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의 간첩조작사건을 다룬 다큐영화 <자백>의 포스터. 지난 13일에 개봉했다.

국정원의 간첩조작사건을 다룬 다큐영화 <자백>의 포스터. 지난 13일에 개봉했다. ⓒ (주)시네마달


이강백의 <파수꾼>이라는 작품이 있다. 1974년 8월, <현대문학>에 발표된 희곡 작품이다. 등장인물은 넷이다. 촌장과 파수꾼 가, 나, 다. 마을에 이리떼가 나타나면 파수꾼 가는 "이리떼가 나타났다"라고 소리친다. 파수꾼 나는 그때마다 양철 북을 두드린다. 파수꾼 다는 마을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정체가 이리떼가 아니라 흰 구름이었음을 밝혀낸다. 그리고 촌장에게 진실을 알리는 편지를 쓴다.

촌장은 진실을 알리겠다는 파수꾼 다의 의지를 회유와 협박으로 꺾는다. 촌장이 내세우는 명분은 하나다. '마을의 질서 유지'. 그러나 촌장의 속내는 다르다. '본인의 권력 유지'를 위해 허상의 이리떼를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준 것이다. 희곡 <파수꾼>은 유신정권이 안보를 이유로 공안정국을 만들어내던 당시 상황을 풍자한다.

40여 년이 지난 오늘, 상황은 다르지 않다. 유신정권에서 통하던 안보논리는 오늘날 그대로 재현된다. 국정원이 북한 이탈 주민에게 간첩 혐의를 씌운다. 검사는 최선을 다해 유죄로 만든다. 언론은 "간첩이 나타났다!"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국내엔 공포 기류가 형성된다. 이렇게 국정원과 검사, 언론의 합작으로 훌륭한 사회 질서가 완성된다. 정부는 국민을 통제하기 더 쉬워지며 국민은 정부의 보호 아래 안전한 대한민국에서 살게 된다.

이 안전한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사람은 하나다. 간첩 누명을 쓴 사람. 뉴스타파 최승호 PD는 이 '누명'의 진실을 좇았다. <파수꾼>의 '파수꾼 다'가 된 것이다. 파수꾼 다는 끝내 촌장의 권력에 굴복했다. 하지만 최 PD는 40개월간의 집요한 취재 끝에 간첩의 실체를 밝혀내고 세상에 알렸다. 영화 <자백>은 간첩조작사건들의 진상을 파헤치며 조작된 간첩으로 만들어 낸 공포의 진상을 보여준다.

국정원과 검사의 거짓 자백, 최 PD의 진실 자백

 유우성 사건을 담당했던 이시원 검사에게 진실을 따져 묻는 중인 최승호 PD.

유우성 사건을 담당했던 이시원 검사에게 진실을 따져 묻는 중인 최승호 PD. ⓒ (주)시네마달


국정원과 검사가 간첩 누명을 쓴 사람으로부터 거짓 자백을 받아내는 동안 최 PD는 국정원과 검사에게 '진실 자백'을 받아내려 한다. 영화는 2012년에 있었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며 시작한다. 국정원은 간첩 혐의를 받았던 북한 이탈 주민 유우성 씨의 동생 유가려 씨를 감금해 조사를 벌였다. 폭언과 폭행으로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검사는 국정원이 짜 놓은 시나리오에 맞춰 출입국 기록들을 위조해 유우성 씨의 유죄를 입증하려 했다. 최 PD는 국정원 수사관과 검사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이들에게 진실을 묻는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 진실은커녕 자신들의 과오를 숨기기에만 급급하다. 영화는 국정원과 검사의 이런 가식적인 모습들까지 생생하게 담았다. 유가려 씨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던 일명 '아줌마 수사관'은 최 PD가 다가가자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인다. 다른 취재진이 촬영하자 초상권 침해를 운운하며 강한 불쾌감을 내비친다. 이때 아줌마 수사관은 말한다. "대한민국에서 한밤중에 이런 일이!" 과연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는 국정원 수사관다운 말이다. 애먼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어 사회 질서 유지에 힘쓰는 그녀에게 오밤중의 취재 카메라는 질서를 헤치는 몹쓸 일일 것이다.

간첩 혐의 무죄는 국정원의 유죄

 국정원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주요업무 중 하나가 '북한 이탈 주민 보호'라 명시돼 있다. 그러나 국정원은 북한 이탈 주민에게 간첩 혐의를 씌우고 있는 실정이다.

국정원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주요업무 중 하나가 '북한 이탈 주민 보호'라 명시돼 있다. 그러나 국정원은 북한 이탈 주민에게 간첩 혐의를 씌우고 있는 실정이다. ⓒ 국가정보원


영화는 중앙정보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40년이 넘게 끝나지 않은 공안정국의 실상을 고발한다. 1970년대,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피해자들을 만나 거짓 자백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히 듣는다. 또한, 자백을 받아냈던 당사자도 만난다. 전 대통령비서실 비서실장이자 1975년 학원침투간첩단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장이었던 김기춘 씨. 그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영화 마지막에선 40년 세월 동안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쓴 사람들이 최근 재판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은 기록을 열거한다. 이 기록들은 '국정원의 유죄'를 반증한다.

최근 국정원의 간첩 조작은 모두 북한 이탈 주민을 상대로 이뤄졌다. 유우성 씨, 홍강철 씨 등 탈북한 사람들은 국정원 공포 조작의 희생양이 됐다. 국정원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주요 업무 중 하나가 '북한 이탈 주민 보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국정원은 심각한 직무유기를 행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상황에 최근 박근혜 대통령은 "탈북민은 먼저 온 통일"이라며 북한 주민들에게 탈북을 권유했다. 국정원의 유죄를 먼저 청산한 후에야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공포를 넘어서

 간첩 혐의를 받았던 유우성씨의 동생 유가려씨. 유가려씨는 국정원 중앙합동신문센터에 6개월 간 감금 됐다. 국정원의 회유와 압박을 이기지 못한 채 거짓 자백을 했고 재판에서도 거짓 증언을 했다.

간첩 혐의를 받았던 유우성씨의 동생 유가려씨. 유가려씨는 국정원 중앙합동신문센터에 6개월 간 감금 됐다. 국정원의 회유와 압박을 이기지 못한 채 거짓 자백을 했고 재판에서도 거짓 증언을 했다. ⓒ (주)시네마달


희곡 <파수꾼>에서 파수꾼 가와 나는 관객을 향해 이리떼를 피하라고 소리친다. 관객에게 마을 사람들의 역할을 부여하며, 조작된 공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묻는 것이다. 영화 <자백>도 마찬가지다. 국민인 관객에게 국정원이 조작한 공포의 허상을 알리고 이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묻는다. 최 PD는 말한다. "우리 내면의 공포 벽을 넘지 않으면 우리는 끝내 자유로울 수 없다"라고.

공포를 넘어서야 한다. 국정원은 국민의 공포를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공포를 넘어서야만 '종북 빨갱이'의 이분법과 낙인찍기가 사라지고 간첩으로 몰리는 억울한 사람 또한 사라진다. 공포를 넘으려면 더는 침묵해선 안 된다. 이리떼가 아니라 흰 구름이라고 외쳐야 한다. 영화 <자백>은 이런 침목에 균열을 내는 첫 영화다.

뉴스타파 국정원 최승호 간첩 자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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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산책을 좋아합니다. 준이, 그리, 도비와 삽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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