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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교과서로 시를 가르칩니다. 시를 읽은 뒤에 느낌이나 생각을 묻는 시험문제를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퍽 많은 사람들은 시를 어렵게 여깁니다. 시 한 줄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 어렵다고 합니다. 시 한 줄을 써 보라 하면 '시인이 아닌데 어떻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기 일쑤입니다.

뿌리가 흙을 파고드는 속도로 
내가 당신을 만진다면 
흙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놀라지 않겠지

(분갈이)

겉그림
 겉그림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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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어렵다면 시는 아무도 쓸 수 없으리라 느낍니다. 시가 어렵다면 우리는 시를 쓸 까닭이 없다고 느낍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 있고, 시를 읽는 사람이 있으며, 시로 삶을 노래하는 사람이 있다면, 시는 아주 쉬우면서 사랑스럽기 때문이리라 느낍니다.

그런데 시를 어렵게 쓰는 사람도 틀림없이 있어요. 글을 어렵게 쓰는 사람도 틀림없이 있거든요. 일부러 어렵게 쓰지요. 일부러 알아보기 힘들도록 쓰지요. 속내를 숨기려 하면서 시를 어렵게 쓰고, 속마음을 숨기면서 겉을 꾸미려 하면서 자꾸만 시가 어려운 길로 가지 싶습니다.

바람과 파도처럼 남남이었다가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사람이 되기까지 
누구를 흔들고 하냥 기다리게 했는지

(파랑주의보)

전영관 님이 선보인 시집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실천문학사,2016)을 읽습니다. 이 시집을 놓고도 어렵다고 여기면 어렵습니다. 쉽게 쓴 시라고는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이 시집을 놓고 어렵지 않다고 여긴다면? 그때에는 그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겠지요.

전영관 님은 2015년 가을에 뇌졸증으로 쓰러지면서 그예 죽음나라로 갈 뻔했다고 해요. 둘레에서는 다시 일어서기 어려우리라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단한 수술을 거친 끝에 씩씩하게 다시 일어섰고, 씩씩하게 다시 일어서면서 새롭게 시집을 선보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부르면 가장 먼저 돌아보는" 님을 그리는 마음으로 시를 한 올 두 올 엮어서 시집 한 권 묶을 수 있었다고 해요.

당신의 하늘은 나도 없고 달도 없어 
캄캄할 것이네 남은 쑥은 함지에 웅크린 채 
바람이 차가워진다고 버석거릴 것이네 
달 없는 동네라고 저녁별들 몰려와 
품앗이로 한 줌씩 푸른빛을 부어주고 가겠네


(바람떡)

자두와 살구 사이 
서성거리는 당신을 생각한다


(아내)

부르면 가장 먼저 돌아보는 님을 헤아려 봅니다. 아이들을 부르면 서로 먼저 외치면서 돌아보아 줍니다. 우리 집 마당을 가로지르는 마을고양이를 바라보면서 불러 보면 여러 마을고양이가 모두 한꺼번에 고개를 홱 돌리면서 쳐다봅니다. 뒤꼍 나무에 내려앉는 멧새를 불러 보면 멧새는 한꺼번에 이쪽을 쳐다보았다가 푸드득거리면서 날아오릅니다.

가을들을 빼곡하게 채운 샛노랗게 익는 나락을 바라보며 "금빛으로 고운 나락이로구나" 하고 부르면 나락은 바람을 타고 촤락촤락 노래하며 이쪽을 바라봅니다. 하늘을 덮은 흰구름을 올려다보면서 "멋지도록 하얀 구름이로구나" 하고 부르면 구름은 바람을 사뿐사뿐 타면서 천천히 흐르며 이쪽을 내려다봅니다.

저녁은 저 혼자 
팥죽 같은 노을 한 그릇 퍼먹고 퇴근했다 
몇몇은 불판 앞에 모여 상사를 씹고 
삼겹살을 씹고 질긴 하루를 씹는다 
호떡 장사 아줌마는 모로 누워 
식어가는 호떡 자세로 기대앉았다

(야근)

가을들 곁에 서서 나락 이름을 부르면 나락은 바람을 타고 한들거리면서 촤락촤락 샛노란 노래를 들려줍니다.
 가을들 곁에 서서 나락 이름을 부르면 나락은 바람을 타고 한들거리면서 촤락촤락 샛노란 노래를 들려줍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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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대에 누워서 그리운 님을 마음속으로 불렀을 시인을 떠올려 봅니다. 수술대를 박차고 일어난 뒤에 사랑스러운 님을 입으로 불러 보는 시인을 헤아려 봅니다. 마음속으로만 부르던 님을 입으로도 부를 수 있을 적에 참으로 기쁘겠지요. 마음속으로 애타게 그리던 님을 두 눈으로 마주하고 두 손으로 어루만질 수 있을 적에 더없이 반갑겠지요.

가을에 감알 하나 따며 시를 씁니다. 마음으로 쓰지요. 이 감알 하나를 혼자 먹을 수 있고, 반으로 갈라 둘이 먹을 수 있으며, 반으로 또 갈라서 넷이 먹을 수 있어요. 가르고 또 가르면 개미한테 나눠 줄 수 있고, 새한테 나눠 줄 수 있어요. 나비하고 벌도 감 한 알을 조금씩 나누어 먹을 만합니다.

잘 여문 초피알을 훑으면 두 손에 초피내음이 번집니다. 잘 익은 무화과알을 따면 두 손에 무화과내음이 번집니다. 나락을 베는 손에는 나락내음이 번지고, 낫을 쥐어 풀을 베는 손에는 풀내음이 번져요. 아침저녁으로 물을 만지며 밥을 짓는 어버이 손에는 물내음도 밥내음도 번지겠지요.

구름은 과묵한 사내의 양미간 
구름은 학자를 비웃으며 진화하는 장르 
구름은 들끓던 기억도 식혀 들려주는 냉장고 
구름은 쏟아내도 절망이 줄지 않는 화수분 
구름은 서로 괜찮다며 밀치다 떨어트린 만두 
구름은 사랑에 실패한 여인들에게서 만발하는 후일담

(변신에 대한 프롤로그)

시집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을 찬찬히 읽는 동안 온갖 생각을 기울입니다. 내가 부를 적에 가장 먼저 돌아보아 주는 님은 누구일까요? 나는 누가 내 이름을 부를 적에 댓바람에 그쪽을 바라보면서 기쁘게 웃을 만할까요?

아픈 이웃한테 손을 내미는 마음으로 시를 읽고 씁니다. 고단한 동무하고 어깨를 겯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읽습니다. 기운차게 뛰노는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기는 손길로 시를 읽고 씁니다. 밥을 짓고 살림을 짓는 어버이 넋으로 시를 쓰고 읽습니다.

바람 한 줄기가 솔꽃(부추꽃)에 내려앉습니다. 부전나비 한 마리가 바람 한 줄기를 타고 마당으로 찾아와서 솔꽃 봉오리에 가볍게 앉아 아침을 누립니다. 아침 햇살이 구름 사이로 퍼지며 대청마루로 들어오는 한가을입니다.

덧붙이는 글 |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전영관 글 / 실천문학사 펴냄 / 2016.8.22. / 8000원)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전영관 지음, 실천문학사(2016)


태그:#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전영관, #시집, #시읽기, #문학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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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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