를 덧없는 일로 만들어놨다.

사람이 밥을 씹어서 술을 빚는다? 가능하다

유구국의 전통 옹기들.
 유구국의 전통 옹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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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눈으로 유구를 추억할 수 있는 술들이 있다. 유구 사신들이 조선을 찾아왔을 때 소개했던 술로 미인주(美人酒)와 천축주(天竺酒)가 있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유구국의 대표 술로 미인주가 등장한다. 미인주는 세조 8년 유구 사신이 왔을 때에 답한 이야기 속에 일일주(一日酒, 하루만에 빚은 술)로 등장한다. 사신들의 설명에 따르면 "일일주(一日酒)는 15살 미혼 여성이 입을 깨끗이 씻고, 밥을 씹어서 술을 빚으며, 그 맛이 기막히게 달다"라고 했단다. 젊은 여성들이 입으로 곡물을 씹어서 빚어 미인주라고 불렸다고 한다. 곡물을 씹어서 술을 빚다니! 기발하고 희한하고 놀라운 일이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사람의 침 속에는 아밀라제라는 효소가 들어있어서, 곡물을 당화시킬 수가 있다. 누룩이나 발효제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젊은 여성들 여럿이 항아리에 둘러앉아, 곡물을 씹어 항아리에 뱉어 담아두면 천연 효모가 안착해 알코올 발효를 시킨다. 오래두면 알코올 도수가 제법 나왔겠지만, 술을 빚은 지 하루만에 마셔서 '일일주'라고 했으니 도수는 아주 낮았으리라. 술 빚어 하루를 두면 당화는 되지만 알코올 발효는 그다지 이뤄지지 않아 독하지 않고 달달한 맛만 띠게 된다. 오키나와에서 지금은 특별한 행사 때만 미인주를 시연한다고 한다. 

유구국의 또 다른 술로 천축주가 있다 천축주의 맛을 잘 알았던 이는 세조였다. <세조실록>에 세조 임금은 그 술을 맛보고, 이것은 천축주가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천축주에서 시작된 세조의 의심

유구왕국의 궁궐인 수리성.
 유구왕국의 궁궐인 수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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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13년(1467년) 7월 17일의 일이다. 임금이 "그대의 임금이 그대들을 사신으로 보내어 정성을 바치게 하고 예물도 많이 가져 왔으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기고 기뻐한다, 지금 내가 그대의 임금을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이 술을 마시겠다" 하고 "술을 천축주라고 이름 붙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물었다. 사신이 대답하기를 "이 술이 천축국(天竺國)에서 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천축국은 어느 방향에 있는가? 너희 나라와 도로의 상거(相距)가 얼마나 되는가? 또 너의 나라 사람이 항상 왕래하는가?"라고 임금이 재차 물으니 사신이 대답하지 못하고 말하기를 "천축국은 남쪽 지방에 아주 멀리 있는데, 저희 나라와는 서로 통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경계 상에 이를 뿐입니다"라고 했다.

잔치가 파하자, 임금이 종친과 재추(宰樞)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천축주가 아니다, 천축주가 진실로 이와 같지 않다면 저들은 우리가 그것이 천축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줄 어찌 생각했겠는가? 반드시 우리를 속이는 것이 많을 것이다"(此非天竺酒也. 天竺酒固不如是, 彼豈料我之知其非天竺酒也. 必自多欺我矣)라고 말했다. 세조의 말 속에서 술이 거짓이니, 다른 것도 거짓일 수 있다고 추정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세조 7년(1461년) 12월 12일에는 사신들이 천축주를 가져와 술 항아리를 열어보니 술이 없고 사탕이 나왔던 적이 있었다. 이때 사신들은 "신 등이 토물(土物)을 받들어 바치면서 착오(錯誤)한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죄가 남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세조는 "이것은 너희들의 허물이 아니다, 또 너희 왕이 나에게 천축주를 보내며 반드시 내가 이를 마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면서 "이제 네가 술을 올리면 비록 천축주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것도 또한 너희 왕이 보낸 것을 마신 게 될 것이다"라고 용서한 적이 있다.

인도에서 전파된 증류 기술

유구국의 나무로 된 증류기.
 유구국의 나무로 된 증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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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에는 조선 관리가 유구 사신에게 천축주 빚는 법을 물어봐 기록한 내용이 나온다. 기록을 보면 "광랑나무(桄榔樹, 야자수와 같은 교목)을 절여서 태워 술을 만드는데, 그 맛이 향기롭고 극렬해서 두 잔을 마시면 종일토록 취한다"라고 적어놨다.

천축주는 천축국에서 생겨난 이름이니, 유구국에서 만들었지만 수입된 문화였음을 알 수 있다. 천축국은 인도를 지칭한다. 천축주는 독한 증류주다. 천축주를 통해서 증류하는 기술이 인도와 동남아를 거쳐 유구국까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술은 미인주도 천축주도 아니다. 태국산 쌀인 안남미에 검은 곰팡이를 피워 만드는 흑국으로 만든 '아와모리'다. 이 증류주가 오키나와 술을 대표하고 있다. 오키나와에는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있으니, 천축주의 계보는 사탕수수에서 얻은 당분을 이용해서 만든 럼주에서 찾는 것이 더 가깝겠다. 다시 돌이켜보면, 세조 임금 앞에서 열었던 항아리 속의 사탕(물)이 럼주의 원료이기도 하니, 유구 사신이 천축주 대신 사탕을 가져온 것은 아주 엉뚱한 일은 아니었다고 변론해주고 싶다.


태그:#유구왕국, #오키나와, #술, #천축주, #천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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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평론가, 여행작가. 술을 통해서 문화와 역사와 사람을 만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술문화연구소 소장이며 막걸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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