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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피해 유가족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14일 유씨에 대한 판결 직후 기자회견을 열었다. 법원은 1년4개월을 선고했다. 솜방망이 처벌에 피해자들은 분노했다.
▲ 사법부마저 피해자들을 버리려합니까? 가습기살균제 피해 유가족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14일 유씨에 대한 판결 직후 기자회견을 열었다. 법원은 1년4개월을 선고했다. 솜방망이 처벌에 피해자들은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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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로 아버지를 떠나보낸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후회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던 고 김명천(69)씨의 평범한 지론은 유훈이 되었다.

딸 김미란(41)씨는 하루를 오전 6시 반에 시작한다. 출근하는 남편 아침밥을 차려주고, 나갈 준비를 하며 아이를 깨운다. 집을 일찍 나설 때는 핸드폰을 이용해 아이를 깨운다. 엄마 표 모닝콜이다. 의정부에서 서울까지 지하철로 왕복 4시간, 하루의 1/6 이상을 지하철에서 보낸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결혼하고 전업주부로 생활하며 딸을 키워왔고, 평범했던 삶을 살았던 그녀였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드리기 위해 활동을 많이 하다 보니,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집안 청소도 잘 못하고, 먹는 것도 주로 라면이나 김밥 같은 간편식으로 때우기 일쑤다.

피해자들을 두 번 울린 솜방망이 판결

이날도 미란씨는 분주하게 서초동 법원으로 향했다. 지난 14일은 옥시에게 유리하게 보고서를 작성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유일재(61) 호서대 교수의 선고기일이었다. 일교차가 커 쌀쌀했다. 재판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한 그녀는 서울중앙지법 서관 앞에서 피케팅을 시작했다.

수수함이 느껴지는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이날도 아버지 영정사진은 꼭 챙겼다. 재판결과에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 듯했다. "서울대 교수도 2년을 받았으니..." 그는 계속 한숨을 쉬었다. 피해자들을 나서게 하는 법과 현실이 싫다고 했다.

선고를 앞두고 508호로 올라갔다. 30명 남짓 들어갈 법한 방청석은 이미 꽉 차 있었다. 적막이 흘렀고, 오전 10시 21분 쯤 형사 32부(재판장 남성민)가 입장했다. 재판부는 유 교수에 대한 배임수재와 사기혐의를 인정하면서도, 서울대 조명행(56) 교수처럼 데이터를 조작한 증거는 없는 점, 연구비와 기자재 비용을 용도대로 쓴 점과 그동안의 연구업적을 참작해 징역 1년 4개월에 추징금 2400만 원을 선고했다.

"유일재 당신이 실험한 제품 때문에 우리 애 폐가 터져서 죽었다고! 뭐가 황사고 박테리아 곰팡이야? 당신 자식들이 당해봐야 해!"

가습기살균제로 두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법원직원들이 그녀를 진정시키는 사이, 어느 방척객의 말 한마디가 피해자들 가슴에 불을 질렀다.

"시끄러워요."

격양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시끄럽다고요? 누가 시끄럽게 만들었는데요? 당신 가족이 죽어도 그렇게 말할 거예요?" 미란씨도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진정을 해! 시끄럽다니..."

이날은 울지 않기로 했다는 어느 유가족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끝내 눈물을 왈칵 쏟았다.

서관 입구 앞에서 바로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들은 지식인의 중대한 범죄였음에도, 검찰 구형에도 못 미친 판결을 비판했다. 976명에 달하는 사망자(17일 환경보건시민센터에 따르면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신고는 모두 4893명이고 그 중 20%인 1012명이 사망했다) 한 명당 1년 4개월을 선고해도 시원치 않은데, 가해자에게 너무 관대한 선고라고 했다.

두 아이를 잃은 어머니는 분노했다. 기자회견 내내 피켓을 움켜 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책임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을 촉구하며 무릎까지 꿇었다. 기자회견은 10분 동안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법원 직원이 이를 집회로 보고 중단시키려 해 잠시 실랑이가 있었으나, 시민들과 기자들의 원성을 받고 돌아갔다. 어느 직원은 항의하는 시민을 향해 "건방지다"는 표현을 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미란씨는 착잡한 마음을 추스르며 여의도로 향했다. 국회 가습기살균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아래 특위)의 활동기간 연장이 여당의 거부로 무산되고, 그녀는 일주일째 1인 시위를 이어왔다. 이날은 11시 20분부터 1시간가량 새누리당사 앞에서, 이후 12시 30분부터 2시까지는 국회 정문 앞에서 1인시위를 진행했다.

자동차 매연과 미세먼지로 금방 목이 칼칼해졌다. 그녀는 거리에 인파가 몰아치면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낀다고 했다. 인근에 있던 전단지 아르바이트 아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쓱~ 한번 쳐다보지만, 결코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점이 묘하게 비슷해보였다. 그사이 날씨는 더워졌다. 가만히 서있기도 힘든 따가운 햇살이었다.

평범한 일상이 사라진 잔인했던 7개월

가습기살균제로 두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기자회견 도중 무릎을 꿇으며 책임자들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이날 유씨에 대한 법원의 선고는 피해자들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 또 다시 무릎꿇은 유가족 가습기살균제로 두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기자회견 도중 무릎을 꿇으며 책임자들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이날 유씨에 대한 법원의 선고는 피해자들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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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은 미란씨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명천씨는 가습기살균제를 쓰고 폐 섬유화 증상이 나타나, 5년간 투병 끝에 작년에 운명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다양한 모습을 회상했다. 어린 시절 달려드는 맹견으로부터 미란씨를 재빨리 구해준 일, 학교 갔다가 돌아와서 얼어붙은 손을 녹여주던 일, 결혼식 때 함께 걷던 모습. 그는 평생 (교통범칙금)딱지 한 번 안 끊을 정도로 바른,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다. 손주들을 예뻐하는 자상한 할아버지였고, 썰렁한 아재개그를 좋아하며, 낚시를 참 좋아했던 사람, 밑창이 닳은 구두에 색 바랜 와이셔츠를 뒤집어 다시 입는 검소한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자상한 슈퍼맨이었다.

그런 분이 지난해 3월 말에 1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다니 믿기지 않았었다. 명천씨가 쓰러져 응급실에 갔을때 이미 폐기능은 다 죽어 있었고, 심장이 대신 산소를 운반해주는 것도 한계인 상황이었다. 폐 사진을 보니 섬유화가 많이 진행되어 전체가 다 하얗게 보였다.

미란씨는 일도 그만두고 딸과 함께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들어갔다. 투병생활은 가시밭길이었다. 아버지 코에 호스를 꽂아 산소를 공급해야 했는데, 고농도 산소가 들어가니 주변이 다 터졌다. 피부가 건조해진 탓이었다. 연고를 발라드려도 피가 났는데, 한두 방울 떨어지는 게 아니라 덩어리째 떨어질 때도 있었다.

더 이상 안 될 것 같아 산소마스크로 바꿔봤는데, 아버지가 산소를 못 빠져나가게 하려고 꽉 조이면서 볼가가 점점 패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산소포화도가 뚝뚝 떨어져서 점점 기본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다. 아버지는 말하는 것도, 씻는 것도, 양치질조차 못하고, 물이나 밥도 먹기 힘들었다. 그녀는 "폐가 굳은 걸로 끝이 아니라 평범했던 일상이 사라지니까, 그게 참 잔인했어요. 삶이라는 게 참 잔망스럽게 느껴지더라고요"라고 회상했다.

그녀는 혈액순환도 잘 안 되는 아버지를 수시로 주물러 드려야했다. 온기가 머무는 것은 순간이었고 바로 차갑게 식었다. 의사말로는 "숨찬 상황이 에베레스트에서 100m 달리기 한 수준"이라고 했다. 프로선수들이 격렬한 운동 후 느낄법한 숨 가쁨이 계속되니, 젖산도 엄청나게 쌓였다. 명천씨는 극심한 피로와 근육통을 호소했다.

모든 병이 그렇겠지만, 딸로서 지켜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제일 끔찍했다. "삶의 질이라곤 하나도 없다"던 아버지는, 어느 날 창밖에 일부 마비가 온 분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저 정도만이라도 좋겠다. 걸을 수 있고 숨 쉴 수 있으니까"라며 부러워했다.

68kg정도 나가던 명천씨의 체중은 45kg까지 쭉 빠졌다. 퇴원 당시 7~8정도에 맞췄던 산소통의 게이지는 점점 올라가 최대수치인 15에 근접해갔다. 쓸 수 있는 수단은 다 써봤지만 힘에 부쳤다. 아버지는 산소농도가 올라가면 때로 극심한 두통을 호소했고, 낮아지면 숨이 가빠왔다. 그럴 때 그는 종종 혼잣말을 했다.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자다가..."

"아버지의 고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지옥 같은 시간"

가습기 살균제로 아버지를 떠나보낸 김미란씨가 14일 국정조사 특위 연장을 요구하며 새누리당사 앞에서 1인시위를 이어갔다.
▲ 오로지 민생 가습기 살균제로 아버지를 떠나보낸 김미란씨가 14일 국정조사 특위 연장을 요구하며 새누리당사 앞에서 1인시위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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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임종 직전 새벽도 생생히 기억했다. 아버지가 가족들이 꼬박 밤을 샌 걸 알고, 아이들 좀 재우고 가야겠다 싶으셨는지 미란씨가 나오니까 "좀 잤냐?" 하시더라. 그때는 아버지의 그런 마음가짐이 참 슬펐다.

"아빠 대단한 거야 7개월이나 버티신 거라고..." 슬프면서도 그 얘기를 해드렸다, 아버지는 "너랑 시간 보내라고 7개월을 주셨나보다"라고 답했다. 미란씨는 엠뷸런스를 탈 때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명천씨가 물 한모금만 달라며 마지막을 준비했던 상황이었음에도, 그녀는 살리고 싶었다. 산소팩을 연결하고, 멍이 들 정도로 무거운, 10L짜리 산소통을 끌고 내려왔다.

아버지를 구급차에 옮기다가 산소통에 연결된 줄이 싹 빨려가 도저히 낄 수 없게 되었다. 응급조치를 하는데, 야속하게도 산소포화도는 계속 떨어졌다. 사이렌소리와 함께 회오리가 불어 닥치는 듯했다. 그녀는 보호자로 동승해서 심폐소생술 하는 장면을 본 것도,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하필 아버지를 통해서.

아버지 명천씨의 몸이 조금씩 뻣뻣하게 굳어 가는 게 느껴졌다. 보낼 수밖에 없는데, 보내지 못하겠는 찰나 병원에 도착했다. 하도 서럽게 울어 그런지 의사가 "돌아가셔도 청각이 가장 오래 살아있다"고, "계속 말씀해주시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계속 말했다.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아버지를 위한다고 갔으니 곁에서 좀 더 평정심을 유지했어야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미란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퇴원 후 처음 1~2개월까지는 평소와 별 차이가 없었지만, 3~4개월이 지나니 아버지가 곁에 있는 게 고마우면서도, 일상패턴이 틀어져 버린 것에 스트레스와 짜증이 쌓여갔다고 했다.

"굉장히 아버지를 위하고 존경한다고 생각했는데, 상황에 같이 말려들어가게 되면서 도저히 못 이겨내겠더라고요."

그녀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현실을 못 받아들였던 건지,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 못 해드린 것 같았다.

"정말 하늘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로 펑펑 울었어요. 혹시라도 시간을 돌려 다시 볼 수 있다면 더 잘 해드렸을 텐데, 자식은 어쩔 수 없나 봐요. 맨날 후회만하고..."

그녀가 처음부터 가습기살균제 진상규명 활동에 적극적인 건 아니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가 영유아, 산모 중심으로 보도되어 아버지의 병과 관련 있는지도 몰랐다. 2014년에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가족모임'(가피모)를 알게 되었고, 아버지 증상에 관해 글을 써봤지만 그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5개월 동안은 한없이 무기력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딸이 학교에 가면 TV 앞에서 가만히 있었다. 입맛도 없어서 딸이 돌아올 때 간식준비를 하며 간단히 해결하고, 죽음에 대한 것만 계속 찾아봤다.

"막상 돌아가시니 못해준 것, 속 썩였던 것, 마음 아프게 했던 것만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특히 아프실 때 상황이 더욱 옥죄여 왔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976명이 집집마다 다 그런 상황을 겪었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하다고 했다. 얼마 후 가피모에서 총회를 연다고 연락이 왔고, 며칠 뒤 옥시코리아 신현우 대표의 검찰소환이 있었다. 5년 만에 소환이라니 중요하긴 한 것 같은데 막상 가려니 겁도 났다.

현장에 온 사람도 많지 않았다. 가피모 회원 안성우씨와 미란씨 어머니까지 딱 셋, 거기에 가피모 강찬호 대표, 시민단체 활동가들 몇 명이 합류했다. 출석하는 신씨를 보니 뭔가 몰아쳤다. 너무 억울해서 "아빠를 살려내라"고 외쳤다. 그날 언론에 많이 보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전면적으로 활동에 나서는 게 지금도 엄두가 안 난다고 했다.

"물론 나서야 되는 상황이긴 한데, 그게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안 했을 것 같아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꿈틀 하잖아요? 꿈틀은 해야 할 것 같은 거예요. 우리들이, 내가 이렇게 아프다. 이런 걸 조금이라도 알아 달라. 누군가는 그냥 잊히길 바랄 수도 있겠지만 말이죠. 가끔 왜 이리 안달하며 다니냐고 묻는 분들도 있어요. 가만히 있어도 등급판정 받고 해결 될 텐데... 저는 그게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열심히 활동하고 이슈화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결과를 만들어내는 거 아닐까요?"

피해자들도 다시 평범한 일상을 살고싶어요

재판과 1인시위까지 바쁜 일정을 마치고, 14일 오후 2시 여의도 국회 인근 카페에서 김미란씨를 만났다.
 재판과 1인시위까지 바쁜 일정을 마치고, 14일 오후 2시 여의도 국회 인근 카페에서 김미란씨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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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씨는 딸의 방학을 맞아 올해 7월 말부터 1달 정도 활동을 쉬었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잘 굴러가는 것 같았다. 가족여행도 가고, 영화보고 백화점구경도 가고, 드라마 보고 음악 듣던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다시 평범한 일상을 살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기도 해요. 그러다가도 잊히면 안 된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네요."

집에서 딸과, 남편과 시간을 보내면서도 관심을 아예 끌 수는 없었다. 기사가 나오는 대로 가입한 카페, 밴드, 페이스북에 쉴 새 없이 올렸다. 눈이 부시고 시릴 정도로 무리해서 급성 안구건조증이 왔다.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았다. 요즘은 지쳤는지 좀 덜하다. 딸이 개학하고 이대로 좀 더 쉬어볼까 생각이 들던 찰나, 8월 18일에 3차 가습기살균제 피해조사결과가 나왔다. 아버지가 4단계 판정을 받았다. 도저히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딸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찢어지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고 했다. 유가족들이 겪을 트라우마도 걱정했다.

"자기 아이 또래들이 크는 게 보일 텐데, 죽을 때까지 만감이 교차할 것 같아요. 저희 아버지야 80까지만 사셔도 10년, 20년 안에 겪어야 할 일이었지만, 자녀를 잃으신 분들은 아이가 살았을 80년, 100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견뎌야 하잖아요."

그녀도 사람인지라, 가끔 아버지 잃은 걸로는 모른다는 말을 들을 때면 서운할 때가 있다고 했다.

"'너도 아버지를 잃어서 슬프겠지만, 나는 자식을 잃어서 더 슬프다'는 슬픔의 밑바닥을 향한 경쟁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모두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서 슬픈 거잖아요. 가습기살균제나 세월호나 강남역이나..."

큰 사건들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우리사회가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 조금씩 무뎌지는 건 아닌지, 그녀는 안타까워했다.

"딸, 왜~ 알았어 엄마가 맛있는 거 사갈게."

인터뷰 말미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강아지', 딸에게 전화가 왔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드리려 노력한 딸 미란씨는 오후 4시쯤 엄마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부지런히 의정부로 향했다.


태그:#가습기살균제참사, #1012명사망, #특위연장1인시위, #가피모, #전국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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