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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등청정은 임진왜란 때 남대문으로 한양에 입성했다.
 가등청정은 임진왜란 때 남대문으로 한양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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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017년 8월 3일 오전 9시 27분]

서울 세종대로 40에 있는 숭례문은 조선 시대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다. '예를 숭상한다'는 뜻을 지닌 '崇禮門' 현판은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도성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흔히 남대문이라 불렀다.

숭례문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1396년(태조 5)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공하였다. 1448년(세종 30)에 고쳐지었고, 1479년(성종 10)에도 큰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2008년 2월 10일 방화로 불에 타 누각 2층 지붕이 붕괴되고 1층 지붕도 일부 소실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 후 5년 2개월에 걸쳐 복원 공사가 이루어졌고 2013년 5월 4일 준공되었다.

2008년 불에 타던 모습이 기억에 선한 남대문

동대문 정면 아래로 옹성이 보이는 풍경. 남대문에는 이런 옹성이 없다.
 동대문 정면 아래로 옹성이 보이는 풍경. 남대문에는 이런 옹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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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누리집은 '숭례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라고 해설한다.

서울 종로구 종로 288에 있는 흥인지문은 서울 도성 성곽의 8개 문 중 동쪽에 있다고 해서 흔히 동대문이라 불린다. 1396년(태조 5) 도성 축조 때 건립되었다가 1453년(단종 1)에 고쳐지었는데, 특히 지금 있는 문은 1869년(고종 6)에 아주 새로 지은 것이다. 즉, 동대문은 1448년에 고쳐 지은 남대문에 비해 420년 이상 후대의 건축물이다. 이같은 건축 연도의 차이는, 둘 다 같은 도성 성문이면서도 남대문이 국보 1호인데 반해 동대문이 보물 1호인 까닭을 대략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남대문보다 420년 뒤 건물 동대문, 옹벽이 특징

옹성이 특징인 동대문은 임진왜란 때 소서행장이 한양에 입성할 때 이용한 문이다.
 옹성이 특징인 동대문은 임진왜란 때 소서행장이 한양에 입성할 때 이용한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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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누리집은 '동대문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준다.'라고 해설한다.

그리고 '바깥쪽으로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라고 덧붙여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의 특징 한 가지를 보태어 설명해주고 있다.

'서울 숭례문'은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1호가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보물 1호였다. 1933년 일본은 국보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면서 숭례문을 우리나라 보물 1호로 지정했다. 그들은 일본 본토 아닌 곳에는 국보가 있을 수 없다고 인식했다.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은 남대문으로, 소서행장은 동대문으로 입성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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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흥인지문'은 보물 1호이다. 1933년 일본은 '서울 숭례문'에 이어 동대문을 보물 2호로 지정했다. 남대문이 보물 1호로 지정된 것은 가등청정이 한양을 접수할 때 통과한 성문이기 때문이고, 동대문이 보물 2호로 지정된 것은 소서행장이 입성한 통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결국 일본이 정한 보물 1호와 2호를 국보 1호와 보물 1호로 나누어서 재지정한 셈이다.

종로구 율곡로 99의 돈화문(敦化門)은 보물 383호로, 남대문과 동대문 같은 도성의 성문이 아니라 하나의 궁궐인 창덕궁의 정문으로,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동대문과 같은 1963년 1월 21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돈화는 '공자의 덕은 임금의 덕에 비유할 수 있다'는 <중용>의 표현을 따온 것으로,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한다'라는 의미로 옮겨 쓰인 것이다.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세워졌고, 1609년(광해군 1)에 중수되었다.

돈화문의 2층 문루에는 종과 북이 있어서 정오, 인정(人定), 파루(罷漏)에 시각을 알려주었다.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정 때는 28번 종을 쳤고,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파루는 33번 종을 쳤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위 사진)을 지나, 다시 도성 서문인 돈의문을 지나 명나라 쪽을 향해 피란을 떠났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위 사진)을 지나, 다시 도성 서문인 돈의문을 지나 명나라 쪽을 향해 피란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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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누리집은 '돈화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남향 건물이고, 좌우 협칸을 벽체로 막아 3문형식이다. 중앙은 왕의 전용 출입문인 어문(御門), 좌우문은 당상관 이상 높은 관료가 드나들던 문이었는데, 3사(三司,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언관(言官, 왕에게 바른 말을 하는 관리라는 뜻)은 관직은 낮아도 좌우 문을 드나들 수 있었다.

돈화문의 중앙은 임금의 전용 출입 어문이었다? 사당이나 서원 등에 있는 보통의 삼문(三門)들은 중앙 문이 닫혀 있고 좌우의 두 작은 문으로만 드나드는데, 돈화문은 가운데 큰문으로 임금 혼자 출입을 했다? 그렇다면 이 문을 통해 궁궐 밖으로 나선 조선의 임금 중 한반도 대중의 뇌리에 가장 뚜렷하게 각인된 장면을 남긴 왕은 누구일까? 저절로 <조선왕조실록>이 떠오른다.

1592년 4월 13일자 <선조실록>은 '이날 밤 호위하는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고 궁문(宮門)엔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았으며 금루(禁漏)는 시간을 알리지 않았다.'라고 전한다. 돈화문을 지키는 장졸들이 모두 진작에 도망을 쳐버렸다는 증언이다.

실록은 '새벽에 상(上, 왕)이 인정전(仁政殿, 창덕궁의 중심 궁전)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人馬)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라고 전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퍼부었다는 것이다.

호위하는 신하는 100명도 안 되고 비까지 오는 밤에 피란 떠나는 선조

실록은 이어서 선조와 왕비, 태자 등의 곤궁한 처지를 말해준다. 실록은 '궁인(宮人)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고,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점심을 벽제관에서 먹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태자)은 반찬도 없었다.'면서 '병조판서 김응남이 흙탕물 속을 분주히 뛰어다녔으나 여전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고, 경기관찰사 권징은 무릎을 끼고 앉아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라고 전해준다.

조선 시대의 남대문(문화재청 사진)
 조선 시대의 남대문(문화재청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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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피란을 떠난 이 날 밤중의 사정에 대해서는 <선조수정실록>도 대동소이한 광경을 보여준다. 수정실록은 '밤이 깊어서 이일(李鎰, 상주 북천과 충주 탄금대 패장)의 장계가 비로소 도착하였는데, 적이 금명간에 도성에 이를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장계가 들어온 뒤 얼마쯤 있다가 상이 돈의문(敦義門)을 나가 서행(西幸, 임금이 서쪽으로 감)하였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수정실록은 '상은 융복(戎服, 군복)으로 말을 탔고, 왕비는 걸어서 문을 나왔다'라고 증언한다. 임금이 군복을 입고 말을 탄 채 피란을 떠나고, 심지어 왕비는 걸어서 대궐을 나서고 있었으니 그 곤궁함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된다. 게다가 수정실록은 '밤이 칠흑같이 어둡고 비가 내려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다. 도승지 이항복이 촛불을 잡고 앞을 인도하니 왕비가 성명을 물어서 알고 위로'하였는데, 그때 '도성의 궁성宮省(궁중에 설치된 관서)에 불이 났다. (중략)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왕실의 재물 창고)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져갔다.'라고 상황을 중계한다.

조선 시대의 동대문(문화재청 사진)
 조선 시대의 동대문(문화재청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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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깊은 반감 표출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수정실록은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다. 이는 두 곳의 관서에 노비 문서가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다. (중략) 임해군(광해군의 형)의 집과 병조판서 홍여순의 집도 불에 탔는데, 이 두 집은 평상시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다.'라고 증언한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일본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선 백성들의 방화로 말미암아 재로 변하고 말았다니 놀라운 일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왜군이 아니라 조선 백성이 불태웠다

수정실록은 선조가 피란을 떠나기 위해 야밤에 지나간 도성 문이 돈의문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돈의문은 한양 도성의 서대문이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다. 1925년 일제가 허물어버렸기 때문이다.

선조가 처참한 몰골로 지나간 돈의문은 이제 볼 수 없고, 그 대신 돈화문을 찾는다. 돈화문은 성문이 아니라 창덕궁 정문이지만 선조가 돈의문으로 가기 위해 지나쳤던 문이다. 돈화는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한다'라는 뜻이라는데,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 어떤 덕을 크게 베풀었을까? 곰곰 헤아려보아도 제대로 떠오르는 것이 없어, 가등청정이 입성한 남대문, 소서행장이 들어온 동대문, 선조가 도망친 돈화문을 둘러본 마음이 공연히 답답해진다.

불에 탄 남대문을 사진과 같이 복구하겠다는 조감도(문화재청 사진)
 불에 탄 남대문을 사진과 같이 복구하겠다는 조감도(문화재청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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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임진왜란, #소서행장, #남대문, #동대문, #돈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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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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