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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 전망대(일명 녹진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울돌목 일원의 풍경. 과연 피비린내나는 전쟁터였던가 의심스러울 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준다. 진도대교 오른쪽 건너편이 해남 우수영 국민관광지(명량대첩 해전사 기념전시관)이고, 왼쪽 너머가 전라우수영이 있었던 우수영 포구이다.
 진도 전망대(일명 녹진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울돌목 일원의 풍경. 과연 피비린내나는 전쟁터였던가 의심스러울 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준다. 진도대교 오른쪽 건너편이 해남 우수영 국민관광지(명량대첩 해전사 기념전시관)이고, 왼쪽 너머가 전라우수영이 있었던 우수영 포구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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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9월 16일, 이순신의 13척 배가 왜적 133척 대군을 명량해전에서 완벽하게 격파하는 '기적'을 이룬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순신 스스로가 그날 일기에 '(명량에서 이긴) 이번 일은 정말 천행(天幸)이었다'라고 썼으니, 그야말로 명량대첩은 기적이었다.

적선을 133척이나 바다 밑으로 가라앉혔지만 우리 전함은 단 한 척도 부서지지 않았다. 게다가 적군 수천 명이 죽은 이 전투에서 아군은 희생자가 거의 없었다. 이순신이 탄 대장선에서는 순천 감목관 김탁과 종 계생이 탄환에 맞아 전사한 것이 전부였다. 부상자도 박영남, 봉학, 그리고 강진현감 이극신 그렇게 세 명에 지나지 않았다.

133척 왜선을 부수었지만 아군 전함은 한 척도 안 다쳤다

다른 12척의 배에서는 몇 명이 전몰하고 몇 명이 다쳤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대장선보다 많았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이날 전투 때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맨 앞에 서서 치열하게 싸운 배가 바로 이순신의 대장선이었기 때문이다. 그 날 <난중일기>에 적혀 있는 전투 경과를 읽어 본다.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들을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워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피할 궁리만 했다. (중략) 나는 급히 노를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 현자 등 여러 종류의 총통을 마구 쏘았다. (중략)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보니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배를 돌리고 가서 (앞으로 나오라는) 명령을 내리고 싶었지만 적들이 그 틈을 타고 진격해 올 듯하여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었다.'  

적선의 규모에 겁을 먹은 다른 장수들이 빼고 있던 전투 시작 무렵, 이순신 혼자 앞으로 돌격했다. 한창 대포를 쏘며 싸우고 있을 때에도 다른 장수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순신이 탄 배보다 더 열성껏 전투에 임한 장수는 없었다. 즉, 다른 배에 탄 장졸들이 대장선에서보다 더 많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만약 같은 수의 피해자가 생겨났다 하더라도 합해서 모두 26명(2명*13척) 전사, 39명(3명*13척) 부상에 그칠 것이다. 133척 침몰, 수천 명 사망을 기록한 적과는 견줄 수도 없는 결과이다.

선봉에서 혼자 싸우는 수군통제사, 다른 장수들은 겁먹고 뒤로 물러나

명량에서 비록 참패했지만 적들은 아군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게 되었다. 복수의 칼날을 매섭게 갈았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이순신도 울돌목의 물살을 잘 활용하여 천행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13척에 불과한 전함으로 또 다시 대규모 적을 무찌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명량대첩이 끝나자마자 곧장 당사도(신안군 암태면)로 가서 밤을 샜고, 다음날인 17일에 어외도(신안군 어의도)로 갔고, 19일에는 홍농(영광군 홍농읍)에 정박했다. 아니나 다를까, 적들은 그 사이에 이미 법성포(영광군 법성면)로 쳐들어와 민가와 창고에 불을 지르는 등 보복 행위를 저질렀다. 이순신 일행은 더 북쪽으로 올라가 20일에 위도(부안군 위도면), 21일에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갔다. 23일, 혈전이 끝나고 일 주일이나 지난 그제야 명량해전 승리 소식을 담은 보고서를 완성했다.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이 적들의 대공세를 피해 잠시 이동했던 고군산도 일원의 풍경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이 적들의 대공세를 피해 잠시 이동했던 고군산도 일원의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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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대장이지만, 이순신이라고 해서 가족 걱정을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명량대첩 이후 보름이 경과한 10월 1일자 일기이다. 이순신은 장남 회를 아산 집으로 보낸다. 제 어머니(이순신의 아내)도 보고, 일가친척들의 생사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이순신은 너무나 마음이 불안하여 편지조차 쓸 수가 없었다.

이순신의 전함들은 조금씩 남하하여 9일에는 우수영(해남)에 이른다. 그러나 성 안팎에 인가는 하나도 없고, 오가는 사람도 끊겨 한눈에 보기에도 비참했다. 저물 무렵, 해남 일원에 아직도 적들이 많이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1일, 연기가 해남 하늘을 뒤덮었다. 적들이 달아나면서 곳곳에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13일, 이순신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달빛은 비단결처럼 곱고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평온한 날씨였지만 홀로 뱃전에 앉아 있으니 어쩐지 마음이 불안했다. 잠자리로 돌아온 이후에도 밤이 지새도록 뒤척이기만 했다. 그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면서 아침을 맞았다.

아들을 안고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는 꿈을 꾸는 이순신

이윽고 14일, 사경(새벽 2시 전후)에 꿈을 꾸었다. 언덕 위의 길을 가던 중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로 굴러 떨어지는 꿈이었다. 다치지는 않았으나 꿈속에서 막내아들 면을 끌어안은 모습이었던 것 같아 잠이 깨고 나자 온갖 걱정이 일어났다.

저녁에 천안에서 누가 왔다. 그가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살이 떨리고 뼈까지 떨렸다. 마음이 조급하고 머리도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여니 차남 열의 글씨가 나타났다.

"慟哭(통곡)"   

내용을 읽어보지 않아도 면이 죽었다는 소식임에 틀림이 없다. 이순신은 자신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지는 듯하여 목을 놓아 통곡한다.

"하늘은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단 말인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아 있으니 세상에 이런 잘못된 이치가 어디에 있단 말이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까지도 검게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너는 어디로 갔느냐. 네가 영특하여 하늘이 일찍 데려간 것이냐.

아아, 내가 지은 죄가 많아 그 화가 너에게 미친 것이냐. 내가 비록 살아 있으나 누구를 의지하고 지낸단 말이냐. 너를 따라 나도 죽어 저 세상에서 같이 지내고 함께 울고 싶지만, 네 어미, 네 형, 네 누이가 남아 있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할 도리뿐이구나.

내 마음은 이미 죽었다. 몸만 남아 울부짖고 있을 따름이다. 하룻밤은 지내는 것이 한 해를 흘려보내는 것만 같구나."

19일에도 이순신은 저물 무렵 코피를 한 되나 흘렸다. 밤에는 혼자 앉아 죽은 막내아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순신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미 죽은 영혼이 되었으니 이렇듯 막심한 불효를 저지른 줄을 아이가 어찌 알겠는가.' 이순신은 비통한 마음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충무공 옛집' 오른쪽 뒤에 있는 이면 묘소

충무공 옛집 앞을 지나 오른쪽으로 몇 발만 가면 이순신이 활쏘기 연습을 하던 곳이 나타난다. 안내판에는 '이 활터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활을 쏘시던 장소로, 남쪽에 있는 과녁과의 거리는 145m입니다. 그리고 활터를 둘러싼 방화산의 능선은 말을 달리던 곳으로 일명 치마장이라 부릅니다. 은행나무는 수령이 500여 년에 이르며 충청남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면 묘소 이순신의 3남 이면은 고향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명량대첩 이후 왜적들이 보복을 위해 육지를 휩쓸며 살육과 방화를 일삼을 때 마을에 쳐들어온 적들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면의 묘소는 현충사 '충무공 옛집" 오른쪽 뒤편에 있다.
▲ 이면 묘소 이순신의 3남 이면은 고향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명량대첩 이후 왜적들이 보복을 위해 육지를 휩쓸며 살육과 방화를 일삼을 때 마을에 쳐들어온 적들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면의 묘소는 현충사 '충무공 옛집" 오른쪽 뒤편에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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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를 뒤로 하고 충무공의 셋째아들 이면 공이 잠들어 있는 묘소로 향한다. 그는 우리 나이로 21세에 세상을 떠났다. 명량해전에서 참패를 한 왜적들은 육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보복 살인과 방화를 저질렀으니, 충무공 일가가 사는 아산 일대가 주요 표적지가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왜적들이 마을 안으로 들어와 분탕질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면이 당장 칼을 추켜들고 달려간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겨우 21살에 죽는 셋째아들 이면, 충무공은 피를 토하고

묘비에는 '충무공 셋째아들 이면의 무덤'이 새겨져 있다. 겨우 스물하나에 지나지 않았으니 벼슬도 없고, 아내와 자식도 없다. 그래서 묘비에 새겨진 글자들도 간략하다. '막심한 불효'를 저지른 이면, 아직 출세 이전이라 세상을 하직할 때에도 조용히 떠나갔지만, 425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조용히 이곳에서 영면하고 있다.

묘소 앞 안내판을 읽는다.

'이곳은 충무공의 셋째아들인 이면 공을 모신 묘소이다. 면은 1577년 아산에서 출생하고 어려서부터 인물이 누구보다 뛰어나고 지혜와 용맹을 갖추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므로 충무공이 그지없이 사랑하던 아들이었다. 면은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집에 있다가 마을 안에서 분탕질하고 있는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니 그때 나이 21세였다. 충무공은 아들의 슬픈 소식을 듣던 그날의 일기에 이같이 적으셨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옳은 이친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남달리 영특하므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는 것이냐?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이면이 살아생전 가보지 못한 곳으로 이제 가려 한다. 충무공의 묘소이다. 아버지의 묘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과연 이면은'막심한 불효'를 저지른 것이 분명하다. 내가 이면을 대신하여 충무공에게 술 한 잔을 올리리라.

 충무공 묘소, 오른쪽의 비각은 정조가 직접 비문을 쓴 신도비를 모시고 있다.
 충무공 묘소, 오른쪽의 비각은 정조가 직접 비문을 쓴 신도비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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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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