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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사>의 저자인 김병진(일본 거주)씨가 강태진 작가의 만화 <조국과 민족>(상·하)의 서평을 보내왔다. 김씨는 5공 때 보안사에 근무하며 간첩이 조작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조국과 민족>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시각으로 간첩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그린 작품이다. [편집자말]
강태진 작가의 <조국과 민족>(상.하) 표지.
 강태진 작가의 <조국과 민족>(상.하) 표지.
ⓒ 비아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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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민족'이라는 말은 내 평생 수없이 들었던 말이다. 그만큼 신기하지도 생소하지도 않은 말이었는데, 어느 날 들어야 했던 '조국과 민족'은 내게 예사롭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보안사 직원들이 건배사로 외친 "위하여"

1984년 1월쯤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내 의사와 무관하게, 아니 오히려 거절하는 나와 내 처의 의사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보안사에서 강제 근무를 시작하였다. 훗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이러한 나의 처지를 '노예적 구속'이라는 표현으로 묘사하였다.

하여튼 어느 외근계의 회식에 참석하라는 말을 듣고 강남의 고깃집에 갔을 때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술잔을 들어 "위하여!"라고 했다.

지금은 흔히 쓰는 말이지만 보안사에 잡히기 전까지 학생 신분이었던 나에게 '위하여'는 낯선 단어였다.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30년 전에는 그리 흔하게 쓰는 말이 아니었다. 건배면 건배라고 할 일이지 '위하여'라니, 대체 뭘 위하는지가 궁금해서 옆자리 직원에게 물어봤다. 대답인 즉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것이었다.

그날은 의대에 다니다 오랜 불법 감금과 모진 고문을 거쳐 간첩 용의자로 만들어진 교포 유학생을 회유 차원에서 면담해보라는 대공처장 최경조의 지시로 그를 만났다가 그 교포 후배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내 무력함을 개탄해야만 했던 날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 단지 재일교포 모국 유학생이라는 죄 아닌 죄로 지옥을 헤매는 힘없는 존재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술잔을 기울이는 악마의 대조가 나를 사로잡았고, 이는 3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조국과 민족'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당시 보안사가 해마다 검거했다며 언론에서 떠들어댄 간첩은 주로 교포 유학생 위장간첩과 납북귀환어부 간첩이었다. 어부에 대해서는 내가 소속된 사령부에서 몇몇 수사관이 예하 부대로 파견나가 사건을 만들었기에 어떤 수사를 했는지 자세하게 알지 못하지만 사령부에서 다루던 사건은 웬만하면 알 수 있었다. 그 사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조작된 것이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한국어를 모르는 교포를 위해 통역원으로 동원됐는데, 생각해 보면 이것도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한국어도 못하면서 어떻게 간첩질을 한단 말일까? 북한 쪽에서도 통역을 써가며 지령을 내리고 통역을 통해서 보고를 받았단 말일까? 하여간 밤낮없이 간첩 조작에 힘쓴 수사관의 노고는 진지했을지 모르겠으나 이는 더없는 코미디였다. 그 코미디를 정당화하는 전가의 보도가 '조국과 민족'이었다.

다행히 1970~1980년대에 검거된 '간첩'은 최근 거의 다 재심 무죄가 확정되었거나 재판에 계류 중이다. 당연한 결과다.
강태진 작가의 <조국과 민족>의 한 장면.
 강태진 작가의 <조국과 민족>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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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진 작가의 <조국과 민족> 한 장면.
 강태진 작가의 <조국과 민족>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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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훈도 그의 '반역'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강태진 작가의 만화 <조국과 민족>은 그러한 추억들을 내게 상기시켰고, 독재자 사진과 나란히 걸려 있는 액자 속의 글씨 '조국과 민족'은 더없이 내 가슴을 억눌러 추억이 추억으로 머무르지 못하는 사연으로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피해만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조국과 민족>은 옛적에는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지던 주제를 다룬다. 그렇다면 강태진이라는 만화 작가는 유별나게 용기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만큼 열린 세상이 되었나? 아마 둘 다 맞는 답일 것이다.

강태진 작가의 만화 <조국과 민족>은 박시백 화백의 추천사대로 '작가의 펄펄 나는 스토리 역량과 시대에 대한 꼼꼼한 고증이 더해진 걸작'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제는 더러 체험자의 수기 형식으로, 그것도 고발 목적으로 세상에 나타났다.

나 역시 저서 <보안사>를 통해 제5공화국을 고발하였다. 그런데 <조국과 민족>은 특이하게도 그 시대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젊은 만화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논픽션에서 픽션으로 비약한 셈이다. 그것도 만화라는 야심찬 매체를 통해서다(곧 영화화된다고 하니 더욱 기대가 된다).

그러므로 <조국과 민족>은 사실일 수는 없다. 매력적인 박도훈도 그의 '반역'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은 허구를 통해서 표현될 때 사실보다 더 강한 힘으로 진실을 보여준다. <조국과 민족>을 읽고 나서 희망적인 소회를 갖게 된 이유다.

앞에서 나는 작가의 용기에 대해 언급했다. 지금 한국사회는 국보법(국가보안법) 위반이다 군기법(군사기밀보호법) 위반이다 하며 나를 옭아매던 시대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러나 놓쳐서는 안 될 문제가 있다. 간첩 조작은 여전하다는 사실이다.

옛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중심 대상이 '북한 이탈민'이라는 점이다. 사회적 약자를 노리는 습성은 하나도 변한 게 없다. 국정원이 전면에 나선 모양새지만 기무사로 이름만 바꾼 보안사는 여전히 조직적으로 움직여 기회를 노리고 있다.
강태진 작가의 <조국과 민족> 한 장면
 강태진 작가의 <조국과 민족>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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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진 작가의 <조국과 민족> 한 장면
 강태진 작가의 <조국과 민족>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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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청산은 끝나지 않았다

3년 전 어느 교포에게 물고문을 했다 하여 내가 고발한 전직 보안사 수사관이자 서울시 양천구청장을 역임한 추재엽은 '김병진은 북한간첩'임을 주장하는 문자 메시지를 10만 건이나 돌려 명예훼손과 무고죄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새누리당 양천구 당원협의회 명예회장직에 앉아 있다.

보안사 수사2계 학원반 반장이었던 고병천은 어느 교포의 재심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고문이나 협박은 없었다"는 뻔뻔스러운 위증을 하였다. 이 사건은 현재 재판에 계류 중이다(간첩으로 조작된 그 교포에 대해서는 재심 무죄가 확정됐다).

그들의 재판 과정을 전면적으로 현재의 기무사가 돕는다는 정황도 드러나고 있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그러한 자들을 아직도 사회적으로 인정하여 그들에게 연금과 훈장을 준다는 사실이다. 추재엽 역시 양천구의 명사로 예우받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 사회는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권력이 중심 가치인 사회다. '간첩 조작'은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이들의 명예를 그나마 회복시켜 주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말 못할 피해자들이 여전히 숨을 죽이고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과거 청산은 끝나지 않았다. 한 젊은 작가의 용기와 도전의 결과인 만화 <조국과 민족>이 경직된 현실에 일침을 가하는 역할을 해 줄 것으로 믿고 기대해 본다.


조국과 민족 상.하 세트 - 전2권

강태진 글.그림, 비아북(2016)


태그:#조국과 민족, #강태진, #김병진, #보안사, #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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