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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을 이용해 식도 위에서 촬영한 식도와 위도 모습.
 드론을 이용해 식도 위에서 촬영한 식도와 위도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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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금),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이재언씨와 함께 위도여행에 나섰다. 고슴도치를 닮았다고 해서 고슴도치 '위(蝟)'를 사용하여 위도라 불린 위도는 변산반도에서 서쪽으로 약 15㎞ 뗠어진 해상에 위치하고 있다.

1999년도에 24㎞ 길이로 개설된 위도관광순환도로는 환상적인 드라이브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위도에는 고운 모래가 많아 위도해수욕장을 비롯한 깊은금, 논금, 미영금의 4개 해수욕장이 있어 여름이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대표적 문화재인 위도 관아는 지방유형문화재 101호로 지정되어 있고, 마을의 태평과 풍어를 비는 위도 띠뱃놀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이다.

대리항에 설치된 고슴도치형 조형물 모습위에 위도 무형문화재인 띠배 모습이 놓여있다.
 대리항에 설치된 고슴도치형 조형물 모습위에 위도 무형문화재인 띠배 모습이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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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도에서 고기를 말리는 모습을 촬영했다
 식도에서 고기를 말리는 모습을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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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는 일제 강점기 때 전라남도 영광군에 소속되었다가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안군에 편입됐다. 면적 14㎢에 784세대, 1284명의 주민 대부분은 어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일부 주민들은 밭농사를 일구며 산다. 봄에는 광어, 꽃게, 아귀를 잡지만 8월부터는 가을멸치가 유명하다.

위도 연근해는 유명한 조기 어장인 칠산 어장의 중심지이기도 하며, 1970년대 초까지 조기떼가 몰려들 때면 고깃배와 장삿꾼들이 찾아와 파장금항에 파시가 열렸다. 이는 흑산도, 연평도와 함께 서해 3대 파시로 유명했었다. 영광굴비의 명성은 이 무렵에 얻었는데 본래 위도가 영광군에 소속되었기 때문이다.

해가 저물 무렵 식도항 모습
 해가 저물 무렵 식도항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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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 옆 식도에서 일하는 스리랑카 출신 외국인 노동자들이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위도 옆 식도에서 일하는 스리랑카 출신 외국인 노동자들이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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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 근해는 오염없는 청정바다로 낚시인들의 발길이 사계절 끊이지 않는 곳이다. 식도, 딴달래섬, 토끼섬은 본섬과 조금 떨어져 있는 곳으로 낚시꾼들의 포인트이기도 하다. 4~6월은 우럭, 놀래미, 감성돔, 7월부터 가을까지는 농어가 잘 잡힌다. 낚시꾼들의 선망의 대상인 왕등도는 최고의 낚시 포인트로 감성돔이 잘 잡히는 소문난 지역이다.

허균 <홍길동전>에서 이상향이었던 율도국의 실제모델 위도

위도는 고려시대부터 유배지로 이용되어 허균의 대표작인 <홍길동전>에서 이상향으로 묘사된 율도국의 실제모델인 섬이다. 연암 박지원이 허생전에서 표현한 이상국가인 율려국 또한 위도가 배경이다. 그래서일까? 고운 모래와 숲, 기암괴석, 해안 등의 빼어난 경치가 곳곳에 널려있다.

경치만 뛰어난 것은 아닐 듯하다. 위도로 들어가는 여객선 '파장금카페리호'에 승선한 후 몇 명의 아주머니 옆에 자리를 잡자마자 먹고 있던 떡을 주며 "잡숴 봐요!"라며 떡 한 개를 건넨다.

위도로 가는 여객선에 탄 아주머니들이 떡을 먹다가 "떡하나 잡숴봐요!"를 외쳤다.
 위도로 가는 여객선에 탄 아주머니들이 떡을 먹다가 "떡하나 잡숴봐요!"를 외쳤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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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의 중심 파장금항 크레인 위에서 쉬고있는 갈매기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위도의 중심 파장금항 크레인 위에서 쉬고있는 갈매기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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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면 정 없은깨 한 개 더!"를 외치며 떡 하나를 더 주는 그들의 후한 인심은 섬에서도 계속됐다. 동행한 목포대학교 이재언 연구원과 아는 사이인 '위도이야기' 펜션 여주인은 저녁까지 대접하고 방값도 받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다. 우연히 배에서 만난 강대영(55세)씨는 자신의 트럭에 일행을 태워 위도를 구경시켜주고 세월호와 서해페리호 사건에 대해 심도있는 이야기를 해줬다. 강씨는 다이버 경력 30년째인 베테랑 다이버다.

강씨는 고향인 위도에서 페리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고향에 내려와 구조에 참여했고, 세월호 사건 다음날 진도에 내려와 구조 활동을 하기도 했다.

기상악화와 중량초과에도 출항한 서해페리호 참사... 세월호와 닮은꼴

서해페리호참사 위령탑 모습. 공교롭게도 1993년 10월 10일 10시 10분에사고가 일어나 362명 승객 중 292명이 사망했다.
 서해페리호참사 위령탑 모습. 공교롭게도 1993년 10월 10일 10시 10분에사고가 일어나 362명 승객 중 292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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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 세워진 '서해페리호참사위령탑'에는 당시의 상황이 잘 기록되어 있었다. 1993년 10월 10일 10시 10분, 정원 200명인 페리호는 파고 3~4m인 악조건 임에도 불구하고 362명을 태우고 출항했으나 회항 중 임수도 부근에서 침몰했다.

그 결과 섬주민과 낚시객 포함 362명 중 70명만 생존했고 292명이 사망했다. 침몰원인은 '파고 3~4m 기상악화 속에 무리한 운항과 정원 및 적정중량 초과'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서해페리호 사건 당시 고향인 위도에 곧 바로 돌아와 구조 활동에 참여했었고 세월호사고 당시 최초 시신발견팀장이었다는 강씨의 얘기를 종합해 본다. 

"서해페리호 구조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소식 듣고 바로 달려왔어요. 당시 파도가 너무 높았지만 정부대응이나 현장에 있었던 구조책임부서 담당자가 적극적으로 대응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수심이 10~12m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에어포켓이 있어요. 전문적 지식을 가진 다이버들이 산소탱크를 가지고 들어가 숨만 쉬어도 생존자를 구할 수 있었어요."

서해페리호 사고와 세월호 사고 초기 구조활동에 참여한 강대영씨가 서해페리호 사고가 일어났던 임수도 근방에서 포즈를 취했다. 강씨는 30년 경력의 베테랑 다이버다
 서해페리호 사고와 세월호 사고 초기 구조활동에 참여한 강대영씨가 서해페리호 사고가 일어났던 임수도 근방에서 포즈를 취했다. 강씨는 30년 경력의 베테랑 다이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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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 버스기사인 백은기씨와 함께 여객선 앞에서 포즈를 취한 강대영씨(오른쪽). 백은기씨가 버스를 운전하며 위도를 안내하면 모두가 자빠질정도로 재미있다고 한다.
 위도 버스기사인 백은기씨와 함께 여객선 앞에서 포즈를 취한 강대영씨(오른쪽). 백은기씨가 버스를 운전하며 위도를 안내하면 모두가 자빠질정도로 재미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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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사고 당시 크레인이 다음날 바로 도착했는데 크레인을 사용하려고 시도하지 않은 점이 아쉬워요. 다른 매스컴을 뒤져보아도 그 점을 지적한 언론이 없어요. 페리호는 격벽이 많지 않아 금방 침몰해버렸고 당시 파도가 너무 심해 손을 쓸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세월호는 격벽이 많고 상당시간 떠있었기 때문에 크레인을 이용해 체인을 걸었더라면 가라앉지는 않았을거에요. 그때 적극적으로 대처했었더라면 구조와 인양이 쉬웠을 텐데 하는 후회로 가슴이  답답해요"

세월호 사건 이후 트라우마를 겪으며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는 강씨가 다시는 "세월호 사고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또 다시 일어나면 해야할 일"에 대해 언급했다.

"바다 물길을 잘 아는 가장 가까운 구조본부가 중심이 되어 지휘를 하고 정부는 가용한 모든 장비를 동원해 지원하는 선구조 후조치 시스템이 되어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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