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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JTBC 소셜라이브에서 손석희 앵커가 유선의 기자에게 '말조심'해야 한다고 지적하는 모습.
 지난달 31일 JTBC 소셜라이브에서 손석희 앵커가 유선의 기자에게 '말조심'해야 한다고 지적하는 모습.
ⓒ JTBC 소셜라이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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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앵커 : (손가락으로 상대를 강하게 가리키며) "말조심 해야 합니다."

지난 5월 31일 방송된 JTBC '소셜라이브'에서는 앵커가 기자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생경한 풍경이 벌어졌다. 보도국 안에서 취하기엔 다소 격앙된 제스처였지만, 앞선 대화 내용은 이 손가락질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JTBC는 '비밀, 거짓말 그리고 사드'라는 주제로 JTBC '소셜라이브'를 진행했다. 해당 프로그램은 매일 밤 8시 방송되는 JTBC 메인뉴스 <뉴스룸> 이후에 페이스북을 통해 송출되는 콘텐츠로, 기자들의 취재 뒷이야기를 전한다. 평일 뉴스 진행자인 손석희 앵커·안나경 아나운서와 기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그 후 기자들이 페이스북 댓글을 확인하며 시청자들의 깊이 있는 궁금증과 심화된 의문점을 해결해주는 꽤나 참신한 코너다. 방송과 소셜 플랫폼의 쌍방향적 소통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대본없이 진행되는 생방송 콘텐츠의 한계, 그러니까 진행자와 출연자의 '실수'가 여과없이 방송된다는 점은 언제나 아슬아슬하다. 콘텐츠의 이러한 성격은 유선의 기자가 저지른 실수의 뒷배경이 되었다. 이날 유선의 기자는, "왜 안나경씨에게는 (사드 관련) 질문을 하지 않느냐"라는 손 앵커의 질문에, "사드와 관련해서 사실, 사드와 관련없게 외모가 그래 가지고"라는 황당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손 앵커와 안 아나운서의 물음에는 "제가 오늘 한민구 장관을 봤는데, 사드가 겹쳐 보이는 느낌을 받아서..."라며 얼버무렸다. 당황한 유 기자의 대답은 어떤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보도국 성차별'의 공식... JTBC라서 더 아쉬운 이유

국내 보도국 내부의 성차별적 지점들에 대한 지적은 오랜 시간 축적되어왔다. '기자 출신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 아나운서가 이루는 혼성 진행 체제'라는 따분한 공식이 굳어지기 전에, 우리의 눈과 귀는 이를 먼저 익혔다. 어느덧 시청자인 우리는 이 조합에만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공식을 벗어난 뉴스를 견뎌낼 힘을 잃어버렸다. 공식에 완전히 젖어버린 시청자들은, 탈공식화된 구조에 뭔가 이상하고, 뭔가 불편하고, 뭔가 어색한 느낌을 지우기 힘들어한다.

메인 뉴스 진행자의 성별, 나이 조합을 넘어 다른 지점들도 톺아볼 필요가 있다. 남성 진행자가 다루는 토픽과 여성 진행자가 다루는 토픽의 차이. 전자는 주로 정치, 경제, 국제 등 '무거운' 뉴스를 다루고 후자는 주로 가벼운 사회, 문화 분야를 다룬다. 스튜디오에 등장하는 고정 진행자가 아닌 기자들의 성별은 대부분이 남성이다.

이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와 그것이 가져온 유의미한 변화 역시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MBN 김주하 앵커가 메인 뉴스 <뉴스8>을 단독으로 진행하고 있고, YTN의 정오 뉴스 <뉴스N이슈>에는 남성 아나운서보다 더 나이 많은 여성 아나운서가 등장한다. 무려 20여 년 전인 1995년엔 SBS 이지현 기자가 주말 저녁 종합 뉴스 <SBS뉴스2000>의 단독 진행자로 나선 전례도 있다. 지나온 시간이 있었기에 현재가 있고, 지금이라는 시간이 내일을 여는 것 아니겠는가. 결코 정의롭지 못한 성차별의 사례들과 그것을 부숴버린 사례들은 역사를 거닐며 차곡차곡 쌓여왔다.

팩트체크 코너를 진행하는 안나경 앵커
 팩트체크 코너를 진행하는 안나경 앵커
ⓒ JTBC 뉴스룸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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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파, 케이블, 종합편성채널 그 누구도 온전히 파격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앞서 언급된 몇 가지 사례들이 존재함에 만족해야하는 수준에 그쳐온 것이다. 다만, JTBC는 달랐다. JTBC 메인 뉴스 <뉴스룸>이 선보여온 '디테일의 미학'은 더욱 성평등적인 보도국을 만들어왔다. 관념을 뒤집는 파격을 선보이지는 못하더라도, 세세한 디테일에 섬세하면서 예민한 감수성을 표현해온 그들이었다.

<뉴스룸> 남성 진행자 손석희 앵커는, 독보적인 커리어와 영향력을 자랑하는 스타 언론인이다. 그래서 <뉴스룸>이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손 앵커의 존재에 더욱 기대어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손석희는 <뉴스룸>을 넘어선 JTBC의 얼굴이다. '팩트체크' '앵커브리핑' 등의 코너를 손 앵커가 도맡아 진행했고, 방송에 출연하는 주요 인사들과의 인터뷰 역시 그의 담당이었다.

2014년 3월부터 손 앵커와 호흡을 맞춰온 안나경 앵커의 대중적 인지도는, 눈부신 존재감을 자랑하는 그의 파트너에 비해 낮은 것이 사실이다. 보도부문 사장이기도 한 손석희의 압도적인 존재가, 그저 한 명의 직원이면서 여성인 안나경 앵커의 존재감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JTBC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한 변화를 선택했다. 손 앵커가 진행해오던 메인 코너 '팩트체크' 진행을 안나경 앵커에게 넘기면서 더 많은 분량을 할당했다. 정치-사회 전반 주요 뉴스의 아나운싱 몫을 안 앵커에게 분배했다. 현장에서 리포팅하는 기자들과의 연결 시간도 그에게 돌아간 적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스튜디오에 출연하는 기자들의 성별 분배에도 신경쓰는 모습을 보였다. '팩트체크' '비하인드 뉴스' 등 고정 코너 전부를 남성 기자가 맡고 있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많은 기획 취재를 여성 기자들에 맡기고 방송에 출연시켜 스튜디오의 성별적 불균형을 깨트렸다. 때때로 뉴스에서 연출되는 여성 아나운서와 여성 기자의 대담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이 모든 변화의 기저에는,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여성 언론인들의 고투가 깔려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논란의 공간적 배경이 된 곳이 JTBC라는 사실이 더욱 시리게 다가온다. <뉴스룸> 연출팀은 성차별적 요소가 될 수 있는 디테일에 주목해, 이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렇게 걸어왔기 때문이다. 손 앵커가 해당 기자의 실언에 곧바로 주의를 주었다는 사실과 지금껏 JTBC가 쌓아온 디테일의 역사가 이번 사건의 충실한 변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를 온전히 유선의 기자 개인의 비행이라고 치환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명백하다. 지금 우리에겐 차별적 구조를 바라보는 힘이 필요하다.

피우진, 조현옥. 강경화, 김현미에게도 질문하지 않을 텐가

지난 5월 18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국가보훈처에서 피우진 신임 처장이 취임식에 참석하고 있다.
▲ 취임식장 입장하는 피우진 보훈처장 지난 5월 18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국가보훈처에서 피우진 신임 처장이 취임식에 참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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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30일 국토교통부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김현미(경기 고양정·3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날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국토부 장관 후보 내정된 김현미 '함박웃음' 지난 5월 30일 국토교통부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김현미(경기 고양정·3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날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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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같이 '여성 최초' 기사가 쏟아지는 문재인 정부의 시대다. 문재인 대통령은 내각의 30% 이상을 여성으로 임명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집권 초기인 현재, 공약을 이행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조현옥 인사수석,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가 이렇게 탄생했다. 이들이 수장을 맡은(혹은 맡게 될) 분야는 지금껏 '금녀의 구역'으로 불릴 정도로 거의 모든 구성원이 남성으로 이루어져 왔으나, 이들은 그 장벽을 보기 좋게 뚫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이들이 그저 '여성 30% 정책 덕분에'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피우진 보훈처장은 대한민국 육군 최초의 여성 헬리콥터 조종사로, 군에 수십 년간 몸을 담으면서 여군으로서 받는 차별에 당당히 맞서왔다. 강경화 후보자는 UN에서 일찌감치 그 능력을 인정받아 정책특별보좌관으로 활약했으면, 김현미 후보자는 의원 시절 주거 문제에 집중해온 전문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여성들이 활약해온 모든 사실을 오늘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자, 이제 기자들은 여성 보훈처장을, 여성 외교부장관을, 여성 국토부장관을 만나게 됐다. 그들에게 질문하게 됐고, 그들의 정책 발표를 듣게 됐다. 그렇다면 당신은, 여성과는 '호국보훈'을 논할 수 없다고 말할 텐가? 여성과는 국제 정세와 외교 방향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없다고 말할 텐가? 여성에게는 국토종합계획의 수립 방향을 묻지 않을 텐가? 그들의 성별은 결코 그들을 설명하는 상징이 될 수 없고, 그 실체없는 상징성에 사로잡혀 스페셜리스트로서의 여성을 인정하지 않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유선의 기자의 지난 5월 31일 발언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의 발언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을 계속 해왔지만, 우리 사회의 여러 지점을 관류하는 성차별적 사고를 봤을 때 어찌 보면 그의 편협함은 지극히 현실정합적일 수 있다. 기자 개인이 어떤 개인적·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는 '사드를 논하는 여성 앵커'의 모습을 전혀 상상해낼 수 없었는지 모른다. 유 기자가 이러한 상상을 할 수 없었을 정도로, 이 사회는 끔찍하도록 상상력이 결여되어 버린 공간이라는 것이다.

기자 개인의 말실수와 성평등한 보도국을 만들려했던 JTBC의 노력의 교묘한 병치, 그 자체가 진보하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개인이 변화하는 사회를 따라가지 못할 수도, 사회가 진보하는 개인을 따르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이 사회는 그 유연한 삐걱거림을 양분으로 무궁무진하게 변화할 것이다. 이것이 더 정의롭고 더 옳은 공간을 만들어갈 시민의 힘을 여전히 신뢰하는 이유다.

온전한 의미의 성평등은 어느 순간 마법처럼 순식간에 우리를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변화하는 보도국과, 성차별의 공식에서 벗어난 낯섦을 껴안을 줄 아는 기자들의 성장이, 그 마법의 순간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렇게 찬찬히 고도를 높여나가기를 기대한다. 


태그:#JTBC, #손석희, #유선의, #안나경, #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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