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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섬은 밤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68년 2월 10일 여의도 윤중로를 쌓는데 사용할 골재를 채취하기 위해 밤섬은 폭파되었다. 사진은 서울 마포구 상암동 물빛문화공원에 새겨진 밤섬 모습을 촬영했다.
▲ 밤섬 밤섬은 밤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68년 2월 10일 여의도 윤중로를 쌓는데 사용할 골재를 채취하기 위해 밤섬은 폭파되었다. 사진은 서울 마포구 상암동 물빛문화공원에 새겨진 밤섬 모습을 촬영했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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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강에는 10여 개의 섬과 모래톱이 펼쳐져 있었다. 석도(무학도), 잠실섬, 저자도, 서래섬(반포도), 밤섬(율도), 여의도, 난지도 등의 섬들이 한강을 따라 서울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점점이 떠 있었다.

한강의 섬들은 오랜 시간 강의 본류와 지류가 만나는 지점에 퇴적과 침식 작용으로 만들어졌다. 석도는 고덕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생겨났고, 잠실섬은 성내천과 탄천이 한강과 만나는 부근에 위치했다. 저자도는 중랑천이 만든 섬이고, 반포천과 이수천은 서래섬을 만들었다. 만초천과 봉원천은 여의도와 밤섬 인근으로 흘러들었고, 난지도는 한강 남쪽의 안양천과 북쪽의 홍제천(모래내)과 불광천이 흙과 모래를 운반해 만들었다.

밤섬과 가까운 위치인 서울 마포구 현석동 밤섬공원에는 이덕무의 시 '율도'를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다.
▲ '율도' 시비 밤섬과 가까운 위치인 서울 마포구 현석동 밤섬공원에는 이덕무의 시 '율도'를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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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한강개발 3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한강의 섬들은 파괴되거나 육지가 됐다. 무학도, 저자도, 서래섬, 밤섬은 택지와 제방을 조성하기 위해 골재를 재취하면서 파괴됐다. 잠실섬, 여의도, 난지도는 한강의 물길이 바뀌면서 육지가 된 섬들이다. 잠실섬이 있었던 곳에는 아파트단지와 올림픽경기장이 들어섰고, 서래섬은 파괴됐다가 인공섬으로 되살아났다.

여의도는 이름만 섬일 뿐 국회의사당, 방송국, 금융가, 아파트단지가 즐비한 콘크리트 숲이 됐고, 난초와 지초가 무성하던 난지도는 쓰레기산이 됐다가 2002년 월드컵공원으로 재탄생하였다. 한강의 홍수예방과 골재 채취를 위해 1968년 2월 9일 폭파됐던 밤섬은 20여년 만에 되살아나 서울을 대표하는 생태습지가 되었다.

한강에는 인공섬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노들섬은 한강인도교(한강대교)를 건설하면서 강 중간의 모래톱에 둑을 쌓아 만든 인공섬이다.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에 등장하는 선유봉(仙遊峰)은 높이 40m의 산이었으나 여의도의 윤중제 공사 때 파괴돼 육지와 단절된 섬이 되었다.

잠실섬, 부리도, 무동도

잠실섬은 본래 강북에 연결된 육지였으나 어느 해인가 큰 홍수로 신천강(新川, 새내)이 생기면서 섬이 되었다. 신천강은 잠실섬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였고, 송파강은 남쪽으로 흐르던 한강의 본류였다.
▲ 잠실공유수면매립약도 잠실섬은 본래 강북에 연결된 육지였으나 어느 해인가 큰 홍수로 신천강(新川, 새내)이 생기면서 섬이 되었다. 신천강은 잠실섬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였고, 송파강은 남쪽으로 흐르던 한강의 본류였다.
ⓒ 서울역사편찬원 <서울 6백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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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섬(蠶室島)은 지금의 서울 송파구 잠실동과 신천동에 위치했다. 부리도(浮里島)는 홍수가 나면 물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잠실섬과 부리도는 평상시에는 하나의 섬이었지만 홍수가 나면 두 개의 섬으로 분리됐다. 탄천과 한강이 만나는 언저리에 있었던 무동도(舞童島)는 섬의 남쪽에 춤추는 어린아이와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잠실섬은 본래 강북에 연결된 육지였으나 어느 해인가 큰 홍수로 신천강(新川, 새내)이 생기면서 섬이 되었다. 신천강은 잠실섬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였고, 송파강은 남쪽으로 흐르던 한강의 본류였다. 잠실섬의 면적은 360만 평이었고, 부리도는 30만 평 정도의 크기였다.

일제가 행정구역을 처음 개편한 1914년 잠실섬은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잠실리와 신천리에 편재됐다. 부리도는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삼전리에 속했고, 무동도는 인근의 봉은사마을, 닥점마을과 하나로 묶여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삼성리가 됐다.

조선시대에는 누에를 하늘이 내린 벌레라는 뜻으로 천충(天蟲)이라 부르며 신성시했다. 누에를 치는 양잠업은 왕이 잠실(蠶室)을 설치하고 직접 관장할 정도로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한양에는 세 곳에 잠실이 설치됐다. 동잠실은 잠실섬에 있었고, 서잠실은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었다. 서초구 잠원동에 있었던 신잠실은 동잠실과 서잠실에 비해 나중에 설치됐다.

잠실섬은 옛 지도에 상림(桑林)이라 표기될 정도로 뽕나무가 무성했다. 임진왜란 때까지만 하더라도 잠실섬의 주민들은 누에를 치는 일을 주업으로 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잠실섬의 뽕밭은 잦은 홍수로 피폐해졌고, 동잠실의 역할은 잠원동의 신잠실이 대신하게 됐다.

잠실섬과 부리도에는 새내마을, 잠실마을, 부렴마을이 있었다. 마을주민들은 밀이나 메밀, 무, 배추, 땅콩, 수박 등을 재배해 서울에 내다팔았다. 새내마을은 100여 가구가 넘는 큰 마을이었고, 잠실마을은 30여 가구가 모여 살았다. 부리도에 있었던 부렴마을은 5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유서 깊은 동네였다. 음력 시월 초하루가 되면 부렴마을 사람들은 500년 묵은 뽕나무 앞에 모여 상신제(桑神祭)를 지냈다.

잠실섬, 부리도, 무동도는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자주 물에 잠겼다. 그래서 '메기가 하품을 하거나, 개미가 침만 뱉어도 물에 잠긴다'는 말이 생겨났다. 여름철에 홍수가 나면 이곳 주민들은 배를 타고 서울 광진구 자양동이나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로 대피하는 게 연례행사였다.

잠실섬, 육지가 되다

1971년 4월 16일 잠실섬 매립을 위한 물막이 공사가 끝났다. 이로써 한강의 본류인 송파강은 사라지고 잠실섬은 육지가 되었다. 물막이 공사 결과 송파강의 일부는 석촌호수가 되었다.
▲ 석촌호수 1971년 4월 16일 잠실섬 매립을 위한 물막이 공사가 끝났다. 이로써 한강의 본류인 송파강은 사라지고 잠실섬은 육지가 되었다. 물막이 공사 결과 송파강의 일부는 석촌호수가 되었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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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잠실섬 일대를 매립하기 위해 '잠실지구 구획정리 사업 공유수면 매립 인가신청서'를 건설부에 제출한 것은 1969년 1월 21일이다. 건설부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회신을 미루다가 1970년 7월 23일 "이 사업은 서울시가 직접 시행하기보다는 민자사업으로 시행함이 바람직하다"는 답변과 함께 신청서를 반려했다.

1971년은 선거의 해였다. 그해 4월 27일은 7대 대통령 선거일이었고, 5월 28일은 8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양대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경제기획원 부총리 김학렬은 건설사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고, 그 대가로 잠실구획정리사업을 허가해줬다.

잠실지구 매립공사는 정치자금을 상납한 현대건설, 대림산업, 극동건설, 삼부토건, 동아건설에 돌아갔다. 이들 건설사들은 공동으로 출자해 만든 경인개발(주) 명의로 1970년 11월 3일 '잠실지구 매립인가 신청서'를 서울시에 제출, 이듬해 2월 1일 건설부로부터 사업허가를 받아냈다.

물막이 공사는 1971년 2월 17일 시작됐다. 잠실섬 북쪽의 신천강을 넓히고, 남쪽의 송파강을 막아 강의 흐름을 바꾸는 공사였다. 공사를 쉽게 마무리하기 위해 1971년 4월 15일 오후 4시부터 12시간 동안 청평댐의 방류를 중단해 한강의 유속을 늦추고, 수위를 20cm가량 낮추었다.

1971년 4월 16일 오전 10시 물막이 공사가 끝났다. 잠실섬 위쪽으로 흐르던 신천강의 폭을 200m 확장하는 하천절개공사에는 연인원 2만 6천 명의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이로써 한강의 본류인 송파강은 사라지고 잠실섬은 육지가 됐다. 그런데 물막이 공사는 행정착오로 1971년 6월 19일에야 실시계획 인가가 난 불법적인 것이었다.

물막이 공사가 끝나자 공유수면 매립공사와 잠실지구 구획정리사업이 동시에 시행됐다. 구획정리사업의 동시 시행은 서울시의 주장이 받아들여 진 결과였다. 건설부는 1971년 5월 5일 공유수면 매립지구를 포함한 잠실지구 935만5,311㎡를 구획정리지구로 지정했다. 그런 다음 6월 11일 구획정리사업 시행 명령(건설부 공고 제49호)을 내렸다.

구획정리사업은 1971년 6월 19일 시작됐다. 현대, 대림, 극동, 삼부, 동아건설이 공동출자한 잠실개발(주)이 매립공사의 권리 일체를 승계해 구획정리사업을 시공했다. 공유수면 매립공사는 3년 계획으로 1974년 6월 19일 준공을 목표로 했으나 예기치 않은 문제에 직면했다. 하천부지를 메울 흙이 태부족이었던 것이다. 흙이 부족하자 매립공사는 두 차례나 설계 변경됐고, 그때마다 서울시는 공사 면적을 축소해 인가했다.

잠실개발(주)은 부족한 흙을 보충하기 위해 잠실섬 인근의 몽촌토성을 헐자고 서울시에 요청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몽촌토성이 한성백제의 유적이라는 사실을 이유로 허가하지 않았다. 부족한 흙은 약 2년간 시민들이 배출한 연탄재가 주종인 쓰레기로 대신했다. 매립공사는 연탄재와 쓰레기로 1차 매립한 다음 서울시내 건설공사 현장에서 배출된 흙을 가져와 복토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잠실지구 공유수면 매립공사는 두 차례에 걸쳐 완공됐다. 1977년 3월 9일과 1978년 6월 29일이다. 매립된 총면적은 75만 3398평으로 이중 10만 8682평은 제방 및 도로용지로 국유화됐고, 나머지 64만 4716평은 매립자인 잠실개발(주)에 귀속됐다.

개발의 신천지가 된 잠실

잠실 5단지는 아파트공화국 대한민국의 주택 건설사에 하나의 획을 그었다. 잠실 5단지는 23평형과 25평형으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형 평수였다.
▲ 잠실5단지 아파트 잠실 5단지는 아파트공화국 대한민국의 주택 건설사에 하나의 획을 그었다. 잠실 5단지는 23평형과 25평형으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형 평수였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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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벽해라는 말 그대로 뽕밭이었던 잠실섬은 개발의 신천지가 됐다. 잠실지구 개발사업은 1973년 대통령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잠실지구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되면서 시작됐다. 잠실지구종합개발계획은 잠실섬 일대 340만 평의 대지에 잠실주공 1~5단지와 잠실종합운동장을 건설하는 것이 골자였다.

특기할 것은 잠실지구사업이 근린주구론(近隣住區論)에 기초해 수립됐다는 사실이다. 근린주구론은 미국의 도시계획가 페리(Clarence Arthur Perry)가 주장한 근린단위(Neighborhood Unit)이론에 따른 것이다. 모든 가족들은 자신의 생활권역에서 공공시설과 환경조건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근린단위이론의 요지이다.

근린단위이론의 여섯 가지 내용은 초등학교가 입지할 수 있는 규모의 확보와 편리한 접근성, 적당한 규모의 놀이공간과 구매시설의 확보, 자동차로부터 안전한 생활영역의 확보와 도로망의 구축 등이다.

대한주택공사가 시공한 잠실 1~4단지 기공식은 1975년 2월 6일 열렸다. 1차 오일쇼크의 여파가 한창이던 그해 4월 대통령 박정희는 대한주택공사 사장에 양택식 전 서울시장을 임명했다. 양택식은 부임과 함께 잠실단지건설본부를 설치하고 잠실 1~4단지를 연내에 완공하기 위해 '180일 작전'을 전개했다. 마치 전쟁과도 같은 속도전을 펼친 결과 잠실주공 1~4단지는 그해 말 완공될 수 있었다.

잠실 1~4단지 건설 공사에는 연인원 280만 명의 노동자가 동원됐다. 1~4단지는 5~6층 높이의 연탄 난방 아파트로 총 1만 1660세대 규모였다. 이즈음 서울시도 119개동 4520세대의 잠실시영아파트 건설에 매진했다. 잠실시영아파트는 5~6층 높이의 13평형 아파트로 불량 주택에 살던 철거민들에게 분양될 예정이었다.

1976년 8월 착공된 잠실 5단지는 아파트공화국 대한민국의 주택 건설사에 하나의 획을 그었다. 잠실 5단지는 23평형과 25평형으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형 평수였다. 단지의 규모면에서도 1~4단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3단지가 5만 3828평, 4단지가 4만 2249평인데 비해 5단지는 9만 8815평이었다.

넓은 대지 위에 건설된 5단지는 아파트 동과 동의 이격거리가 70m로 1~4단지 40m에 비해 일조권이 좋았다. 또한 잠실 5단지는 그동안 12층까지 건설 가능했던 아파트단지들과는 달리 15층으로 지어진 고층 아파트단지였다.

1978년 11월 5단지의 완공과 함께 잠실주공 1~5단지 종합준공식이 개최됐다. 3년 만에 완공된 잠실아파트 단지는 단일 업체가 건설한 주택공사로는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초대형 공사였다. 오일쇼크의 여파 속에 지어진 잠실 1~5단지는 주거 환경 개선이라는 국가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이 총동원된 사업이었다.

그럼에도 잠실아파트단지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근린주구이론에 기초한 잠실지구 아파트단지는 자족 가능한 단지들의 병렬적인 집합이었다. 각 단지는 독립된 생활권을 이루지만 다른 단지와는 단절된 폐쇄적인 구조였다. 다시 말해 잠실 아파트단지는 이웃과 이웃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얼굴도 모른 채 살아가는 도시민의 파편화된 주거공간의 본격적인 등장을 의미했다. 이후 잠실 1~5단지는 강동구 둔촌단지, 강남구 개포단지, 경기도 과천시 주공 아파트단지의 모델이 되었다.

잠실 1~5단지는 파편화된 구조 속에 갇혀 사는 도시민들의 서글픈 현실을 보여 준다. 그래서 작가 조세희는 상전벽해의 땅 잠실에는 민들레조차 살지 못하는, 오직 시멘트와 철근에 의해 유지되는 척박한 사막과 같은 곳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잠실은 모래로 만들어진 동네이다. 모래땅에 모래 아파트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 둑을 쌓고 그 위에 아스팔트를 깔아 도로를 내기 전에는 범람한 강물이 여름 잠실을 덮쳐누르곤 했었다. 모래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 (중략) 잠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시멘트와 철근이다. 시멘트와 철근을 빼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모래만 남아 흩날리게 될 것이다. 모래는 모래끼리 아무리 뭉치려고 해도 뭉치지 못한다." - 조세희, <민들레는 없다>, [시간여행], 문학과지성사, 1983년,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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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봉 시민기자는 <오마이뉴스>에 매달 1만원 이상씩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10만인클럽 회원입니다.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 주십시오. 휴대폰 010-3270-3828로 전화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끝까지 취재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강남, #강남공화국, #잠실섬, #부리도, #잠실5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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