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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한 장면.
 14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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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대결 속에서 생활, 갈등 속에서 전사적 자세 지니도록(해야 한다). 시장과 경제의 가치중립적 타협, 화합은 없다. 회색 지대는 없다. 이념 대결의 장으로 (이해해야 한다). 정권·대통령에 도전에 두려움을 갖도록 (만들어야 한다). 강철 같은 의지로 대통령 대한민국 보위(해야 한다)."

유신 시대 글인지, 1980년대에 적힌 글인지 헷갈린다. 분명 시대착오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20세기의 유물과 같아 보인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고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일지 첫 페이지 내, '장'이라고 쓰인 표시 아래 적힌 메모라고 한다. 2014년 청와대 수석회의에서 오간 말을 적은 글이다. 이를 두고 이병완 전 참여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렇게 논평했다.

"이런 엄명이 비서실장 또는 대통령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면 이 자체가 탄핵입니다. 편 가름하는 그런 조직의 최고 선봉에 있었다? 이건 헌법 자체의 헌법 정신 무시고 위반이죠."

지난달 '최순실 국정농단' 국회 2차 청문회에 출석한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이 모든 게 자신의 지시 사항은 아니며 김 전 수석의 의견이 포함된 것일 거라 증언했다. 하지만 이러한 공안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시각과 의견이 청와대에서 물러난 뒤 '화병'을 얻어 급성 간암으로 사망한 고 김영한 수석의 것이 아니라는 점은 유족의 증언과 언론 보도를 통해 잘 알려진 터다. '민변' 김희수 변호사는 이 일명 '김영한 비망록'에 나온 지시사항과 김기춘 전 실장에 대해 이렇게 일갈했다.

14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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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권분립 체계, 권력 분립이라고 하는 건 우리 헌법에서 가장 기본 골격으로 삼는 권력 구조입니다. 그걸 무시하는 거거든요. 박 대통령하고 서로 공모해서 상의 하에 그런 일을 했는지 김기춘의 독자적이고 독단적인 정세 판단이나 그런 걸로 했는지 그거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그건 범죄행위라는 겁니다. 김영한 그 분의 그 비망록은 한 마디로 범죄 목록 리스트라고요. 특검이 수사 의지만 있으면 김기춘 구속하는 건 거기 범죄 목록 리스트만 보면 다 나온다라고 이야기해요."

지난주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이 나라 엘리트들의 맨얼굴과 권력 지도를 탈탈 털어 냈던 SBS <그것이 알고 싶다>(아래 <그알>). 어제(14일) 방송된 '비선의 그림자 김기춘 – 조작과 진실'편에선 김기춘 전 실장을 정조준 했다.

<그알>은 블랙리스트를 비롯해 김영한 비명록에 등장하는 '장 김기춘'의 전횡이 왜 문제인지는 물론 그 '악의 축'이라 여겨지는 김기춘 전 실장의 악행의 연원을 차근차근 풀어냈다. 그래서 이날 방송은 지상파 프로그램이 처음으로 조명한 '조작왕 김기춘, 그 악의 일대기'라 정리할 만했다. 

유신으로부터 출발한 김기춘의 '악의 일대기'  

14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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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8월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된 김기춘 전 비서실장에게 정치부 기자들은 '왕실장', '부통령', '막후실세' 등등 수많은 수식어들을 붙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널리 쓰이던 수식어가 바로 '기춘대원군'이었다고 합니다. 단 한 번도 왕의 자리에 오른 적 없지만 최고의 권력을 휘두른 조선의 실세 흥선대원군을 빗대 붙여진 별명입니다. 그 만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실세라고 평가받았고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최순실씨가 숨겨진 비선실세였다면 김기춘씨는 청와대의 공식실세였던 셈입니다."

진행자 김상중의 설명이다. 그래서 성공회대 교양학부 한홍구 교수는 '김기춘 비서실장'의 청와대 입성을 보며 "민주주의의 용산참사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예상은 2016년 가을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아니 더 큰 국정농단 사태로 번지기에 이르렀다. 

<그알> 먼저 시계를 1975년으로 되돌린다. 김 전 실장이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재임하던 당시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조작의 책임자로서 활동했던, 그에 앞서 고 육영수 여사 암살범으로 지목된 청와대 경호원 문세광의 자백을 조작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던 그 박정희의 1970년대로 말이다. 이후 김기춘 전 실장은 박정희가 총애하는 검사로 승승장구 했고, 40여년 전부터 '박근혜 영애'를 '주군'으로 부르고 모셨던 그의 충성이 21세기의 '김기춘 비서실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 '기춘대원군' 김기춘 전 실장의 '공식실세'로서의 위엄과 '조작왕', '프레임 전환의 달인'으로서의 면모를 알려주는 단초가 바로 '김영한 비망록'이다. <그알>은 이 비망록 내용을 따라 잡으며, 2014년 8월 46일 동안 단식투쟁을 했던 '유민아빠' 김영오씨를 '종북좌파'로 몰고, 비정한 아버지로 둔갑시킨 것도, 2014년 광주비엔날레에 홍성담 화백의 '세월오월' 전시를 막았던 것도 모두 김기춘 전 실장의 지시로부터 비롯됐다는 점을 다각도로 재정리했다.

'조작왕', '프레인 전환의 달인' 김기춘

14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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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일대기'란 표현에 걸맞게, <그알>은 시계를 되돌려 김기춘 전 실장의 활약(?)이 과거 전력과 무척이나 유사하다는 점을 두고두고 강조한다. '김기춘 주연'의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이 주요 모티브가 된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은 물론 1991년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이듬해 일어난 '초원 복국집 사건'까지 조목조목 짚어낸 것이다.

그 사이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세 번의 국회의원을 지내며 승승장구한 김기춘 전 실장의 주요무기는 자신의 전공인 '법기술'을 이용한 '조작'과 '프레임 전환'이었다.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은 젊고 순수했던 재일동포 유학생들에게 중앙정보부의 폭력과 고문을 들이대 '자백'을 받아낸 기만적인 쇼에 다름없었다.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역시 노태우 정권에 항거하는 학생들의 분신정국을 '도덕성' 프레임으로 전환시켜 버린 일대 사기극이었다. 더욱이 법무부장관이던 본인이 사건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남이가"라며 기관장들에게 부정선거를 지시했던 '초원 복국집 사건'은 김기춘식 프레임 전환이 대성공을 이룬 사례라 할 수 있다.

법무부장관과 기관장들이 모여 "부산" 운운하며 김영삼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범죄 모의 내용'은 휘발되고, '불법 도청'에만 온 나라가 관심을 쏟는 일대 프레임 전환이 제대로 먹혔기 때문이다. 김 전 실장 역시 옷을 벗기는커녕 이 프레임 전환 이후 부산과 영남 민심이 결집하며 결국 '김영상 대통령'을 만드는데 일조하게 됐다. 심지어 그는 헌법소원까지 제기해 관련 공직선거법을 스스로 바꾸는데 성공, 자신의 권력을 이어갔다.

이에 관해 김희수 변호사는 "강도 잡으라고 고함쳤는데 강도는 안 잡고 강도 잡으라고 고함 친 사람 처벌받는 이상한 행태"라고 비유했다. 하지만, 김 전 실장의 생각은 달랐다. 2005년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한 김 전 실장은 이 사건의 전후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그 사건 이후에 우리나라 두 개의 큰 법이 제정되거나 바뀌었잖습니까. 이거를 나는 좀 알리고 싶어요. 하나는 도청을 처벌하는 통신비밀보호법, 그 법은 그때 없었습니다. 그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어떤 게 있느냐면 누구나 선거 운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소위 포지티브 선거 운동이 됐어요.

나는 그것을 잘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거는 내가 늘 반성하고 내 생에서 가장 부끄러운 추억 중의 하나입니다. 지우고 싶은 그 중의 하나예요. 나는 깨끗한 비단 옷을 입고 달밤에 길을 가는 그런 아낙네였는데 그냥 구정물을 한 바가지 옷에 덮어쓴 것 같은 기분을 느껴요."

"김기춘씨, 거짓이나 변명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역사의 법정입니다"

14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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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전 실장의 과거를 지상파인 <그알>에서 재조명하는 일은 분명 유의미하다.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 작금의 '태블릿 PC 조작설'이 '불법 도청'으로 인해 '범죄 모의' 사실 자체까지 덮어졌던 '초원 복국집 사건'과 그 진행 과정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날 <그알>은 박근혜 대통령까지 주장하고 나선 이 '태블릿 PC 조작설'이 김기춘 전 실장의 '작품'(?)이라고 유추할 수밖에 없는 합리적 의심을 제기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또 하나, <자백>에서 그려졌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들의 아픈 목소리를 우리는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유서 대필 사건의 피해자이자 22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강기훈씨 사건도 마찬가지다. 김기춘 전 실장을 비롯해 유신 시대와 군사정권에서 지금까지 승승장구하고 권력을 누린 이들이 누구의 피와 고통을 먹고 그 권력을 누렸는지 말이다.

이날 <그알>과 같은 재정리야 말로 그들의 원통함과 억울함을 확인하는 계기이자 '역사 바로 알기'의 노력이 될 수 있을 터다. 그래서, 김기춘 전 실장이 청문회 출석 당시 했던 증언들이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김형희 한국바디랭귀지 연구소장과 함께 지목해낸 후 <그알>은 카메라를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들에게 돌렸다.   

피해자인 김원중씨는 "후회하지 않는다"며 "지금 생각해도 한국유학은 잘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석한 또 다른 피해자 강중건씨는 "그가 저질렀던 그 일들이 유신시대부터해서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있어서도 명백히 무슨 일을 했는가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각기 수십 년이 지나서야 재심을 통해 한국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이들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자신이 무슨 악행을 해 왔는지, 김기춘 전 실장이 깨달을 날이 과연 오기는 올까. 

"24살부터 37살까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감옥에 있었다던 또 다른 피해자 강종헌씨는 옥중에서 '그날이 온다'라는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옥중에서 "민주회복의 그날이 온다", "조국통일의 그 날이 온다"는 노래를 불렀다는 강종헌씨를 김기춘 전 실장은 꼭 한 번 대면하기를 바란다. "역사의 법정"을 말하는 강종헌씨의 미소를 김 전 실장은 꼭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정한 사건으로 그 사람이 단죄 받는 것이 아니라 요즘 말로 하면 적폐, 쌓인 폐해 중에 중심부에 있던 사람으로서 종합적으로 총체적으로 단죄 받는 것이 옳습니다. 역사의 법정에서 그 사람이 모릅니다, 기억이 없습니다, 라는 말은 나는 통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지금 그분이 서 있는 곳은 역사의 법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훨씬 엄중합니다. 거짓이나 변명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역사의 법정입니다."

그리고, SBS <8시 뉴스>는 <그알>이 방송되기 앞서 김기춘 전 실장이 최순실씨를 알고 있었다는 명백한 정황을 입증하는 김종 전 문체부 차관의 진술을 보도했다. 지난해 11월, 김 전 차관이 검찰에 "자신이 차관에 취임한 직후부터 김기춘 전 실장이 최순실씨에게 잘해주라고 말했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청문회에 출석해 최순실씨를 "정말 모른다"고 수차례 증언했던 김기춘 전 실장. 마지막으로, 자신의 과거 발언을 되돌아보십사 하는 심정으로 2005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되돌려 드리는 바다.

"저는 정말 내가 그런 것이 권력을 남용해서 인권을 유린하고 고문하고 이랬으면 오늘날 김기춘이가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어요. 그 점을 제가 자부합니다. 그 점이 다른 사람보다 어떻게 보면 훌륭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14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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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기춘, #그것이알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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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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