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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체를 폭로한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3일 오후 서울 강남구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수사를 하고 있는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에서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들어서며 취재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유진룡 "블랙리스트는 정권반대자 차별과 배제 위한 것"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체를 폭로한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3일 오후 서울 강남구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수사를 하고 있는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에서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들어서며 취재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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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년 영국에서 크롬웰의 공포통치가 무너졌다. 왕정복고로 왕위에 오른 찰스 2세는 58명의 판사들과 법원 공직자들의 명단을 만들었다. 이 명단에는 찰스 2세의 아버지, 찰스 1세를 처형한 자들이 올라있었다.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의회와 대립하다 1649년 목이 잘렸다. 11년 후 아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재판에 가담한 13명을 사형에 처했고 25명을 평생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간신히 탈출한 20명만이 목숨을 지켰다. 이 명단은 '죽음'을 뜻하는 색, 블랙과 합쳐져 '블랙리스트'라고 불렸다. 이후 블랙리스트는 권력이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자신들이 필요한 영역에서 추방하려는 자들의 이름을 담은 명단을 뜻하게 되었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화체육부 장관이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든 혐의로 구속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과 정무수석 시절, 두 사람이 공모하여 박근혜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계 인사들의 명단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정부의 지원을 배제시켰다는 것이다. 그 규모도 방대하여 거의 1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을 두고 특검은 "고위 공무원들의 문화계 지원 배제 시행 행위가 국민의 사상 및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제 특검의 칼끝은 이 리스트의 시발점으로 대통령을 가리키고 있다. 탄핵재판에서도 블랙리스트의 대통령 지시 여부는 가장 심각한 탄핵 사유가 될 것이다.

민주적 국가는 투명성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블랙리스트가 왜 이토록 문제가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행위가 민주적 권력이 내포하고 있는 정당성의 본질, 바로 '투명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자들, 신뢰할 수 없는 자들, 그래서 피해야만 하는 자들의 이름을 법이 승인하지 않은 방식으로 '은밀하게' 작성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블랙리스트는 공적인 권력을 밀실을 통해 사유화하려는 의도된 욕망의 산물이다. 이런 욕망은 정치를 몰상식하고도 단순한 '적'과 '동지'의 구분으로 몰아간다. 이 사유화의 욕망에는 보수와 진보의 구분도 없다. 내게 어떻게든 해롭다면 '적'일 뿐이다. <조선일보>의 송희영 주필 사건을 상기해 보라. 박근혜 정권 하에 대부분의 보수언론이 느꼈을 좌절감도 여기에 있다.

플라톤은 2500년 전 '기게스의 반지'라는 일화를 통해 이런 '권력의 밀실화'를 경고했다. 기게스는 리디아의 참주로, 원래는 왕의 양을 돌보던 양치기였다. 기게스는 위쪽을 아래쪽으로 돌리면 모습이 사라지는 반지 하나를 우연히 발견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기게스는 곧장 자신의 주인이던 왕을 살해하고 권력을 찬탈해 버린다. 은밀한 힘이 순진한 양치기조차 타락시켜버린 것이다. 

기게스의 반지에 담긴 이런 발상이 고스란히 옮겨간 소설이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다. 이 소설의 절대반지 역시 반지를 낀 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이 절대반지를 소유한 이들은 그 힘을 깨닫자마자 모두 탐욕스럽게 변해간다. '아라곤'이 명예로운 왕으로 귀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시작부터 이 반지와 거리를 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 이전에 대한민국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이들은 최순실을 비롯한 비선실세였다. 비선이라는 말 역시 '은밀함'이란 뜻을 담고 있다. 어쩌면 최순실에게 박근혜 대통령은 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해주는 반지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그 은밀함의 끝이 헌정파괴라는 지독한 부패임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애초에 '블랙리스트'는 명단에 담긴 자의 죽음을 뜻했다. 하지만 민주사회에선 그것을 만든 자의 모든 경력의 죽음을 뜻하는 말이다. 투명성이야말로 민주정체가 추구하는 권력의 심장이기 때문이다.

권력이 투명한 국가가 행복한 국가다

독일에 기반을 두고 반부패운동 활동으로 세계적인 권위를 얻고 있는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한 '2015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가입국 중 27위에 불과했다. 부패인식지수란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 국가의 공무원이나 정치인 등이 얼마나 청렴하다고 느끼는지에 대한 지수이다. 100점 만점으로 측정되는 이 지수에서 2015년 우리나라의 부패인식점수는 56점으로 2008년 이후 50점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10점 만점일 시기에는 5.0대에 머물렀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폭탄으로 인해 앞으로 이 지수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반면 2012년부터 90점 이상으로 줄곧 부패인식지수에서 가장 청렴한 국가로 국민들이 스스로 인식해온 국가가 있다. 바로 덴마크다. 놀랍게도 덴마크는 2012년부터 유엔이 실시한 가장 행복한 국가에 대한 조사에서 3차례나 1위를 차지했다. 2016년도 역시 가장 행복한 국가는 덴마크였다. 이 결과에 따르면 가장 투명한 국가가 가장 행복한 국가였다. 혹시 덴마크라는 하나의 예를 일반화시키는 것은 아니냐고 누군가는 물을 수 있겠다. 가장 최근 통계로 2015년 부패인식지수에서 가장 청렴한 나라의 순위는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 뉴질랜드,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위스 순이었다. 같은 해 가장 행복한 나라 순위는 스위스, 아이슬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캐나다, 핀란드, 네덜란드, 스웨덴, 뉴질랜드 순이었다.

참고로 같은 해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세계 언론의 자유지수'의 순위는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스웨덴, 뉴질랜드, 오스트리아, 캐나다 순이었다. 블랙리스트 따위는 필요 없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들일수록 부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행복한 삶으로 이어졌다. 결국, 투명성이야말로 우리가 살고 싶은 정당하고도 행복한 민주국가에 이르는 핵심인 것이다.

"투명성의 부재는 불신과 깊은 불안감을 낳는다." 블랙리스트와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을 통해 우리들이 느끼는 정치에 대한 지독한 불신, 앞날에 대한 깊은 불안감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딜라이 라마의 이 한마디가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을 울린다.



태그:#블랙리스트, #비선실세, #김기춘 , #박근혜, #최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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