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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사 의승수군유물전시관에서 본 흥국사 전경 사진. 흥국사는 370여 년 전 송광사 대웅전을 중수한 뒤 그 설계 도면으로 41명의 목수 수군 스님(불벽에 각각 법명이 적혀 있다)들이 3년간 천일 기도와 함께 대웅전 중건 불사를 하면서 "누구든지 이 대웅전의 문고리만 한번 잡아도 소원성취하고, 3악도(지옥, 아귀, 축생)의 환생을 면하고, 성불하게 하소서."라고 원력과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흥국사는 대웅전 문고리를 잡는 것은 물론 기원을 드리려는 많은 불신자들이 찾는 사찰이 되었고, 6.25때 불타버린 송광사 대웅전의 원형을 보고자 건축 관련 전문가들이 찾아오는 절이 되기도 했다.
 흥국사 의승수군유물전시관에서 본 흥국사 전경 사진. 흥국사는 370여 년 전 송광사 대웅전을 중수한 뒤 그 설계 도면으로 41명의 목수 수군 스님(불벽에 각각 법명이 적혀 있다)들이 3년간 천일 기도와 함께 대웅전 중건 불사를 하면서 "누구든지 이 대웅전의 문고리만 한번 잡아도 소원성취하고, 3악도(지옥, 아귀, 축생)의 환생을 면하고, 성불하게 하소서."라고 원력과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흥국사는 대웅전 문고리를 잡는 것은 물론 기원을 드리려는 많은 불신자들이 찾는 사찰이 되었고, 6.25때 불타버린 송광사 대웅전의 원형을 보고자 건축 관련 전문가들이 찾아오는 절이 되기도 했다.
ⓒ 흥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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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난리 때에 자기 몸 편안히 할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정의와 기개를 발휘하여 군병을 모집하여 각각 300여 명씩을 거느리고 나라의 수치를 씻으려 하니 이들은 참으로 가상합니다. 2년째 해상에 진을 치고서 자기 스스로 군량을 준비하여 이곳저곳 나누어 공급하며 간신히 양식을 이어대는 그 고생스러운 정황은 관군보다 갑절이나 더한데, 아직도 수고로움을 거리끼지 아니하고 더욱 더 부지런할 따름입니다. 일찍이 적을 토벌할 적에도 현저한 공이 많았으며, 나라를 위한 분개심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입니다. (중략) 조정에서 특별히 표창하여 뒷사람을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순신이 1593년 3월 10일 조정에 보낸 장계의 일부이다. <충무공 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이 장계에서 이순신은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상을 줄 것을 요청하면서, 그렇게 하면 앞으로 의병이 되어 왜적과 싸울 뒷사람들을 격려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의승수군의 활약 보고한 뒤 포상 건의하는 이순신

이순신은 (인용문에는 생략했지만 원문에는) 상을 주어야 할 인물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그들이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 의병을 일으켰고, 2년 동안 자기가 먹을 양식을 직접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전에도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전쟁 초기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충성심을 발휘하고 있는데, 고생은 관군보다 두 배나 더 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친필로 여겨지는 供北樓(공북루) 현판. 흥국사수군의승유물전시관에서 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친필로 여겨지는 供北樓(공북루) 현판. 흥국사수군의승유물전시관에서 볼 수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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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거론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일단 의병이고, 관군의 갑절이나 되는 고생을 해상에서 2년째 하고 있다는 표현으로 볼 때 수군이다. 물론 원문의 '전략'과 '중략' 부분에는 순천교생 성응지, 의승 수인, 의승 의능 등 이름들이 밝혀져 있지만, 인용문만 읽고는 어떤 인물들을 가리키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답을 말하면, 이들은 대략 의승수군(義僧水軍)이다. 그냥 의승군도 아니고 의승수군이다. 의승수군은 승려로서 임진왜란 때 수군에 참전한 의병들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이전의 시기에 나라의 전쟁에 참여한 승려들은 일반적으로 승군이라 하고,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정묘호란에 참전한 승려들은 그와 구별하여 의승군이라 한다.) 

수군으로도 활동한 승려들... 모르는 사람 많아

의승수군이라는 어휘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국민들도 많을 것이다. 양은용의 논문 <임진왜란 시기 의승의 활동과 역할>에 나오는 '의승군에 대한 연구는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대표적인 몇 인물에 한정된 성격이 강하다'라는 표현을 굳이 원용하지 않더라도, 육지에서 큰 활약을 펼친 의승장들조차도 별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승수군은 더욱 낯설 것이 자명한 까닭이다.

흥국사 의승수군유물전시관. 이순신 장군의 친필로 추정되는 공북루 현판, 임진왜란 당시 의승수군들이 왜적과 싸울 때 입었던 피 묻은 옷, 흥국사 승려들이 만든 전라좌수영 관련 건축용 기와 등을 볼 수 있는 소중한 답사지이다.
 흥국사 의승수군유물전시관. 이순신 장군의 친필로 추정되는 공북루 현판, 임진왜란 당시 의승수군들이 왜적과 싸울 때 입었던 피 묻은 옷, 흥국사 승려들이 만든 전라좌수영 관련 건축용 기와 등을 볼 수 있는 소중한 답사지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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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충무공전서>에 따르면,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592년 8∼9월에 이미 영호남 경계 지역을 지키기 위해 가까운 곳의 사찰들에 창의를 요청, 의승군들을 몇 개의 부대로 나누어 곳곳의 요해지에 배치한다. <충무공전서> 1593년 1월 25일자 '분송의승파수요해장(分送義僧把守要害狀)'을 읽어보자.

'8-9월 사이에 가까운 지역과 여러 절에서 가만히 있는 승려들에게 (영호남 경계 지역 방어 계책을) 보냈더니, 그 달 안에 400여 명이 모였습니다. 그중에서 용맹과 지략이 있는 순천승(송광사) 삼혜를 표호별도장, 흥양승(흥국사) 의능을 유격별도장으로, 광양승(옥룡사) 성휘를 우돌격장, 광주승(화엄사) 신해를 좌돌격장, 곡성승(실상사) 지원을 양병용격장으로 차등있게 정했습니다. (중략)

성휘 등을 두치, 신해를 석주관, 지원을 운봉 팔양재에 파견하여 요해지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중략) 승장 삼혜는 순천에 진을 쳐 머물게 하고, 승장 의능은 본영(전라좌수영)에 머물며 적을 지키게 하면서, 적군의 정도를 살펴 육군이 세면 육지에 가고 수군이 세면 바다에 가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충무공전서>의 내용은, 임진왜란 초기의 육지 의병들이 관군과 별도로 움직인 것과는 달리 의승수군은 관군의 일원으로서 관군(이순신)의 지시를 받으며 전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여수 흥국사의 의승수군유물전시관(義僧水軍遺物展示館)에 '水(수) 左營(좌영)' 명문(銘文)이 새겨진 기와와 충무공 이순신의 친필로 전해지는 현판이 보관되어 있는 것도 그러한 역사를 말해준다.     

흥국사 매표소 앞에 서 있는 커다란 입석에는 앞면에 불상 그림이, 뒷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흥국사로 들어갈 때에는 보기 어렵지만, 나올 때면 자연스럽게 그 글자들을 읽게 된다. '남북 평화통일 기원- 영취산 흥국사'라는 명문은 흥국사가 과연 '호국 불교의 성지(문화재청 누리집의 표현)'답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흥국사 매표소 앞에 서 있는 커다란 입석에는 앞면에 불상 그림이, 뒷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흥국사로 들어갈 때에는 보기 어렵지만, 나올 때면 자연스럽게 그 글자들을 읽게 된다. '남북 평화통일 기원- 영취산 흥국사'라는 명문은 흥국사가 과연 '호국 불교의 성지(문화재청 누리집의 표현)'답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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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사에 의승수군유물전시관이라는 건물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이 사찰이 임진왜란 당시 주진사(駐鎭寺)였기 때문이다. 주진사는 말 그대로 군대가 주둔했던 사찰이다. 그래서 전시품 중에는 '拱北樓(공북루)'라는 나무 현판도 있다. 공북루는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하여 두 손 모아 절을 하는 문루이라는 뜻으로, 성문의 이름으로 쓰이는 말이다.

게다가 159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262*98cm 크기의 공북루 현판의 글씨는 이순신의 친필로 여겨지고 있다. 전시관은 공북루 현판 아래에 '공북루는 북쪽 성문으로 흥국사 의승 수군 진주사(鎭駐寺)의 성문에 해당된다. 일주문처럼 사찰의 전통적인 문이 아니라 군사적 목적에 의해 지어진 방어 개념의 문이다. (현판의 글씨는) 이충무공의 친필로 무인의 글씨체를 엿볼 수 있다. 문의 위치는 천왕문과 영성문 아래'라는 안내문을 붙여 두었다.

요약하면, 공북루는 일주문처럼 사찰의 문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북쪽 성문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따라서 절의 출입문을 '공북루'라 불렀다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이 지역 사람들이 흥국사를 단순한 절이 아니라 군대 주둔지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승려들은 이곳에서 군영의 기와를 굽는 등 군사 관련 노동을 했고, 전투 준비를 했고, 군사 훈련을 했던 것이다.

흥국사 의승수군유물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에서 보게 되는 임란 당시 흥국사 스님들의 군사 훈련 조감도.
 흥국사 의승수군유물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에서 보게 되는 임란 당시 흥국사 스님들의 군사 훈련 조감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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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의승유물전시관은 안으로 들어선 답사자가 맨 처음 보게 되는 전시물을 통해서도 흥국사가 주진사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전시물은 흥국사 전체를 축소한 조감도인데, 대웅전 앞뜰과 적묵당 뒤뜰에서 승려들이 군사 훈련을 받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조감도 아래에는 '전라좌수영(절도사 이순신) 수군 소속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흥국사 승려들의 훈련 모습'이라는 작은 안내문이 붙어 있다.

왜적과 싸울 때 입었던 흥국사 승려들의 피 묻은 옷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당시 의승수군들이 왜적과 전투를 할 때 입었던 피 묻은 옷을 보게 된다. 다 낡은 전투복은 이리저리 찢겨 있고, 핏자국이 뚜렷하다. 이순신이 장계에서 말한 바처럼, '자기 스스로 군량을 준비하여 이곳저곳 나누어 공급하며 간신히 양식을 이어대는 그 고생스러운 정황은 관군보다 갑절이나 더했고, 일찍이 적을 토벌할 적에도 현저한 공이 많았으며, 나라를 위한 분개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았던' 의승 수군들이 적과 싸우다 죽고 다치는 모습을 저절로 떠올리게 하는 참혹한 핏빛 유품이다.

흥국사 스님들이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싸울 때 입었던 옷으로, 지금도 붉은 핏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흥국사 스님들이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싸울 때 입었던 옷으로, 지금도 붉은 핏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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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옷을 보면 떠오르는 분, '여자 안중근' 남자현(南慈賢) 지사이다. 지사는 1873년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서 태어나, 19세이던 1891년 같은 면 답곡리의 김영주(金永周)와 결혼했다.

남편 김영주는 1895년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싸우다가 1896년 청송진보 전투에서 전사한다. 남편의 의병군에 함께 참여했던 그녀는 시어머니와 유복자를 돌보며 민족계몽운동을 펼치다가 3·1운동 후 유복자 김성삼(金星三)을 데리고 만주로 건너간다.

만주에서 그녀는 재만(在滿)조선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성 계몽 운동에 앞장서던 중, 길림의 안창호 연설장에서 47명의 독립지사가 체포된 1927년에는 중국과 교섭하여 전원 석방되도록 하는 업적을 이룩한다. 이 일로 지사의 명성은 중국 사회에 널리 알려진다.

경북 영양의 남자현 의사 생가
 경북 영양의 남자현 의사 생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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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일본이 무력으로 만주 일대를 무단 점령한 만주사변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국제연맹 파견단이 중국을 방문했다. 남자현 지사는 왼손 무명지를 잘라 '朝鮮獨立願(조선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쓴 흰 천에 담아 조사단으로 보냈다. 그토록 그녀의 독립투쟁 의지는 강건하였고, 그래서 '여자 안중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윽고 1933년 3월 1일, 일제는 중국 동북 지역을 강점하여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운 1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지사는 일제의 만주국 전권대사 무등신의(武藤信義)를 '처단'하려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채 체포된다. 혹독한 고문은 뻔한 일이고, 그녀는 단식투쟁으로 항거했다. 결국 지사는 사경에 빠졌고, 출옥하였으나 8월 22일 하얼빈 조선여관에서 순국(당시 61세)했다.

그녀의 순국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지만, 장례를 준비하면서 사람들은 더욱 놀라운 감동의 충격으로 눈물을 쏟아야 했다. 그녀는 의병전쟁 중 전사한 남편의 피 묻은 옷을 내복으로 입고 있었다. 그녀는 24세 이후 61세까지 줄곧 남편의 피 묻은 군복을 속옷으로 입고 살아온 것이었다. 남편의 죽음을 잊지 않고 살겠다는 그녀의 사랑과 독립정신 앞에서 모두들 뜨겁게 통곡해야 했다.

흥국사(興國寺) - 일주문 앞 안내판의 해설


흥국사의 오래 된 현판
 흥국사의 오래 된 현판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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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취산 기슭에 자리 잡은 절로 고려 시대인 1195년(명종 25)에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시대인 1560년(명종 15)에 법수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의승군의 주둔지와 승병 훈련소로서 호남 지방 의병, 승병 항쟁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법당과 요사가 소실되었다.

1624년(인조 2)에 계특대사가 건물을 중창하였으며, 1690년 법당을 증축하고 팔상전을 새로 지었다. 1780년 선당을, 1812년 심검당을 각각 중건하였고, 1925년 칠성각과 안양암을 새로 짓고 팔상탱화를 봉안하였다.

가람의 배치는 대웅전을 주축으로 되어 있다. 경사지 위에 사천왕문을 지나 봉황루, 법왕문, 대웅전, 팔상전이 순서대로 일축선상에 배치되었고, 대웅전 전면 좌우에는 적묵당과 심검당이 있다. 경내에는 보물 396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팔상전, 불조전, 응진당 등 10여 동의 목조 건물이 있고, 대웅전 후불탱화, 흥국사 홍교, 괘불, 경전, 경서판각본 등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흥국사는 옛날부터 "나라가 흥하면 절도 흥하고, 이 절이 흥하면 나라도 흥할 것이다"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문화재청 누리집이 '임진왜란 때에 크게 활약한 의승 수군의 본거지로서 호국불교의 성지'로 소개하고 있는 흥국사는 여수시 흥국사길 160(중흥동)에 있다. 여수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외지인으로서는 주소만으로 감을 잡을 수 없겠지만, 흥국사는 여수를 여행하는 서울·인천·부산·대구 등지의 답사자들이 가장 먼저 찾기에 아주 안성맞춤인 곳에 있다.

진달래 군락지로 유명한 영취산 아래 흥국사

특히 진달래 절경으로 이름 높은 봄철 영취산을 오를 계획으로 여수를 찾은 답사자라면, 영취산에서 상춘곡(賞春曲) 한 수를 읊은 뒤 흥국사를 둘러보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과연 이 절은 일주문을 지나 흥국사 중수사적비 앞에 이르면 좌우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내놓으면서, 왼쪽으로 가면 영취산 등산로이고, 중수사적비에서 오른쪽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면 흥국사 천왕문이 눈앞이라고 말한다. 1703년(숙종 29)에 건립된 중수사적비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312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흥국사 대웅전의 삼존불과 후불탱
 흥국사 대웅전의 삼존불과 후불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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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문을 지나면 봉황루와 법왕문이 잇달아 나타난다. 보물 396호인 대웅전은 그 다음에 얼굴을 보여준다. 문화재청 누리집은 '여수 흥국사 대웅전'을 소개하면서 '흥국사는 (중략) 임진왜란 때 이 절의 승려들이 이순신 장군을 도와 왜적을 무찌르는 데 공을 세웠으나 절이 모두 타 버려 지금 있는 건물들은 1624년(인조 2)에 다시 세운 것들'이라고 해설한다. 대웅전 역시 임진왜란 이전의 건물은 지금 볼 수 없고, 1624년에 중창된 것이다.

석가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흥국사의 중심 법당이다.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옆면에서 볼 때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과,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을 보여준다.

대웅전 안의 천장은 정(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꾸몄는데, 불상이 앉아 있는 자리를 더욱 엄숙하게 만들기 위해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놓았다. 문화재청은 흥국사 대웅전을 '같은 양식을 가진 건물들 중 그 짜임이 화려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대웅전, 후불탱, 노사나불괘불탱 등 많은 보물 거느린 흥국사

불상 뒷면에는 보물 578호 '흥국사 대웅전 후불탱(興國寺大雄殿後佛幀)'이 있다. 탱화는 천, 종이에 그린 그림을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만들어 거는 불교 그림을 말한다. 대웅전 후불탱은 가로 4.27m, 세로 5.07m의 큰 그림으로, 석가가 영취산(그래서 흥국사가 있는 산에도 영취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에서 설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탱화이다. 그림은 1693년(숙종 19)에 왕의 만수무강과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천신(天信)과 의천(義天) 두 승려화가가 그렸다.

흥국사 노사나불괘불탱(보물 1331호)의 모습. 노사나불괘불탱은 절 법당 앞뜰에서 괘불대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만든 걸개그림 형태의 대형 탱화이다. 사진은 일주문 앞 흥국사 안내판의 것을 재촬영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 모습과는 가로세로 비율, 색상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흥국사 노사나불괘불탱(보물 1331호)의 모습. 노사나불괘불탱은 절 법당 앞뜰에서 괘불대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만든 걸개그림 형태의 대형 탱화이다. 사진은 일주문 앞 흥국사 안내판의 것을 재촬영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 모습과는 가로세로 비율, 색상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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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탱은 화면 가운데에 석가여래, 그 좌우 양옆으로 여섯 명의 보살들이 배치되어 있고, 다시 그 옆으로 사천왕을 거느리고 있다. 석가여래상 바로 옆과 뒤편으로는 10대 제자 등 따르는 무리들이 조화롭게 배열되어 있다. 탱화의 채색은 비단 바탕 위에 대체로 붉은색과 녹색으로 이루어졌다.

문화재청은 '머리광배의 녹색은 지나치게 광택이 있어 은은하고 밝은 맛이 줄어든다'면서 '그러나 꽃무늬나 옷주름선 등에 금색을 사용하고 있어서 한결 고상하고 품위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라고 해설한다. 흥국사 스스로는 이 탱화를 '원만한 형태와 고상한 색채의 조화에 힘입어 17세기 후반기의 걸작으로 높이 평가된다'라고 자평하고 있다.

후불탱 외에도 흥국사에는 관음보살 벽화(보물 1862호), 노사나불 괘불탱(보물 1331호), 수월관음도(보물 1332호) 등 보물급 불교 그림이 많다. 절 입구에 있는 홍교(보물 563호)도 보물이다. 물론 대웅전 자체도 보물이다. 이렇게 흥국사가 거느린 보물을 열거하는 것은, 그만큼 뛰어난 문화재가 많으니 유심히 살펴보며 답사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꼭 보아야 할 의승수군유물전시관

하지만 호국불교의 성지 흥국사에는 이들 보물들 외에도 꼭 보아야 할 문화유산이 있으니 절대 놓치지 않아야 한다. 다른 곳에는 없는 의병수군유물전시관이 바로 그곳이다. 이순신 휘하 의승수군들의 군사훈련 조감도, 이순신의 친필 글씨로 추정되는 '공북루' 현판, 의승수군들의 피 묻은 옷과 무기들...... 흥국사에 와서 이들을 아니 보고 어찌 돌아설 수 있겠는가.  

흥국사 일원을 모두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일주문 뒤 부도밭을 찾아 의승수군들의 순국과 고초를 생각하며 경건하게 고개를 숙인다. 흥국사 부도군에는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불교계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들의 부도 12기가 모여 있다. 고려를 대표하는 승려로서 흥국사를 창건한 보조국사, 절을 다시 세운 법수대사, 계특대사, 통일대사와 조선 시대 최고 승직인 도총섭이었던 응운과 응암 등의 이름에서 보듯이 이 지역 역사와 한국 불교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으로 꼽힌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나타나는 흥국사 부도밭. 이곳에는 고려를 대표하는 승려이자 흥국사를 창건한 보조국사, 조선 시대 최고 승직 도총섭을 역임한 응운과 응암 등 모두 12 분의 승려를 기리는 부도가 모셔져 있다. 이 부도밭은 흥국사가 전남 지역의 역사와 불교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나타나는 흥국사 부도밭. 이곳에는 고려를 대표하는 승려이자 흥국사를 창건한 보조국사, 조선 시대 최고 승직 도총섭을 역임한 응운과 응암 등 모두 12 분의 승려를 기리는 부도가 모셔져 있다. 이 부도밭은 흥국사가 전남 지역의 역사와 불교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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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도 흥국사 답사는 끝나지 않았다. 일주문을 들어설 때에는 미처 눈에 담기 어렵지만, '내려올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이라는 고은의 촌철살인처럼, 나오는 길에는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 매표소 앞에 커다란 바위가 있고, 들어올 때는 그 앞면에 새겨진 불상 무늬만 보았는데, 나가면서 보니 '남북 평화통일 기원- 영취산 흥국사'가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남북 평화통일 기원- 영취산 흥국사! 진정 호국불교의 성지다운 조형물이자, 민족사의 시대적 과제를 간결하게 드러낸 선언이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온몸을 붉은 피로 적셨던 흥국사, 이제는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사의 결정적 시기를 앞당기는 사찰이 되어 우뚝 서리라. '나라가 흥하면 흥국사가 흥하고(國興則寺興국흥즉사흥) 흥국사가 흥하면 나라가 흥한다(寺興則國興사흥즉국흥)'라고 했으니. 우선 흥국사부터 크고 높게, 그리고 끝없이 번창할지어다.

흥국사 답사 순서
홍교- 주차장과 일주문 사이의 표지석 뒷면("남북 평화통일 기원- 영취산 흥국사" 명문) 및 각종 안내 표지판(보물 1331호 노사나불괘불탱 사진)- 일주문- 부도밭- 중수비- 천왕문- 봉황루- 법왕문- 대웅전(2016년 11월 현재 전면 보수 중으로 관람 불가, 임시 대웅전을 의승수군유물기념관 옆에 운영 중)- 팔상전- 임시 대웅전- 의승수군유물기념관(군사훈련 조감도, 의승수군들의 무기와 피 묻은 옷, 이순신 장군 친필 추정 공북루 현판 등)



태그:#흥국사, #의승수군, #이순신, #송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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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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