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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오늘 수업 시간에 정치 이야기 좀 하면 안 돼요?"

교실로 가고 있던 민서(가명)가 말했다. 며칠 전 수업하러 복도를 걸어가는 중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랑 최순실씨 때문에 그런 거지?"
"네."


초등학생 사이에서도 회자되는 최순실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공범 및 사기 미수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최순실씨가 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뒤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 영장실질심사 마친 최순실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공범 및 사기 미수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최순실씨가 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뒤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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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주장하는 글 읽기' 단원을 공부하고 있었다. 교실에서 거리로 나선 이들의 주장과 근거가 무엇인지 물어봤다. '하야'와 '퇴진'과 '탄핵', '무당'과 '교주'와 '언니, 동생'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은 '비선'을 통한 '국정 농단'이 국가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고 있었다.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현 사태를 어떻게 끌고 갈지를 놓고 한두 마디씩 내놓았다.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이었다.

"아빠, 요새 최순실씨가 왜 이렇게 난리예요?"

그 며칠 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초등학교 5학년 딸이 물었다.

"너희들도 최순실씨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러니?"
"응. 얘들이 반에서 말썽 부리고 말 안 듣는 아이들을 '순실이 같다'고 그래요."


딸에게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간추려 설명해줬다. '충격'에 빠질 것 같아 단어 선택과 어조에 유의했다. 말을 듣고 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참 나빴네."

아이들 사이에 퍼진 '참 나쁜 대통령' 정서는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교무실에서였다. 점심 식사를 마친 선생님들이 테이블 주변에서 담소를 나눴다. 최근 사태에 대한 각자 나름의 '해석'과 '평가'의 말들이 나왔다. 김 선생님(가명)이 이런 말을 꺼냈다.

"'독일임시정부'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나는 양치질 준비를 하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갑작스레 나온 '독일임시정부'라는 말이 낯설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최순실씨가 독일에 있으면서도 국정을 좌지우지했을 거 아니에요."

수만의 장삼이사가 말한다... "박근혜 퇴진하라"

지난 4일 오전 '비선실세'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관련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발표 장면이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진흥재단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를 통해 생중계 되고 있다.
▲ '최순실 국정개입 파문'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담화 발표 지난 4일 오전 '비선실세'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관련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발표 장면이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진흥재단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를 통해 생중계 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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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최순실게이트'가 온 나라 사람을 하나로 만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 덕분에 너도나도 좋은 '정치 공부' 할 기회를 갖고 있다. 온 나라가 '정치 교과서'가 됐다. 뉴스를 보거나 밥을 먹으면서 자발적으로 '정치 수업'을 한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선 이들이야말로 가장 생생하게 각자의 '정치 활동'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1980년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총궐기'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장삼이사들의 입에서 "박근혜는 하야하라" "박근혜는 퇴진하라" 같은 강성 구호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국정원 대선 개입 문제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놓고 '박근혜 퇴진'이라는 말이 현실적으로 의미가 있는지 논쟁이 벌어졌던 몇 년 전이 떠올랐다.

나는 '촛불'과 '궐기'가 '반박근혜 반보수 이데올로기' 실천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가족을 위해 하루하루 성실히 일하고 세금 내는 평범한 주권자 시민 모두를 위한 것이다. 박 대통령을 포함해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자들이 1%라면 그들은 99%다. 진보와 보수를 불문할 것이다.

촛불이 꺼진 뒤

5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내려와라_박근혜 2차 범국민대회'에 참여한 수만명의 시민, 학생, 노동자, 농민들이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 분노한 시민들 "박근혜 퇴진" 5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내려와라_박근혜 2차 범국민대회'에 참여한 수만명의 시민, 학생, 노동자, 농민들이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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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나는 '촛불' 꺼진 뒤가 두렵다. 어느 카톡방에서 "솔직히 요즘 가장 짜증나고 경멸스런 사람의 유형은 잘 먹고 잘살면서 '나는 정치에 관심 없어서 그런 거 몰라요'라고 아주 착한 얼굴로 얌전히 말하는 국민이다"라고 쓴 글을 보았다. 5만, 10만 명이 거리로 나왔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그들만의 일상을 살고 있다. 시민과 정권이 맞붙으며 소란스러워질 때 그들 '착한 국민'들은 국가를 걱정하며 더욱 성실히 자기 일에 몰두할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유신 괴물' 박정희가 20년 가까이 권력을 차지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탄을 발사했을 때, 차지철 실장은 '주군'을 버려두고 화장실로 도망쳤다. 총격을 받은 박정희를 부축한 것은 이른바 '대행사'(박정희 대통령의 비밀 술자리를 가리키는 말.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경호실장 등 최측근과 두어 명의 여성이 함께하면서 술과 여흥을 즐겼다고 함) 진행요원이던 가수 심수봉과 여대생 신재순 두 사람이었다. 박정희 장기 독재 권력의 비법이 부하들의 '충성'은 아닌 것 같다.

김재규의 항소심을 변호한 강신옥 변호사는 1980년 1월 21일 자로 '사건일기'를 남겼다. 그 중 한 대목에 '괴물' 박정희의 장기 독재 비결이 나와 있다.

"유신독재를 비판하면서 감옥에 들락거리는 국민은 전체 국민의 숫자에서 별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가 실종된 체제 속에서도 저항만 하지 않으면 큰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게다가 지금 한국 사회는 물질적 풍요를 가장 큰 가치로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그것은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심은 가치관이다. 독재가 나쁜 줄은 알지만 5·16 이후부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가치관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왔다. 박정희의 국장이 치러질 때 목놓아 울던 국민들은 박정희가 오랫동안 자유민주주의를 실종시킨 독재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었다." - 문영심(2013),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시사IN북, 262쪽.

여기저기 '괴물'들이 출몰하고 있다. 익숙한 스테레오 타입이다. 통제되지 않은 권력, 무소불위와 불통의 통치자, 국정을 농단하는 비선 라인, 추잡한 공모자들의 돈놀이와 협잡. 그 '괴물'들을 키운 것은 "박정희의 국장이 처리질 때 목놓아 울던" 순진하고 인간적인 국민들, 바로 그 '평범한 괴물'들이 아니었을까.

미국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이 말했다. 인류는 세 부류로 나뉜다.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 움직이는 사람들. 어떤 사람인가. 최순실 무리의 반격이 언제 시작될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태그:#박근혜, #최순실, #독일임시정부, #국정농단, #탄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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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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