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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 종교·문화·학술·시민사회계 원로 40여 명은 지난달 31일 기자회견을 열고 "명진 스님의 승적을 박탈한 조계종 총무원의 징계 조치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이를 계기로 명진 스님이 지나온 삶을 조명하는 3편의 글을 싣는다. [편집자말]
명진 스님(전 봉은사 주지)이 지난해 11월 상원사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났을 때의 모습.
 명진 스님(전 봉은사 주지)이 지난해 11월 상원사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났을 때의 모습.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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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뜻이다. 중국 당나라 때 고승 임현 의현의 말인데, 부처님의 말씀조차 우리를 속박한다면 깨뜨려야 한다는 선의 정신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절대 부정을 통해 절대 긍정을 추구하는 불교 정신의 진수인데, 그 어떤 고정관념에 갇히지 않고 자유를 추구해나가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여기 조계종 승적을 박탈당한 한 승려가 있다. 명진 봉은사 전 주지. 그동안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판했다는 게 주된 이유 중의 하나이다. 조계종 이미지를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총무원은 2015년 불교닷컴과 불교포커스를 '해종 언론'(종단을 해치는 언론)으로 규정하고 출입, 광고 금지 조치를 내린 바 있다. 쓴소리에 귀를 막은 자승 총무원에게 살불살조의 정신을 찾아보기 어렵다. 

'파사현정'(破邪顯正).

'그릇된 것을 깨야 바른 것이 드러난다'는 불교 용어다.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자비의 정신은 무작정 대상을 품는 게 아니다. 명진 스님은 "힘없고, 탄압받고, 차별받는 생명에는 하염없이 측은지심을 품지만, 그릇된 것을 보았을 때에는 죽비나 심지어 목탁으로 머리를 세게 내리쳐서 깨뜨려야 하는 게 자비심의 진수"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권 때 그가 그랬다. 그는 무도한 정권의 등짝을 서슬 퍼런 죽비로 내리쳤다. 자승 총무원장은 이명박 씨가 대통령 후보로 뛰었을 때, '747 불교지원단' 상임고문으로 도왔지만 그는 달랐다. 선거운동 때 이 후보가 인사 차 봉은사에 오겠다고 제안했을 때도 거절했다. 당선된 뒤에도 "이명박 정권은 파렴치, 몰염치, 후안무치한 삼치정권"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그는 정권에게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당시 집권 여당 대표 안상수 씨의 '강남 좌파 스님을 내쫓아야 한다'는 발언이 공개됐다. 국정원도 그를 사찰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결국 자승 총무원장은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만들어 새 주지 임명을 강행했다. 그는 주지를 내려놓고 혼자 걸망을 지고 봉은사를 나왔다.   
     
자승 총무원이 지난 4월 조계종 승적을 박탈한 명진 스님(전 봉은사 주지)을 최근 몇 번 만났다. 지난 5월 부처님 오신 날에 월악산 보광암에서 1박2일을 함께하면서 소쩍새와 휘파람새가 우는 늦은 밤까지 인터뷰를 했다. 오마이뉴스에 매월 1만원 이상씩 자발적 구독료를 내는 10만인클럽 회원인 그는 최근 오마이뉴스 서교동 마당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지금부터 써내갈 세 편의 글은 최근 만남의 대화 내용이자, '살불살조' '파사현정'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해온 한 승려의 치열했던 삶의 기록이다. 출가한 지 43년만에 조계종 승적을 빼앗긴 삶의 한 자락을 잠시 들춰본 뒤에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다. '자승 총무원은 그의 승복을 벗길 자격이 있는가?'
             
다음은 최근 인터뷰와 그의 저서 '스님은 사춘기'(이솔 출판)의 내용을 재구성 한 글이다.

[어린 시절] 자살, 폭력... 그리고 물음

명진 스님의 중학교 시절 사진.
 명진 스님의 중학교 시절 사진.
ⓒ 명진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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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을 덮고 있던 붉은 흙, 이게 뭐지 하며 서 있던 나."

그의 기억은 6살 때부터이다. 아버지의 외도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었던 어머니의 장례식 장면, 잊을 수 없단다. 그 뒤 새어머니가 왔지만 불화의 연속이었다.

초등학교 때 돈을 훔치지 않았는데 훔쳤다며 그를 때리는 아버지를 홧김에 축대 위에서 발로 밀어낸 뒤 마포대교 밑 한강 벼랑천에서 뛰어내렸다. 첫 자살시도였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모래 배가 그를 살렸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초등학교를 6번이나 옮겨 다녔다. 새 학교에 갔을 때마다 그는 제일 먼저 '학교 짱'과 악착같이 싸웠다. 그래야 그 뒤가 편했다.

잠시 외가댁에 의탁했을 때 외할머니는 "너희 에미는 너희 애비 때문에 죽었다. 크면 꼭 에미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 친할머니와 함께 있을 때에는 항상 "쯔쯧, 독한 것, 저런 어린 것들을 놔두고 죽어?"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스님은 사춘기'라는 책에서도 당시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그런 소리를 듣고 자란 내 마음 속엔 '어머니는 자식을 두고 죽은 독한 사람, 아버지는 커서 원수를 갚아야 할 사람'이 되어 버렸다."(14쪽)

'왜 나만 불행할까?' '왜 세상은 공평하지 않나?' 유년 시절 그의 뇌리에 각인된 피해의식이었다. 그는 "동네에서 일어나는 사고란 사고는 죄다 치고 다녔다"면서 "초등학교 4~5학년 때에는 고무줄 총을 만들어서 전등을 깨고 다니기도 했다"고 말했다.

방황하던 그는 대학교에서 국문학과를 전공한 큰외삼촌 댁 책장에 꽂혀있던 책속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했다. <좁은문>, <전쟁과 평화> <까르마초프의 형제들> 같은 세계문학전집을 비롯해서 심훈의 <상록수>, <무영탑> 같은 책들을 미친 듯이 읽었다. 그 때만은 불안하고 거칠었던 마음이 가라앉고 안정이 되었다.

분노의 질주

하지만 중학교 때에도 세상을 향한 분노와 저주는 가시지 않았다. 작은 말썽을 일으켰는데 감정적으로 뺨을 때리는 선생님에 맞서기도 했다. 당진에서 서울로 전학을 온 뒤 2학년 때에는 외가댁이 있는 충청도로 전학을 갔다. 외가댁은 부자였지만 차마 '학비를 내달라'고 말할 수 없었단다. 그해 늦가을 학교 뒷산에 올라가 수면제 20알을 먹었다. 두 번째 자살 시도였다. 다행히 새벽 산책을 나온 마을 사람에게 발견돼 위세척을 한 뒤에 간신히 살았다. 

공부할 새도 없이 쏘다녔던 그는 운(?)이 좋았다. 당시 돈 없는 가정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다니던 서울공고 토목과에 합격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철조망 클럽', '레인보우클럽', '청마클럽'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조직을 만들어서 패싸움을 했다. 당시 광화문 교원회관 지하 영다방과 을지로 킬리만자로 음악 다방을 주로 다녔는데 가끔 DJ를 맡은 형이 바쁠 때는 대신 DJ를 보기도 했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짤짜리'(동전 따먹기)하고 담배연기 자욱했던 다방에서도 인기가 좋았죠. 하-하-하."

[청년기] 그의 머리를 내리친 '벼락 질문'

명진 스님의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 왼쪽으로부터 두번째이다.
 명진 스님의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 왼쪽으로부터 두번째이다.
ⓒ 명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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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렇듯 "아무런 희망도 없이 문제아처럼 살았다"고 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사촌형님의 소개로 무주구천동의 관음사에 들어갔다. 사촌형님은 '그냥 놔두면 사람 버리겠다'고 생각했는지 "대학에 들어가면 등록금을 내주겠다"고 설득해 마지못해 떠난 길이었다. 그런데 우연한 인연, 그곳에서 한 스님과의 하루 밤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그는 자기에게 말도 걸지 않고 면벽수행만 하다가 저녁 9시에 목침을 베고 누운 스님이 심상치 않았단다. 당시 그의 표현을 빌면 '센 놈'같아 보였단다. 이런 상대와는 한 번 붙어봐야 직성이 풀렸다.

"스님은 왜 출가를 하셨냐고 물었더니, 대뜸 '학생은 뭐 때문에 절에 왔냐'고 되묻더라고요. 그래서 대학입시 준비하러 왔다고 말했더니, 대학은 왜 가냐고 또 묻더라고요. 좋은 데 취직해서 잘 살려고 한다고 했더니,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고 묻기에 '그렇게 살다 죽는 거죠'라고 답했죠. 그러자 그 스님은 '그렇게 살다 죽으려고 공부하냐'고 또 묻더군요.

말문이 막혔습니다. 잠깐 있다가 스님이 '학생'이라고 불러서 '예'라고 대답을 하니 '무엇이 예라고 대답했소? 예라고 대답한 놈이 뭐요?'라고 묻더군요. 그래서 '모르겠다'고 대답을 하니 스님은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영어를 공부하고 수학을 공부해서 대학가고 취직하고 결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하더군요."

그는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대체 나는 누구인가?'

출가하려고 보따리를 쌌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고등학교 졸업장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6개월 뒤인 1969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나섰다. 한 때 출가한 적 있었던 사촌형님은 해인사 백련암의 성철 스님에게 소개장을 써 주었다.          

[행자 생활] "무명 번뇌를 자를 보검을 구하러 왔습니다"

명진스님의 젊은 시절 모습.
 명진스님의 젊은 시절 모습.
ⓒ 명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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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 생활을 시작하면서도 시건방이 하늘을 찔렀죠. 무슨 취직을 하러가는 것도 아니었기에 일주문 앞에서 소개장을 찢어버렸습니다. 백련암으로 곧장 가지 않고 해인사에서 행자생활을 했어요. 학생 시절 몸에 배인 성깔이 어디 가겠습니까? 가장 센 놈과 붙어야 한다는 근성이죠. '성철스님과 맞장을 뜨겠다'고 결심하고 백련암으로 올라갔죠."

행자생활을 시작한 지 보름 밖에 안 됐을 때였다. 당시 성철 스님은 불교계를 통틀어서 큰 스님으로 추앙을 받았다.

"이등병도 아닌 훈련병이 육군 참모총장과 맞짱을 뜨려고 덤비는 꼴이었지요. 하-하."

스무 살 청년이었던 그는 구정물이 잔뜩 배인 작업복을 입고 성철 스님에게 삼배를 올린 뒤 이렇게 말했단다.

"무명번뇌를 자를 보검을 구하러 왔습니다."
"하, 이놈 우낀 놈이네. 건방진 놈. 너, 그렇게 말하는 거 어디서 배웠노?"
   
그는 성철 스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3시간동안 절에 들어오기까지의 과거를 이야기하다가 다시 해인사로 내려왔다.

"내려오자마자 저녁 공양을 준비하려는데 원주 스님이 달려와서 '보따리를 싸라'고 하더라고요. 성철 스님이 빨리 끌고 오라고 지시했다는 겁니다. 성철 스님의 상좌가 되려고 줄을 서던 시절인데, 암자에서 내려온 지 10분도 안돼서 스카우트가 된 거죠. 하-하."

나를 찾는 길

성철 스님 밑에서의 행자 생활은 혹독했다. 경전 공부 때문이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 잠시라도 졸 틈을 주지 않았다. 한번은 매를 피해 도망갔다가 돌아오니 성철 스님은 그가 누웠던 자리를 곡괭이로 파놓았단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피웠던 담배도 그 때 끊었다.

"백련암 관음전 뒤쪽에서 일꾼들에게 빌린 담배를 피다가 걸렸어요. 그때 저는 되레 '법당에서 피는 향과 담배 향이 뭐가 다르냐'고 대들었죠. 엄청나게 혼이 났습니다. 3천배를 한 뒤에 담배를 끊었죠."

당시 승려들은 행자 생활을 3년 정도 해야 '계'를 받았다. 성철 스님은 청년 명진이 행자로 있은 지 1년도 안됐는데, 계를 주기로 결정하고 '원일'이라는 법명도 지어줬다. 그는 5일 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앙받던 큰 스님의 제자가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대부분의 승려들이 받고 싶어 하는 '훈장'과 같았다. 

"사실 당시 저와는 맞지 않았어요. 스님은 계속 경전을 보라고 했는데, 저는 경전을 보려고 중이 된 게 아니었거든요. 나를 찾고 내가 무엇인가에 대한 깨달음을 구하러 온 거였어요. 게다가 경전을 보려면 당시 일본에서 번역한 책이 많아서인지 일본어 공부를 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달마대사가 일본어 공부를 했습니까? 육조스님이 일본어를 공부했습니까? 저는 싫습니다'라고 했죠. 그러다 동안거 해제하는 날, 새벽에 보따리 싸서 나왔습니다."

그 뒤에도 그는 '나를 찾는 길'을 멈추지 않았다. 성철 스님과 쌍벽을 이뤘던 전강 스님의 문하에 들어가려고 용주사에 갔다가 헛걸음을 했고, 영주 부석사 비로봉 밑에서 공부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다가 몸에 병이 들기도 했다.

"그 때 사촌 형이 몇 번 연락이 왔어요. 성철 큰 스님이 '빨리 너를 데리고 오라고 호통을 치고 있다'고. 그런데 얼마 뒤인 1971년 1월에 신체검사 통지서를 받고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는 성철 큰 스님이 행자 시절에 직접 찍어준 자기 사진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성철 큰 스님이 명진 스님의 행자 시절에 직접 찍어준 사진.
 성철 큰 스님이 명진 스님의 행자 시절에 직접 찍어준 사진.
ⓒ 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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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는 명진 스님이 '운동권 스님'으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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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명진스님, #자승 총무원장, #승적박탈, #성철스님, #10만인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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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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