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중지추(囊中之錐) :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띄게 됨을 이르는 말

주머니 속에 송곳을 넣어 놓으면 어떻게 될까. 얼마 동안은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다. 별다른 표시가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기간이 제법 길어질 지도 모른다. 1년, 2년, 그러다 10년이 될지도 모른다. 그 이상이 흘러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그 '뾰족함'이 주머니를 뚫기 마련이다. 송곳은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없다. 오랜 무명 생활 끝에 '빛'을 보는 배우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결국 뚫고 나왔구나!' 막혀 있던 강이 터지듯,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는 그들을 바라보면 괜시리 기분이 좋아진다.

 <김과장>의 한 장면

<김과장>의 한 장면 ⓒ KBS2


"그래. 나는 접어두다 못해 꾸깃꾸깃 구겨서 처박아놔서 이거 어딨는지 찾지도 못해. 근데 나도 한때 있잖아. 여기 A4용지처럼 스치면 손끝 베일 만큼 날카롭고 빳빳하던 시절이 있었어. 근데 이게 어느 한 순간 무뎌지고 구겨지더니, 한 조각 한 조각 떨어져 나가더라. 결혼할 때 한 번, 애 낳고 나서 아빠 되니까 또 한 번, 집 사고 나서 또 한 번, 그리고 애 대학갈 때쯤 돼서 이렇게 들여다보니까 이게 다 녹아서 없어졌더라구." (KBS2 <김과장> 10회 중에서)

▲ 배우(俳優) : 연극이나 영화에 출연하여 연기하는 사람

2016년 최고의 화제작이라 불러도 무방할 tvN <시그널>부터 tvN <혼술남녀>, 그리고 2017년 상반기 가장 뜨거운 드라마로 자리매김한 KBS2 <김과장>까지 그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배우'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올라 입밖으로 흘러나온다. "야, 진짜 배우다, 배우. 저런 사람이 진짜 배우지." 물론 연기를 업(業)하는 모든 사람들이 '배우'라는 이름을 갖지만, 그 말에 단순히 '직업'이라는 의미를 넘어 '존경심'을 담는다면, 김원해는 그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다.

물론 그는 '주연' 배우가 아니다. 당연히 스포트라이트에서 비껴 있다. 또, 제작 단계에서 캐스팅 선택지의 첫 번째일 가능성도 낮다. 하지만 막상 드라마가 시작되고 나면, 그의 존재감은 주연 배우에 못지 않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아우라'를 뽐낸다. 신기하고도 놀라운 일이다. <시그널>을 예로 들어보자. 김혜수와 조진웅 그리고 이제훈이 막강한 포스를 뽐냈던 그 드라마에서 김원해는 자신만의 맛깔스러운 연기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금도 목배개를 차고 컵라면을 들고 등장했던 김계철 형사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시그널> <혼술남녀> <김과장>... 김원해의 힘

 <시그널>과 <혼술남녀>에 출연했던 김원해

<시그널>과 <혼술남녀>에 출연했던 김원해 ⓒ tvN


<혼술남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스타 강사 앞에서는 나긋나긋한 표정과 말투로 기분을 살랑살랑 맞춰주면서 만만한 강사(민진웅)에게는 잔소리를 쏟아내며 핀잔을 주는 밉상 상사의 모습을 100% 리얼하게 구현했다. 게다가 또 회식은 왜 그리 좋아하는지, 또 어쩜 저리도 우리 회사 상사 같은지, 많은 시청자들이 김원해가 만들어 낸 '현실감'에 몰입했다. 그러면서도 민진웅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의 곁을 지키며 손을 잡고 다독이는 뭉클함을 자아내기도 했다.

<시그널>에서는 강력계 형사, <혼술남녀>에서는 공무원 학원의 원장. 이처럼 김원해는 디테일한 직업 묘사와 리얼한 생활 연기를 통해 자신이 맡은 배역의 리얼리티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그래서 시청자들이 드라마에 빨리 몰입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한다. 그렇게 마련된 배경 속에서 주연 배우를 비롯한 다른 연기자들은 마음껏 연기를 펼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김원해라는 배우가 만들어 내는 리얼리티의 힘이다. 김원해가 가진 저력은 <김과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발현된다.

 <김과장>의 한 장면

<김과장>의 한 장면 ⓒ KBS2


"나, 적어도 앞으로 6, 7년은 더 버텨야 돼. 하나 있는 딸래미 대학은 끝내줘야 한다고. 자꾸 없는 일도 있게, 작은 일도 크게 만들지 말자고. 부탁이야." (KBS2 <김과장> 9회 중에서)

명문대 출신으로 한때는 TQ그룹의 잘 나가는 사원이었던 추남호, 그러나 'A4용지처럼 스치면 손끝 베일 만큼 날카롭고 빳빳하던 시절'은 이제 과거일 뿐이다. 그저 자리를 보전하는 게 우선인 경리부장일 뿐이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머리를 조아린다. 자존심 따위 접어둔 지 오래다. 새파랗게 어린 직장 상사의 막말도 꾸역꾸역 참아낸다. 간도 쓸개도 내버렸다. 왜 화가 나지 않겠는가. 분노가 치밀지 않겠는가. 그러나 기러기 아빠로 살아가는 추 부장에게 회사는 단지 '그'만의 것이 아니다.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아둥바둥 버텨야만 하는 곳이다.

이 짠내 가득한 캐릭터를 김원해는 완벽하게 소화하며, 시청자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남궁민의 활약은 두말 할 것도 없지만, '회사'가 배경인 <김과장>이 수많은 샐러리맨들의 공감대를 자아낼 수 있었던 건 역시 김원해의 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과장이 종횡무진 활약하며 '사이다'를 선사하고, 시청자들에게 빵빵 터지는 웃음을 선물하는 바탕에는 추 부장이라는 캐릭터가 제공하는 현실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균형감이야말로 <김과장>의 돌풍을 만들어 낸 진짜 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김과장>의 한 장면

<김과장>의 한 장면 ⓒ KBS2


서울예대를 졸업하고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서 활동을 하다가 1997년 <난타>의 원년 멤버로 합류(<김과장>에서 보여줬던 현란한 칼 퍼포먼스는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다.)했던 김원해는 tvN <SNL>에 출연하면서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알렸다. 이후 <명량> <해적> <타짜2> 등 스크린을 통해 '배우'로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시작했고, 지금은 '김원해'라는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인정받는 배우로 자리매김을 했다. 이쯤되면 더 욕심을 부릴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 주연배우로 남고 싶은 욕심은 없습니다. 그저 지금은 살아가고 있는 서민들의 정서를 담아내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OSEN>, '시그널' 김원해, "주연배우로 남을 욕심은 없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김원해가 그려나갈 또 다른 '캐릭터'들이 기대된다. 또, 앞으로 그가 추구하는 '서민들의 정서를 담아내는 배우'로 오래토록 대중 곁에 남길 바란다. 주머니를 뚫고 나와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쳐보이고 있는 '낭중지추' 김원해를 응원한다. <김과장>식 말장난을 한번 해보자면, 대중들은 더욱 다양한 연기를 보여줄 배우 김원해를 원해!


김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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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길을 가라. 사람들이 떠들도록 내버려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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