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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원을 주웠다. 공돈!
 만원을 주웠다. 공돈!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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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

더스틴이 만원을 주웠다. 비에 젖어 늘어졌다가 햇살에 바짝 마르기를 반복한 빳빳한 초록색 지폐 한 장. 공돈. 오늘 예산에 적지 않아도 되는 죄책감 제로의 만원!

"그렇게 좋아?"

히죽거리는 나를 보며 더스틴이 말했다.

"좋지 그럼. 공돈인데."
"난 원래 길가에 떨어진 돈은 안…."
"스탑! 셧업! 알아! 안다고!"

더스틴에게는 길가에 떨어진 돈을 줍지 않는다는 이상한 철학이 있다. 자기보다 그 돈을 더 필요로 할 누군가에게로, 혹은 더 큰 기쁨을 느낄 어린아이에게로 돈을 주울 기회가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란다. 더스틴 덕에 돈이 훨씬 급한 사람의 기회 및 어린아이의 기쁨을 빼앗는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지만, 오늘만큼은 이 만원을 정정당당하게 주울 테다.

아침 8시부터 오후 2시인 지금까지 걸은 우리보다, 출발 전 김유정역 앞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 먹고 여태껏 아무것도 먹지 못한 우리보다, 이 돈을 줍고 더 기뻐할 사람은 1km 반경 내에는 없다고 확신하는 바이니.

 진흙탕을 헤집다 더러워진 신발
 진흙탕을 헤집다 더러워진 신발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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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정도 더 걷자 식당이 등장했다. 아무리 걸어도 며칠 동안 등장하지 않던 식당이 돈을 줍자 나타나는 걸 보면, 오늘은 하늘이 우리를 돕는 날인가 보다. 식당 메뉴 중 가장 비싼 1인분에 7천 원 하는 제육쌈밥을 주문했다. 푸짐한 한 상이 차려졌다. 고기, 야채, 밑반찬, 된장국, 쌀밥. 그리고 무한 리필되는 시원한 물. 끔찍이도 행복하다.

 주운 만원으로 사 먹은 푸짐함 제육쌈밥. 으하하!
 주운 만원으로 사 먹은 푸짐함 제육쌈밥. 으하하!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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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유포리 사랑의 나무
 어유포리 사랑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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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인분에 칠천 원, 이인분에 만 사천 원. 하지만 네가 만원을 주웠기 때문에, 사실은 이인분에 사 천 원인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먹어봐 더 맛있어."
"이럴 땐 머리 진짜 잘 돌아간다 수지."


다른 때는 안 돌아간다는 말인가? 따지고 싶지만 밥 먹느라 바빠서 봐준다. 사장님이 텃밭에서 길렀다는 상추와 마늘과 가지와 애호박을 모두 먹어치웠다. 밥공기도 쌀 한 톨 남기지 않고 싹 비웠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공깃밥의 3분의 1씩은 꼭 남기던 나다. 길에 떨어진 돈을 줍지 않을 만큼은 아직이지만, 밥과 밑반찬을 남기지 않고 모조리 해치울 만큼은 성숙해졌다고 마음대로 생각해버려야지.

 하늘에 걸린 거미
 하늘에 걸린 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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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 어유포리
 홍천 어유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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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텐트에서 머무는 날이면 거의 잠을 못 자"

홍천강 앞 팔봉산관광지가 오늘의 잠자리다. 관광지인 관계로 야영을 하려면 3천 원을 내야 한다. 땅바닥에서 자는 건 어제와 다를 바 없는데 괜히 돈을 내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스틴의 생각은 달랐다.

"야영지로 정해진 곳이라 불안하지 않잖아.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도 야영하고 있고. 어제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밤새 불안하지. 불안한 만큼 잠도 못 자고."
"왜 불안해? 뭐가 불안해? 불편하긴 했어도 잠을 아주 못 잔 건 아닌데? 난 아무래도 3천 원 내는 것보다 공짜 잠이 좋아. 3천 원이면 과자를 세 봉지 살 수 있고...."
".... 난 텐트에서 머무는 날이면 거의 잠을 못 자."


왜? 왜긴. 우리는 이미 충분히 튀잖아. 커다란 배낭을 메고 한국을 걸어서 여행하는 국제커플. 근데? 그게 불안해. 튀는 게 불안해. 대다수의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는 게 안전하고 편안한 사회잖아. 한국에서 다르다는 건, 게다가 튄다는 건, 뭔가 곤란함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은 기분이야. 거기다가 길가에서 텐트까지 치고 자봐. 한국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니까 누가 우리를 해칠 일은 많지 않겠지만, 길가에 홀로 서 있는 텐트를 누가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 안에 든 게 조금 '다른' 우리라는 걸 알기라도 하면....

 어유포리. 오래된 집이나 폐허가 많은 동네.
 어유포리. 오래된 집이나 폐허가 많은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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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유포리. 정겨운 나무문.
 어유포리. 정겨운 나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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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더스틴이 자기가 잠들 때까지 자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한 적이 몇 번 있다. 텐트에서 자는 게 불안하다고. 텐트 밖을 볼 수 없어서 불안하다고. 텐트의 지퍼 사이로 만들어 놓은 작은 창문, 그 사이로 짙게 깔린 어둠을 들여다보는 그에게 나는 말했다. 뭐가 불안하다는 거야? 이장님께 허락받았잖아. 어두워서 우리 텐트 보이지도 않아. ….

벽이 있고 잠글 수 있는 문이 있는 집이 아니잖아, 그가 말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불안해. 그렇다고 누가 정말 우리를 해칠 것 같지는 않지만…. 이미 그런 생각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버려서 그래. 잠깐이야. 나 잠들 때까지 잠깐만 있어 줘. 그럼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알았다고 했고, 언제나처럼 나도 모르게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3천 원을 내자. 더스틴을 하루라도 맘 편히 자게 해주자.

 삼포길. 이제 밤이 다 여물었나보다.
 삼포길. 이제 밤이 다 여물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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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영비를 내기 위해 팔봉산관광지 사무소로 갔다. "텐트가 정말 작네요." 텐트의 크기를 확인하러 온 관광지 직원이 말했다. 더스틴은 그새 텐트를 다 설치하고 타르프를 덮고 있다.

"그쵸?"

등 푸른 벌레처럼 작게 웅크리고 있는 우리 텐트를 보며, 내가 자랑스럽게 대꾸했다.

"그래요. 저렇게 작은 거 써야 부부끼리도 친해지고 좋지."

하루에 24시간, 일주일에 7일을 붙어 있는 우리 부부에게 주는 조언으로는 빵점이다.

 삼포길. 왼쪽으로는 숲이, 오른쪽으로는 내천이 나 있는 걷기 좋은 길이다.
 삼포길. 왼쪽으로는 숲이, 오른쪽으로는 내천이 나 있는 걷기 좋은 길이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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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고 가게에 들러 감자 칩을 하나 샀다. 해가 졌다. 커다란 텐트 앞에 모인 가족들은 삼겹살을 구웠다. 커다란 텐트는 더 큰 텐트에 둘러싸여 있었다. 마치 안방과 거실 같은 모습이었다. 텐트 밖에는 테이블이, 의자가, 아이스박스가 있었다. 그 옆집 가족의 텐트는 더 컸다. 팔봉산 아래 작은 봉우리들처럼, 검은 밤 하늘 아래 텐트들이 봉긋봉긋 솟아 있다. 우리는 에너지바와 감자 칩을 나눠 먹고 우리의 비좁은 텐트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야 좀 옆으로 가. 너무 좁잖아."
"아까부터 너 생각해서 계속 웅크리고 있는데 무슨 소리야. 어디 봐봐. …. 네 자리가 훨씬 넓네!"

오늘은 더스틴이 원하는 대로 정해진 야영지에 자리를 잡았으니, 내가 그의 사정을 봐줄 이유가 없다. 나란히 누운 우리는 서로에게서 단 1cm의 공간이라도 더 빼앗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다. 사이가 좋아지긴 개뿔. 살짝 열어놓은 텐트 지퍼 안으로 환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달빛 아래로 팔봉산 봉우리가 아른거렸다. 달빛이 그려놓은 매끄러운 산허리를 바라보다, 불편한 몸을 뒤척였다. 더스틴은 어느샌가 잠이 들어있다.

 달빛이 그린 팔봉산 봉우리
 달빛이 그린 팔봉산 봉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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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역에서 팔봉산관광지까지 걷기
경로: 김유정역 – 삼포길 – 새술막길 – 70번 국도 – 어유포리 – 팔봉산관광지
거리: 약 22.1km
소요시간 : 약 9시간
난이도: 하 (거리는 길지만 대부분 술렁술렁 걷기 좋은 길이다)
추천: ★★★★☆ (내천과 숲을 따라 걷는 삼포길도 걷기 좋고, 작은 마을이 들어서 있는 새술막길도 좋다. 어유포리에는 오래된 민가들이 많은데 작고 오래된 집을 구경하는 것도 즐겁다.)


경로 소개

김유정역 – 삼포길

김유정역을 지나면 바로 마을길인데, 버스정류장이 보이면 거기부터가 삼포길이다. 삼포천 물줄기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 왼쪽으로는 숲이, 오른쪽으로는 내천이 나 있다. 길 중간중간에 농장들이 들어서 있다. 걷기에도 좋은 길이지만 차도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이다. 차는 아주가끔 한대씩 지나가기 때문에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포장된 도로라 걷기도 수월하다.

삼포길 – 새술막길

삼포길이 끝나는 곳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걸으면 새술막길이다. 비닐하우스, 소농장, 논밭 같은 게 들어선 마을길인데,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삼포길만큼 걷기 좋다.

새술막길 – 70번 국도

새술막길을 나오면 70번 도로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지옥 같은 도로. 우리는 건너편으로 가야 해서 굴다리를 따라 걸었는데, 딱히 '길'이라고는 할 수 없는 길이다. (농부들 걸으라고 밭까지만 연결해 놓은 길인 것 같다.) 수풀이 무성하고 논에서 넘어온 물 때문에 흙이 촉촉한게, 딱 뱀이 나올 것 같다. 굴다리를 넘어오면 주유소가 보인다. 왼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걸으면 또 다른 주유소가 보이는데, 편의점이 붙어있어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다. 이 주유소에서 어유포리로 들어가는 길목이 우리가 만원을 주운 지점이다.

70번 국도 - 어유포리

어유포리는 마을 풍경이 꽤 예쁘다. 오래된 집이나 폐허가 많은데, 무너진 돌담, 담벽 사이로 아무렇게나 자라난 풀, 아구가 맞지않는 나무문, 버려진 가게 같은, 그은 벽 같은 것들이 아득함을 자아낸다. 건너편 마을로 가면 우리가 밥을 먹은 밥집이 있다. 팔봉산관광지에 가면 식당이 여러 개 있지만 그 전에는 이 식당이 마지막이다.

어유포리 – 팔봉산관광지

논밭이 널찍하게 난 마을길을 따라 한 시간 정도 걷다보면 팔봉산관광지로 들어서는 길이 보인다. 팔봉산 봉우리가 내려다보는 팔봉산관광지에는 민박과 식당이 여러 개 있다. 민박은 3만원부터. 야영지도 있는데 소형 텐트는 3천원, 대형은 5천원, 데크에다 텐트를 치려면 1만원을 내면 된다. 간이 샤워실도 있고 간단한 먹거리를 살 수 있는 가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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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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