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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퐁피두도서관이 불을 끄는 시간은 밤 10시. 이 원칙은 일주일에 단 하루, 화요일을 제외하고는 휴일과 국경일에도 지켜진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격언이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한국의 현실이다. 그러나, 인류가 역사와 경험을 통해 축적해온 지식과 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책 이외의 어떤 것들에서 세상을 배울 수 있을까? 책이 인간이 만든 최고의 '보물'이라면, 도서관은 '보물창고'다. 기자는 프랑스 파리와 서울시 관악구의 선진적인 도서관문화를 소개함으로써 향후 한국의 도서관이 그려나갈 청사진에 작은 도움이나마 주고자 한다. - 기자 말

퐁피두도서관 등을 갖춘 퐁피두센터 전경.
 퐁피두도서관 등을 갖춘 퐁피두센터 전경.
ⓒ 이준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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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먼저 에피소드부터 하나.

10대 청소년들이 끝도 보이지 않게 줄을 지어 입장을 기다리는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1층 안내데스크에서 "퐁피두도서관 담당자와 5분쯤 인터뷰가 가능한가?"라고 물었다.

잠시 후 세련된 옷차림의 중년여성이 계단을 통해 2층에서 내려왔다. 언론담당관 크리스틴 카리에였다. 예고 없는 방문이었음에도 크리스틴은 친절했다. 약속했던 5분의 인터뷰는 15분으로 길어졌다.

재밌는 사건(?)은 인터뷰가 끝난 후 일어났다. 통역자를 통해 크리스틴의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

"한국엔 국립도서관이 몇 개나 되느냐?"
"한국 도서관의 관리주체가 어떻게 되는지 알려다오."
"서울과 지방 도서관의 차이는 어떤 것인가?"

누가 기자이고, 누가 언론담당관인지 헛갈리기 시작했다. 3개의 매체를 거치며 10년 넘게 기자를 해왔지만, 이처럼 '호기심 많은' 취재원은 처음이다. 기자가 아는 한도 내에서 질문에 답해주며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이게 프랑스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에 임하는 모습이고, 많은 책을 읽으며 살아온 자의 지적 호기심이구나.'

크리스틴이 자긍심을 가지고 일하는 퐁피두도서관은 1977년 개관한 '국립 조르주 퐁피두 예술문화센터'(centre national d'art et de culture Georges Pompidou)와 함께 생겨났다.

얼핏 보면 공장 같은 외형의 퐁피두센터 내부에는 ‘지식의 보고’라 할 도서관과 영화관, 갤러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얼핏 보면 공장 같은 외형의 퐁피두센터 내부에는 ‘지식의 보고’라 할 도서관과 영화관, 갤러리 등이 자리하고 있다.
ⓒ 이준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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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퐁피두센터의 야경.
 매력적인 퐁피두센터의 야경.
ⓒ 이준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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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형적 디자인부터 내부의 콘텐츠까지 차별화

철골과 배관을 숨기지 않고 외부로 노출한 대담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퐁피두센터는 그 독특한 미적 완성도로도 이름이 높아 에펠탑, 루브르박물관 등과 함께 파리를 찾는 관광객들이라면 한 번은 들러보고 싶어 하는 곳.

'책, 음악, 미술을 포함한 모든 예술이 더불어 숨 쉬는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하는 퐁피두도서관은 바로 이 퐁피두센터 2~3층에 자리했다. 크리스틴의 설명에 따르자면 '도서관을 향한 프랑스인의 현대적 요구에 가장 효과적으로 답하는 공간'이 바로 퐁피두도서관이다.

소장도서를 40만 권 내외로 한정시켜, 출간시점이 오래된 책은 외부로 내보내고 항상 새로운 소설과 시집, 미술과 음악 관련 신간들을 채워 넣는 퐁피두도서관의 시스템은 젊은층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10대와 20대 방문자가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프랑스의 어떤 도서관보다 늦게 문을 닫는 것도 장점이다. 수업을 마친 후 이용하는 학생이나, 퇴근 후 책을 읽으려는 직장인을 위해서다. 퐁피두도서관이 불을 끄는 시간은 밤 10시. 이 원칙은 일주일에 단 하루, 화요일을 제외하고는 휴일과 국경일에도 지켜진다.

비유를 해보자. 프랑스국립도서관(프랑수아 미테랑 도서관)이 3천500만 권에 이르는 희귀한 고서적과 고문서를 소유한 점잖은 교수라면, 퐁피두도서관은 지식에 대한 열망으로 몸을 뒤채는 쾌활한 학생이라 할 수 있다.

퐁피두센터는 젊은이들의 '지적 열망'에 효과적으로 답하는 공간 배치로도 이름이 높다. 1층에는 카페테라스, 영화관, 서점이 위치해 있고 2~3층은 열람실과 학습실, 비디오 및 음향 자료실과 프레스 미디어실로 꾸몄다. 여기에 4층과 5층엔 갤러리와 그래픽아트·조각 전시실이 자리했다.

퐁피두도서관 언론담당관 크리스틴 카리에.
 퐁피두도서관 언론담당관 크리스틴 카리에.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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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랑하기에 도서관에서 일하는 게 자랑스러운 직원

퐁피두센터 한 곳에서 책은 물론 영화와 음악, 미술까지 예술의 거의 전 장르와 즐겁게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이용하는 게 무료라는 것도 주머니 가벼운 소년·소녀들에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크리스틴이 가지고 있는 퐁피두도서관에 대한 자부심이 그냥 생겨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사실 인구대비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은 북유럽이 더 많아요. 하지만, 북유럽은 춥고 흐린 날씨 탓에 도서관이 '따뜻한 동네 카페'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어요. 사교공간으로서의 비중이 더 큰 거죠. 아마 순수하게 책을 읽으러 도서관에 오는 이들은 프랑스 사람들이 더 많을 걸요."

환하게 웃어 보인 크리스틴이 말을 이어갔다.

"프랑스는 국가가 운영하는 도서관만이 아닌, 대학 도서관과 지역의 민간도서관도 인프라가 좋은 편이죠. 거기서 체계적인 도서관 시스템 구축과 운영에 관한 도움을 요청하면, 파리에서 전문가가 파견되기도 한답니다."

내친 김에 도서관과 책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이 여성에게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다행히 기자도 들어본 이름이 나왔다. 소르본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프랑스 소설가 실비 제르맹(Sylvie Germain). 한국 출판사 문학동네가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라는 작품을 번역·출간한 작가이기도 하다.

당연지사 "왜 그의 소설을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노래하듯 들려준 크리스틴의 답변이 잘 쓰인 한 편의 프랑스 시 같았다.

"외로움에 대한 해석이 독특해요. 어쩔 수 없는 생의 비극적 정서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게 좋았죠. 게다가 슬픔에 접근할 때도 문장은 한없이 아름다워요. 그러니,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퐁피두센터 앞 광장에서 파리의 오후를 즐기는 청년들.
 퐁피두센터 앞 광장에서 파리의 오후를 즐기는 청년들.
ⓒ 이준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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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와 인터뷰를 마치고 퐁피두센터 앞 광장으로 나왔다.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를 이야기하거나 광장 곳곳에서 펼쳐지는 소규모 공연을 지켜보느라 젊은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거기서 만난 프랑스 소녀 소피(18)와 소년 루카스(17)는 "퐁피두센터 안에선 책도 읽고 영화와 전시회도 보고 친구랑 아이스크림도 먹어요. 이렇게 광장으로 나와선 형과 누나들의 악기 연주와 마임(Mime)을 보기도 하죠. 아저씨도 파리를 즐겨보세요"라는 말로 기자를 즐겁게 했다.

앞으로 20~30년 후쯤에는 소피와 루카스의 아들·딸도 퐁피두센터와 그 앞 광장에서 책, 음악, 미술, 공연과 함께 청춘의 한 시절을 보낼 것이다. 바로 그런 청춘시절의 경험이 그들을 예술을 알고 제대로 향유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시키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것을 일부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태그:#퐁피두도서관, #프랑스, #퐁피두센터, #국립도서관,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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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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