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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답 겸 쇄환사로 출발한 통신사


제6차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
 제6차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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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옛길 걷기가 4월 1일 서울 경복궁을 출발했다. 금년은 제6차다. 조선통신사행 400주년을 기념해서 2007년에 제1차 옛길 걷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2년에 한 번씩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가 실시되었으니 금년이 6회째가 되는 것이다. 통신사행은 1607년(선조 40년) 처음 실시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악화된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를 복원하고,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를 데리고 올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사행의 명칭도 통신사가 아닌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다. 회답은일본에서 보낸 국서에 대답한다는 뜻이고, 쇄환은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를 우리나라로 소환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행이 가능했던 것은 임진왜란 전후에 발생한 동아시아 세력 판도의 변화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명나라가 내리막길을 걷고 여진족이 부상했기 때문에, 조선은 이들을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판 삼사
 현대판 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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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일본에서 또 다시 조선을 침공해 오거나 북쪽에서 여진족이 침공해 온다면 양쪽에서 외적을 막아야 하는 최악의 사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도쿠가와(德川) 막부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에서 임진왜란을 '전대의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이를 고쳤다는 성의를 표함으로써 외교관계가 재개될 수 있었다. 이때 사행단을 이끈 사람은 상사(上使) 여우길(呂祐吉) 부사(副使) 경섬(慶暹) 종사관(從事官) 정호관(丁好寬)이다.

당시 사행단은 규모가 500명쯤 되었다. 100명 정도가 사행단이고 400명 정도가 사공(沙工)과 격군(格軍)이었다. 사행단은 상사와 수행 자제군관, 종이 11명, 부사와 수행 자제군관, 종이 11명, 종사관과 수행 자제군관, 종이 6명이었다. 여기에 역관, 의관, 학관, 화원 등이 28명, 포수(砲手) 등이 9명이었다. 그리고 상사에 소속된 훈도와 나장 등이 13명, 부사에 소속된 훈도와 나장 등이 13명이었다.

덕수궁 석어당
 덕수궁 석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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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1607년 1월 12일 정릉동 행궁에서 출발했다. 정릉동 행궁은 현재의 덕수궁 석어당(昔御堂)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것은 1608년 2월 선조가 이곳에서 승하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실이 창덕궁을 새로 지어 이어(移御)한 것은 1611년 10월이다. 그때까지 조선왕실은 석어당과 즉조당(卽阼堂)에서 정무를 보았다. 그러므로 일본 사행의 출발지는 경복궁이 아닌 현재 덕수궁이다.  

경복궁 흥례문 앞에서 출발하다

통신사행 출발을 준비하는 사람들
 통신사행 출발을 준비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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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 출발지가 경복궁이다. 그것은 경복궁이 조선의 정궁으로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대원군 때 복원되어 현재도 조선궁궐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복궁에서는 한 번도 출발한 적이 없다. 공식적인 기록을 통해 확인해 보면 제2차 사행부터 출발지는 창덕궁 또는 경희궁이었다. 그러므로 경복궁 흥례문(興禮門) 앞에서 옛길 걷기를 시작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잘못되었다.

이번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는 서울에서 4월 1일 출발 5월 22일 일본 도쿄에 도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부산에 도착하는 것이 4월 21일이고, 하루를 휴식한 다음 4월 23일 배를 타고 대마도로 이동한다. 대마도에서 오사카까지는 배로 이동한다. 4월 28일 오사카에 도착한 일행은 다음 날인 29일부터 다시 걸어서 도쿄까지 간다. 중간에 교토(京都), 나고야(名古屋), 시즈오카(靜岡)를 거쳐 간다.

유스 조선통신사 삼사
 유스 조선통신사 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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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쿄 전 구간을 완주하는 사람은 35명 정도다. 그리고 중간 중간 짧은 구간 참여하는 사람은 수백 명에 이른다. 옛길 걷기 출발식이 아침 8시 30분으로 예정되어 있다. 사람들이 8시부터 모여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출발식에는 취타대, 풍물단, 옛길 걷기단, 유스 조선통신사, 금군, 기수, 호위군사, 아리랑 태무단 등이 참가한다. 이들은 30분 정도의 행사를 마친 후 9시 흥례문을 떠나 광화문으로 나간다.

이번 옛길 걷기 행사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조선통신사가 한일 양국에 남긴 기록물을 유네스코 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에 등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유스 조선통신사를 만들어 젊은이들이 이 행사에 참여하도록 한 것이다. 이들 두 가지는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세계에 알리고 후세에 전달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들 걷기 행사가 그동안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것도 세 가지 정도 된다.

한일 우정 걷기
 한일 우정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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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민간 차원의 한일외교다. 성신교린이라는 의제에 맞게 이웃으로 서로 믿음을 갖고 성실하게 교류하는 것이다. 둘째는 한일 우정 걷기를 통해 상대방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지리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호 우호증진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셋째는 조선통신사 사행로를 평화의 순례길로 만들어 관광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자는 것이다. 

광화문 광장을 지나 숭례문으로

광화문을 나서는 조선통신사 행렬
 광화문을 나서는 조선통신사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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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나오면 사직로가 있다.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팀 일행은 경찰이 잠시 교통통제를 해주어서 횡단보도로 우회하지 않고 바로 광화문 광장으로 들어선다. 이 날이 마침 토요일이어서 차량들이 많지 않아 크게 교통체증을 유발하지는 않는 것 같다. 지켜보는 차량에서도 호기심어린 눈초리로 행렬을 쳐다본다. 날씨도 좋은 편이서 경복궁 뒤 북악산과 서쪽의 인왕산이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광화문 광장의 동쪽편을 따라 일행은 남쪽을 향한다. 선두에 전통복장으로 '조선통신사 납시오' 플래카드를 든 젊은이 둘이 대열을 이끈다. 그 뒤를 전통복식을 한 취타대가 풍악을 울리며 뒤따른다. 그 뒤에는 금군, 무장들의 호위를 받으며 통신사 삼사가 뒤를 따른다. 그 뒤를 농악대가 따른다. 농악대 뒤를 유스 조선통신사가 따르고, 그 뒤를 옛길 걷기팀이 따른다.

희망 촛불 탄핵 꽃
 희망 촛불 탄핵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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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 걷기팀 뒤로는 조선통신사 지역네트워크 회원들이 따라간다. 이들 뒤로는 아리랑 태무단 학생들이 따라간다. 이들 걷기팀 일행은 모두 400명 정도 된다. 취타대가 세종대왕상 앞에 도착하자 잠시 길을 멈추고 마지막 공연을 한다. 취타대는 더 이상 가지 않고 이곳에서 작별을 해아하기 때문이다. 통신사 삼사, 금군, 기수, 호위 무장 등도 더 이상 가지 않는다.

일행은 이제 이순신장군 동상쪽으로 나간다. 중간에 광화문 광장에서 진행된 촛불집회의 흔적이 보인다. 희망 촛불이 있고, 탄핵 꽃이 있고 기억의 문이 있다. 한쪽의 천막에는 정원스님 시민분향소도 마련되어 있다. 길 건너편 교보빌딩에는 윤동주(1917-1945) 시인의 '새로운 길'이라는 시도 걸려 있다. 시인의 탄생 백주년을 기념해 내건 시다.

조선통신사와 새로운 길
 조선통신사와 새로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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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조선통신사 옛길도 사실은 옛길 그대로 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역사와 세월 속에서 길은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이다. 옛길 걷기팀은 변화된 길을 인정하며, 가능한 한 옛길을 찾아갈 뿐이다. 통신사 옛길 서울구간도 큰 틀에서는 창덕궁(경희궁)-숭례문-관왕묘-(청파역)-이태원-한강진-양재역-신원-월천현(月川峴)이다. 그렇지만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길이 바뀌었고, 용산구는 일제강점기 이후 외국군 주둔지가 되면서 출입금지 지역이 되어 옛길을 그대로 따라갈 수가 없다.    

숭례문을 지나 이태원으로

숭례문을 지나는 대원들
 숭례문을 지나는 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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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앞에서 풍물단도 작별을 하고, 이제는 다음 목적지인 숭례문으로 향한다. 숭례문도 옛날 같으면 문루를 통과했겠지만, 이제는 숭례문을 우회해 서울역 방향으로 나간다. 숭례문은 조선시대 통신사들이 일본으로 갈 때 공식적으로 지나야 하는 문이었다. 숭례문을 나오면 관왕묘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에서 사신들은 옷을 갈아입거나 말을 바꿔 타고 한양성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신과 관료들이 관왕묘까지 나와 통신사 일행과 이별하곤 했다. 관왕묘를 지나면 길은 오르막이다. 이 길이 우수현(牛首峴)이다. 순우리말로 하면 소머리고개다. 인근에 두텁바위(蟾巖)가 있었다고 하는데, 두텁바위로라는 도로명으로만 남아 있다. 이 고개에 이르면 남쪽으로 이태원과 둔지산(屯之山)에 이르는 길을 조망할 수 있었다고 한다.

후암로를 따라 이태원으로 내려가는 대원들
 후암로를 따라 이태원으로 내려가는 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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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길은 후암로를 따라 용산고등학교까지 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옛길은 용산고등학교를 지나 두텁바위로로 이어지는데 이 길은 미군부대로 인해 막다른 길이 되고 말았다. 이 길을 따라 계속 가면 미군부대 안에 옛 이태원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태원을 지나면 길은 둔지산 북쪽 부아고개(負兒峴)으로 이어진다.

서울 남쪽의 넝쿨내(만지천)를 살리자

이태원 표지석
 이태원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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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태원 표지석은 현재 용산고등학교 정문 앞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옛길걷기팀은 남쪽으로 이어진 두텁바위로를 따라가지 못하고, 서쪽으로 나 있는 두텁바위로를 따라간다. 길은 미군부대 담벼락을 따라 지하철 숙대입구역 쪽으로 이어진다. 이 길이 만초천(蔓草川)을 복개해 만든 새로운 도로다. 만초천은 순우리말로 넝쿨내라 불렸다.

넝쿨내는 무악산에서 발원해 서대문과 서울역을 지나 용산 전자상가 뒤로 해서 용호(龍湖)로 흘러들어가는 서울 남쪽의 중요한 하천이다. 길이가 7.7㎞로 일명 무악천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두텁바위로 아래로는 남산에서 흘러내린 만초천 지류가 청파동 주민센터(청파역) 방향으로 흘러간다. 용산문화원에서는 김천수 이사를 중심으로 만초천 물길을 살리자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만초천이 살아난다면 청계천 이상 가는 명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남산에서 흘러내리는 만초천 지류가 두텁바위로 아래로 흐르고 있다.
 남산에서 흘러내리는 만초천 지류가 두텁바위로 아래로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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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초천의 또 다른 지류는 남산 3호터널 남쪽교차로 부근에서 이태원2동을 지나 남쪽으로 흐르다 회나무로를 만나 서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미군부대 안을 흘러 청파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므로 현재 청파로가 만초천의 본류가 된다. 만초천은 조선시대 한양 남쪽에 살던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 역사가 켜켜이 서려 있다. 용산문화원은 만초천을 살리기 위해 그 물길을 따라 걸으며, 역사와 문화를 찾아보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


태그:#조선통신사, #옛길 걷기, #한일 우정, #서울-도쿄, #경복궁-달래내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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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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