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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들어 미국경제는 뚜렷한 회복세를 보였다. 물가는 4%대를 유지했고, 실질성장률은 상승곡선을 그었다. 그런데 문제는 쌍둥이 적자(재정적자와 무역적자)였다. 레이거노믹스에 기초한 감세정책으로 재정적자는 누적됐고, 제조업의 경쟁력이 일본과 서독(독일)에 뒤쳐지면서 무역적자가 심화됐다.

쌍둥이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미국이 꺼내든 카드는 패권국이라는 지위를 활용한 강압적인 조치였다. 미국은 달러화의 가치를 절하하기 위해 G5(미·일·독·영·프)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참여하는 회의를 소집했다.

때는 1985년 9월 22일 뉴욕의 플라자호텔에서 G5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모였다. 불과 20분 만에 끝난 이날 회의에서 플라자합의(Plaza Agreement)가 채택됐다. 플라자합의의 핵심 내용은 일본 엔화를 평가 절상하여, 미국과 일본의 무역 역조를 시정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플라자합의를 통해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이기 위해 달러화의 평가절하를 요구했다. 이 같은 미국의 저달러 정책의 강력한 신호음을 접수한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달러를 매각하고 엔화와 마르크화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달러화의 가치는 급락했고 엔화와 마르크화의 가치는 급등했다.

플라자합의 당시 미국의 장기금리는 10.8%였고, 일본의 금리는 5.8%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 금융시장의 자본은 금리가 높은 미국으로 유입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달러화의 약세를 실현하기 위해 금리를 급격하게 낮췄고, 그 영향으로 국제 금융시장에 저금리 기조가 형성됐다.

이런 가운데 1980년대 내내 국제 유가는 저유가 기조를 유지했다. 저유가 기조는 미국의 대 소련 포위 전략에서 비롯됐다. 1981년 출범한 레이건 행정부는 소련을 압박하기 위해 강력한 포위 정책을 추진하여 소련의 주요 수출품인 석유와 천연가스의 수출을 철저히 봉쇄하는 한편, 사우디아라비아와 공조 하에 국제적인 저유가 공세를 펼쳤다. 이 같은 국제 정세의 흐름 속에서 1980년대 중후반 3저현상(저달러, 저금리, 저유가)이 나타났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

1980년대 중후반 한국경제는 3저 현상으로 호황을 구가했다.3저현상에 힘입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1986년 10.6%, 1987년 11.1%, 1988년 10.6%에 달하는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사진은 대한민국박물관에 전시된 1인당 국내총생산량 이미지를 촬영했다.
▲ 1인당 국내총생산량(GDP) 1980년대 중후반 한국경제는 3저 현상으로 호황을 구가했다.3저현상에 힘입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1986년 10.6%, 1987년 11.1%, 1988년 10.6%에 달하는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사진은 대한민국박물관에 전시된 1인당 국내총생산량 이미지를 촬영했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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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저현상으로 한국경제는 날개를 달았다. 한국의 주요 수입품인 원유가격은 낮았고, 국제 금융시장에서 금리와 달러가 약세를 보이면서 수출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 덕분에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1986년 10.6%, 1987년 11.1%, 1988년 10.6%에 달하는 고공행진을 이어갈 수 있었다. 1980년 1592달러였던 1인당 GNP는 1987년 3110달러를 달성했고, 수출 호조에 힘입어 경상수지는 1986년 46억 달러, 1987년 98억 달러, 1988년 141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특수에 힘입어 주식시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1985년 말 163포인트이던 종합주가지수는 1986년 272포인트, 1987년 525포인트, 1988년 907포인트를 기록, 불과 3년 만에 5.5배 상승했다. 덕분에 주식을 매입한 투자가들은 매년 70~90%에 달하는 높은 배당을 받을 수 있었다.

3저 현상으로 전대미문의 특수를 누리던 198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는 정치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 이미지 촬영.
▲ 민주화의 열기로 숨가빴던 1987년 3저 현상으로 전대미문의 특수를 누리던 198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는 정치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 이미지 촬영.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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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시의 활황 속에서 1987년 3월 20일 사상 처음으로 하루 주식거래량이 1억 주를 돌파했다. 과열 자제를 외치던 조선일보는 그해 5월 24일자부터 주식시세표를 게재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신문에 실린 주식시세표를 보면서 사람들은 일확천금을 꾸기 시작했고, 증권사 직원들은 샐러리맨의 우상이 되었다.

"강남 전철역에 위치한 M살롱은 객실이 24개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룸살롱 중의 하나다. 3층짜리 빌딩의 지하층과 1~2층을 10여억 원을 들여 초호화판으로 꾸몄다. 호스티스만 2백 명에 이른다는 얘기고 보면 이곳을 찾는 손님들의 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M살롱과 같은 고급 룸살롱은 테헤란로 주변 이외에도 압구정동, 신사동, 방배동, 서초동 등 강남지역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번창하고 있다." - 송양민, '2~3년 새 부쩍 는 향락 업소', 조선일보, 1986. 7. 30. 3면

그랬다. 전대미문의 호황 속에 강남의 유흥가는 불야성을 이뤘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1986년 8월 14일 밤 10시 30분께 강남구 역삼동 소재 서진회관이라는 룸살롱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조직폭력배들의 알력과 분쟁에서 비롯된 심야의 칼부림으로 네 명이 살해된 서진룸살롱살인 사건은 한국 사회의 폭력성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호황으로 달뜬 분위기에 편승하여 강남을 소재로 한 대중가요들이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 '영동 블루스', '신사동 그 사람', 김수희의 '멍에', 문희옥의 '사랑의 거리' 등의 대중가요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강남을 배경으로 한 대중가요의 유행은 서울 도심의 권력 지형이 종로, 무교동, 명동에서 강남으로 옮겨 갔음을 의미했다.

이즈음 한국사회는 정치적 격변기였다. 1985년 2월 12일 치러진 제12대 총선에서 신민당(신한민주당)의 돌풍을 시작으로 서울 미문화원점거농성(1985. 2, 23~26), 5.3인천사태(1986. 5. 3), 박종철 고문치사사건(1987. 1. 14), 전두환의 4.13호헌조치(1987. 4. 13), 6월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 제13대 대선(1987. 12. 16)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민주화의 요구가 역동적으로 터져 나왔다.

주택 200만호 건설 공약

노태우 정권은 주택 200만호 건설 정책의 일환으로 서울에서 1시간 이내의
 거리에 위한 분당, 평촌, 일산, 산본, 중동에 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 마두역에서 바라 본 일산 아파트단지 노태우 정권은 주택 200만호 건설 정책의 일환으로 서울에서 1시간 이내의 거리에 위한 분당, 평촌, 일산, 산본, 중동에 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 강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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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표방하며 대통령에 취임한 노태우는 1988년 5월 25일 주택 200만호 건설 정책을 공식 발표했다. 주택 200만호는 당시 서울시 전체 주택수와 맞먹는 물량이었다. 이처럼 많은 집을 집권 5년 안에 짓는다는 것은 엄청난 비용과 자재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주택 200만호 건설 정책은 6월항쟁 직후 급진화된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민주화 투쟁을 주도한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가 한창 집을 살 시기였고, 386세대(1960년대생) 또한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면서 주택 수요층이 두터워졌다. 여기에 더해 핵가족화에 따른 가구 수의 증가로 주택 수요가 늘어났다.

200만호를 짓기 위해 정부는 다음과 같은 세부 계획을 수립했다. 수도권에 90만호를 짓고 나머지 물량은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지에 건설하는 것을 골자로 노동자와 영세민을 위한 영구임대주택 25만호와 근로복지주택 15만호, 사원임대주택 10만호를 건설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민간 건설업자의 주택 건설을 지원하기 위해 저리융자와 자재공급 등 종합적인 지원책도 마련됐다.

노태우 정권은 수도권에 90만호의 주택을 짓기 위해 5개의 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1989년 4월 27일 발표된 5개의 신도시는 분당, 평촌, 일산, 산본, 중동으로 서울에서 1시간 이내의 거리에 위치한 곳이었다. 5개 신도시에 건설될 아파트 물량은 총 29만2천호로 당시 강남 아파트 23만호보다 많고, 서울시 전체 아파트 42만호의 69%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5개 신도시 가운데 강남에 인접한 분당의 경우 '천당 아래 분당'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1989년 11월 분당 시범단지 아파트가 처음으로 분양을 시작하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분당 신도시의 아파트 분양가는 평당 152만원~181만원이었다. 당시 강남 아파트의 평당 가격은 480만원 정도로 1억5천만원을 호가하는 31평형 아파트를 팔면 분당에 53평형 아파트(9300만 원)를 사고도 5700만 원이 남았다.

서울의 주택보급률이 62%에 불과하던 당시 상황에서 신도시의 아파트 분양 열기는 내 집 마련을 위한 실수요와 투기성 가수요가 뒤엉키면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한 1980~1987년 연평균 10.5%였던 지가 상승률은 1988년 27.5%, 1989년 32.0%, 1990년 20.6%로 급등했다. 부동산시장이 들썩이자 물가가 상승하면서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더욱 팍팍해졌다.

부동산시장이 들썩이자 전세와 월세도 덩달아 뛰었다. 세입자 보호를 위해 주택임대차보호법이 개정(1989. 12)되자 그에 따른 여파가 더해졌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의 개정으로 전월세 기간이 1년에서 2년으로 늘어나자 집주인들이 2년 치 보증금을 한꺼번에 올리면서 전월세의 상승을 부채질했다.

한바탕의 부동산 광풍이 불어 닥친 1989년 겨울과 1990년 봄은 삭막하고 흉흉했다. 집 없는 세입자들은 반지하방과 달동네를 전전해야 했고, 더러는 서울 변두리 동네에서 경기도로 이사를 가야 했다. 치솟는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 1990년 봄에만 17명의 가장이 목숨을 끊었다. 이런 아픔과 눈물 속에서 대통령 노태우의 주택 2백만호 건설 공약은 애초 계획보다 1년 앞선 1991년 말 214만호를 지으면서 완료되었다.

정경유착의 검은 그림자, 수서비리사건

수서비리사건은 한보주택 회장 정태수의 검은 야욕에서 비롯됐다. 강남구 수서동과 일원동 일대의 토지를 한보주택이 사들인 것은 1988년 4월부터 해가 바뀐 1989년 11월까지다. 임원들을 동원하여 수서지구에 5만135평의 땅을 매입한 한보주택은 예기치 않은 난관에 봉착했다. 녹지지역으로 지정된 수서지구는 공영주택 공급을 위한 공공 개발만 가능한 곳으로, 민간건설사의 택지개발은 원천적으로 불가했다.

수서지구에 아파트를 건설할 수 있는 방안 마련에 골몰한 정태수는 직장 단위의 무주택자 조합을 결성, 한보주택과 공동으로 85㎡ 이하 아파트를 건설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1989년 2월 한보주택은 강남구 수서지구에 아파트 입주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26개 주택조합을 결성했다. 직장 단위로 결성된 주택조합은 경제기획원, 농림수산부, 한국산업은행 등 26개 기관의 임직원이 조합원이었다.

주택조합이 결성되자 정태수는 주도면밀한 로비를 시작했다. 26개 주택조합원들을 동원하여 수서지구에 아파트를 지을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서울시에 민원을 넣었다. 민원이 접수되자 서울시는 도시계획상 녹지지역에 해당하는 수서지구는 공영개발방식 말고는 민간 조합의 택지개발은 불가하다고 통보했다. 거듭된 불가 통보를 받자 정태수는 서울시는 물론 청와대, 건설부, 여야 국회의원, 국회 건설위 등 모든 권력 기관의 실세들을 대상으로 집요하고 전방위적인 로비를 벌였다.

청와대와 국회의 요청과 압력에도 서울시장 고건은 법과 규정에 어긋난다며 택지개발을 허가하지 않았다. 미운털이 박힌 고건은 1990년 12월 27일 서울시장에서 해임됐고, 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지낸 박세직이 서울시장에 임명되면서 한보주택의 택지개발에 청신호가 켜졌다.

하키협회장을 지낸 정태수와 가까웠던 박세직은 1991년 1월 20일 한보주택과 26개 주택조합의 청원을 수용하여 수서지구 3만5500평에 아파트 건설을 허가한다고 결제했다. 하루가 지난 1월 21일 서울시 부시장 윤백영은 기자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발표한다.

"공공 개발한 택지를 특정 주택조합에 공급함으로써 무주택 서민용 아파트 공급에 차질이 예상되나, 건설부에서 '공급이 가능하다'는 유권해석을 내린데다 국회 건설위원회가 주택조합원들의 청원을 받아들인 점을 감안해 특별 공급키로 했다."

정태수의 전방위적이고 집요한 로비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기적을 연출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반전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서울시가 '현행법상 불가능할 뿐 아니라 특별공급 자체가 불법'이라는 입장을 바꿔 택지개발을 허가하자 비난 여론이 쏟아졌다.

여론이 들끓자 대통령 노태우는 마지못해 감사원과 검찰에 감사와 수사를 지시했다. 비리의 몸통이 수사를 지시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하에서 면피용 감사는 5일 만에 끝났고, 수사는 10일 만에 종결됐다. 1991년 2월 16일 검찰은 청와대 문화체육비서관 장병조, 민자당 국회의원 이태섭, 오용운, 김동주, 평민당 국회의원 이원배, 김태식, 한보주택 회장 정태수, 건교부 국장 이규황, 농협인력개발부 서기 고진석 등 9명을 구속한다고 발표했다.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서울시장 박세직과 부시장 윤백영이 경질됐다.

이렇게 사건은 일단락됐으나 실체가 밝혀졌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건의 전모는 1995년 11월 16일 전 대통령 노태우가 비자금 혐의로 구속되면서 드러났다. 재판부의 판결에 따르면 1989년 12월부터 1990년 11월까지 대통령 노태우는 청와대 안가에서 한보주택 회장 정태수로부터 네 차례에 걸쳐 수서지구 택지분양을 대가로 150억원의 뇌물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대 도로를 뚫은 '길 대통령'이라면 나는 주택을 짓는 '집 대통령'으로 남고 싶다." - 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 <대한민국 부동산 40년>, 129~130쪽

평소 이 말을 자주했던 어느 '집 대통령'의 실체는 거액의 뇌물을 받고 공공의 택지를 불법적으로 허가한 비리의 몸통에 다름 아니었다.

덧붙이는 글 |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3저호황, #수서비리사건, #정태수, #노태우, #주택200만호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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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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