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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범신이 작성했다 삭제한 트위터 글.
 소설가 박범신이 작성했다 삭제한 트위터 글.
ⓒ 트위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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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이 그랬듯 '살았고 썼고 사랑하고' 살았어요. 나로 인해. 누군가 맘 상처 받았다면  내 죄겠지요. 미안해요~"

21일 자정 무렵, <은교>의 작가 박범신이 자신의 SNS에 적은 글이다. "미안해요"라고 했으니 분명 '사과'의 글인 것 같은데, 진심이 전해지지 않는 건 왜일까. 2세기 전 인물이자 '스탕달 신드롬'의 주인공인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1783~1842)만 애꿎게 등장한 꼴이 됐다.

지금은 삭제된 박범신의 이 사과 글은 '성희롱' 논란의 중심에 선 그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 보인다. '그래도 피해자가 상처받았다면 어쨌든 미안하다'는 안하무인격의 영혼 없는 반성처럼 느껴질 뿐이다.

이러한 사과는 21일 박범신과 함께 자리했던 기억을 털어놓은 출판계 출신 트위터 사용자들의 폭로에서 비롯됐다. 지금 SNS 상에서 박범신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를 비롯해 한국사회 전반에 만연한 성폭력 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폭로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먼저 몇몇 매체를 통해 사과 의사를 밝힌 소설가 박범신의 사례를 보자.

박범신에게 여자란, "늙은 은교", "젊은 은교", "어린 은교"?

두고두고 분하고 화났던 순간들.
 두고두고 분하고 화났던 순간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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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 없이 술을 따르고 따라 달라 하고 몸을 만졌다."
"청일점인 그는 우리 모두를 '은교'라고 불렀다."
"영화 <은교> 제작 시 여자 배우를 성희롱한 얘기를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떠벌리기도 했다."

박범신의 수필집을 출간한 출판사에 재직했다는 트위터 사용자 A씨는 2014년 4월 당시 수필집 출간 즈음 마련된 술자리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했다. 이 A씨에 따르면, 유일한 남성인 박 작가의 강권으로 성사된 이 술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본인과 출판사 편집장, 막내 편집자, 동일 시기 홍보차 방송된 SBS의 한 토크쇼 방송작가, 박 작가의 여성 팬 2명 등이었다.

A씨의 주장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박 작가는 오래된 연이 있던 여성 팬들을 끊임없이 성추행하는가 하면 동석한 여성들에게 음담패설에 가까운 언사를 지속했다고 한다. 또 박 작가가 동석한 여성들을 "늙은 은교", "젊은 은교", "어린 은교"로 부르는가 하면, 작품 속 성적인 묘사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언급했다고 A씨는 폭로했다. 그 와중에 과거 영화 <은교>에 출연한 여배우에 관한 일화도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성폭력에 가까운 언동에 대해 "원래 남자 작가랑 여자 편집자는 그런 관계"라는 것이 박 작가의 갈무리였다고 한다. A씨는 지금 과거 경험을 털어 놓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 회사를 그만두었기 때문이고 다른 출판사에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출판사에 몸담고 있다면 유명 작가의 성희롱을 이야기했다는 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작가 당사자가 나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지 않을까, 고용주들이 나를 꺼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절대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중략). 은교, 나는 은교라는 이름만 봐도 토악질이 난다."

이날 또 다른 트위터 사용자이자 다른 출판사 편집자였다는 B씨 역시 비슷한 시기 박 작가와 동석했던 한 출판기념회 자리의 일화를 털어놨다. 이 역시 A씨와 사례와 대동소이하다. 유명 작가나 기자들이 동석한 자리에서 권위를 내세운 박범신 작가의 음담패설이 계속됐고, 동석자들이 이를 모른 체했다는 것이다.

박범신 작가는 이날 논란이 일파만파 커지자 <허핑턴포스트>와 <한국일보> 등에 "사실관계를 점검할 수 없고 그래야 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팩트를 가지고 다투고 싶지 않다"며 "최연장자로서 동석한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줬다면 죄송하다", "그런 일이 있었냐 없었냐를 따지기보다 누군가 나로 인해 상처받았다면 사과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삭제된 박 작가의 트위터 게시물 역시 이러한 의도와 일맥상통해 보인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움직인 #성폭력 해시태그 무브먼트 

그것이 알고싶다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글
 그것이 알고싶다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글
ⓒ 그것이 알고싶다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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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문화예술계 (문단, 영화계 등) 내의 성폭력으로 피해를 입은 적이 있거나 이에 대해 잘 알고 계신 분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21일 오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 트위터를 통해 제보자를 구하고 나섰다. 최근 일단의 트위터 사용자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한국사회 전반에 만연한 성폭력 관련 해시태그 운동 덕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트위터를 점령한 성폭력 해시태그들이 착실히 정리되고 있고, 그 사례들에 대한 폭로가 들불처럼 번지는 중이다. 

#오타쿠_내_성폭력 / #운동권_내_성폭력 / #교회_내_성폭력 / #대학_내_성폭력 / #가족_내_성폭력 / #문화계_내_성폭력 / #스포츠계_내_성폭력 / #예술계_내_성폭력 / #영화계_내_성폭력

그러니까 박범신 작가의 사례가 '노욕'을 부린 한 소설가의 사례로, 일부 문인들의 치부로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은 이 중 몇몇 사례가 수면 위로 올라온 문화예술계의 사례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19일, 수면 위로 올라온 굵직한 사례는 웹툰 작가 이자혜와 시인 박진성이다. 

<미지의 세계>로 알려진 웹툰 작가 이자혜는 성폭행 방조와 사주 의혹이 불거지면서 논란의 주인공이 됐다. 역시 트위터를 통한 폭로였다. 이 트위터 사용자는 19살 때 이자혜 작가에게 소개받은 36살 남성에게 지속적으로 성추행과 강간을 당했고, 이 사실을 인지했던 이자혜에게 휴대폰 문자 등을 통해 관계의 지속을 종용받았다고 폭로했다.

논란이 커지자 해당 출판사는 예약 판매 중이던 <미지의 세계> 단행본 3권 예약을 취소하고 판매 중인 1, 2권의 재고 수량을 모두 회수하고 폐기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이 출판사는 또 향후 출판 계약은 물론 남은 분량의 추가 발행도 진행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이 논란은 트위터 상에서 '#오타쿠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촉발시킨 계기가 됐다.

역시 지난 19일, 시인 박진성의 상습적인 성폭력도 문단 내에 파문을 일으켰다. <목숨>, <식물의 밤> 등으로 유명한 박진성 시인이 수년 간 SNS를 통해 만난 여성들을 성희롱, 성추행했다는 것이다. 이 중에는 미성년자와 습작생들, 팬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문단_내_성폭력'이란 해시태그를 달고 익명으로 폭로한 피해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고, 박진성 시인도 몇몇 매체와의 통화를 통해 일부 사실은 시인한 상태다.

성폭력과 관련한 익명 혹은 실명의 폭로, 더 필요하다

 
ⓒ 페미니즘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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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계 성추행범들 때문에 필드를 떠난/떠나야만했던 재능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그들이 업계에서 이룰 수 있었던 성취는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하니 정말 성범죄자들과 그들을 부둥부둥하는 동조자들 모두 인류의 해악이다." (‏@ca*********) 

"요즘 타임라인 너무 눈물 난다. 강간, 성폭행 피해자들 생각보다 너무 많고 (꽤 될 거라 생각은 했었는데 이렇게 많을 거라고는 예상 못했음) 올라오는 사례 중 내가 겪어본 상처와 비슷한 것들도 많아서 글자 몇 개만 봐도 고통스럽다. ‏(@ki******)

분노와 슬픔. 이렇게 문화예술계는 물론 사회 전방위적으로 만연한 성폭력과 관련한 폭로들을 접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고통'으로 수렴된다. 특히나 박범신 작가처럼 대수롭지 않다는 투의 안하무인격의 사과로 일관하거나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법적 조치 운운하는 적반하장 식의 반응을 보일 때 그 고통이 배가된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박범신 작가의 사례가 폭로됐던 21일, 유력 전문지에 영화평을 기고하는 한 영화평론가의 성폭력 사례도 트위터를 달궜다. 폭로 글에 의하면, 합의와 같이 법적 조치를 끝낸 것으로 알려진 이 평론가는 트위터 계정을 삭제했고, 그가 쓴 영화평들이 해당 잡지에서 삭제됐을 뿐이다. 이번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없었다면, 피해자들의 추가 증언이 없었다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사건이었을지 모른다. 

성차나 지위에 의한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각종 성폭력이 업계에 만연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박범신 작가의 사례를 폭로한 A씨와 같이, 자신에게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가해질지 2차 피해와 가해자의 권위로 인해 당할지 모르는 불이익을 걱정해 피해자 스스로가 침묵을 지키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이번 해시태그 운동은 더 의미가 커 보인다.

단순히 몇몇 가해자들에 대한 폭로전이라고 애써 의미를 축소시킬 필요는 없다. 몇몇 실명을 언급한 사례를 제외하더라도, 익명의 증언자가 익명의 가해자를 지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해시태그 운동이 번져나가고, 실질적인 업계 사례들이 보도되고,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만으로 '세상의 너무 흔한' 성폭력과 성희롱에 대한 경각심을 퍼트릴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한편,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의 파장 이후 여성혐오와 성차별에 대한 반발과 대응이 점차 실천과 연대의 영역으로 모색되는 분위기다. SNS나 온라인상에서의 목소리가 결국 현실 영역에까지 일정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다(물론 무차별적이고 사실을 훌쩍 뛰어넘는 자의적인 폭로는 필히 법정공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전제는 여전하다).

최근 개봉한 영화 <걷기왕> 팀은 촬영 전 한국여성민우회의 전문강사를 초청, 성희롱 예방교육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성희롱 예방교육 매뉴얼도 콘티북에 실었다. 여타 영화제작 환경에서 쉬이 볼 수 없는 풍경이라 할 수 있지만, 분명 노력은 이뤄지고 있다.

이렇게 작은 실천들이 결국 피해자를 줄이고, 성폭력으로 인한 공통의 고통들을 줄여나갈 수 있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이번 해시태그 운동이 좀 더 너른 호응과 반응을 이끌어내기를, 문화예술계를 넘어 각 업계 전반의 현재 상황을 직시하게 만드는 동시에 경각심을 일깨우기를 바라는 건 그래서다. 더 이상, 영화 <살인의 추억> 속 "강간의 왕국"이라던 1980년대나 지금이나 같을 순 없지 않겠나.


태그:#박범신, #은교, #성폭력, #박진성, #그것이알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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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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