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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5일,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가즈오 이시구로. 익숙한 이름이 아닌 데다 일본식 작명으로 들리길래, 무라카미 하루키를 제치고 다른 일본인 작가가 수상한 것인가 하며 프로필을 읽어 내려갔더니 반가운 작품이 눈에 띈다.

<남아 있는 나날>과 <나를 떠나지 마>였는데, 이 둘 모두 '내가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작품이었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남아 있는 나날>을 읽으면서 20년 만에 영화를 보는 것으로 올해 노벨재단의 선택을 음미해 보고 싶어졌다.

'영화가 이런 얘기였나?'

갑자기 싸늘해진 공기를 느끼며 일어난 일요일 아침, 느지막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읽다가 접어둔 책을 마무리한다. 1, 2차 세계대전을 관통하며 영국의 명문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충직한 집사인 스티븐스의 회상과 함께 읽어내려가다 보니,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음에도 묵직한 상념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남아 있는 나날>
 <남아 있는 나날>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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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대학생이던 스무 살 즈음에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 1994)을 보았던 기억으로는, 포스터에 등장한 두 명의 명배우인 안소니 홉킨스(스티븐스 집사 역)와 엠마 톰슨 (켄턴 양)의 실패한 로맨스로 단순하게 읽혔을 뿐인데 말이다.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나, 20여 년이 지나서 읽어낸 글에선 다양한 인물들이 느끼는 복잡한 층위의 감정들이 촘촘하게 얽혀 있었다. 이십대에는 단순했던 것들이 이렇게 복잡해진 이유가 궁금해졌다. 마음이 급하다.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

얼른 인터넷으로 영화 파일을 구매하고, 책을 한쪽으로 물러둔 채 영화를 다시 돌려본다. 같은 인물들이 겪는 사건들이지만, 기술하는 관점의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명료함이 더해졌고, 인물들 개개인의 관점이 추가됨으로써 스티븐스에 의해 '재가공' 되었던 기억은, 보다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어딘가 뭉근하게 행간을 자극하는 기분은 이시구로의 소설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문장의 맛'이지만, 갈등이 분명해지면서 감독이 누구의 인생 위에 호의를 보이는지도 확실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스물의 나를 쉽게 지나쳤던 '이야기의 본질'은, 마흔의 나에겐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 채 끝나버렸다.

'인생을 걸고 당신이 추구해 온 삶의 가치에 의문이 든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스티븐스는 영국의 귀족인 달링턴 경의 집사이다. 그는 최고의 집사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헤이스 소사이어티'를 동경하며, 달링턴 홀의 스무 명 남짓한 직원들과 함께 최고의 서비스로 그의 주인과 주인의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주인들의 대화는 유심히 듣지도 않고 들을 생각도 없으며, 그의 판단은 오로지 자신의 직무와 사명이라는 틀 안에만 고여있다.

그에게는 아버지의 죽음도 자신에 대한 친밀한 관심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오로지 '최고의 집사가 되는 것'만을 목표로 인생을 살아왔으며, 매우 성공적으로 끝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를 오랫동안 애정으로 지켜본 켄턴 양의 편지로 인해 떠난 6일간의 짧은 여행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지금와서 돌아보면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이십대의 나는 '1등'을 하고 싶었다.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칭찬을 받고 싶었고, 그렇게 누군가에게 인정받은 것으로 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으며 결과는 꽤 성공적이었다. 이런 스무 살의 내가 바라본 스티븐스의 삶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었고, 그가 최고의 집사였기 때문에 주인공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감정이입했다.

당시 영화에 대한 짧은 소개글에서도 '영국 중년 집사의 사랑을 그린 로맨틱 드라마'였으니, 내가 이시구로의 인물들이 겪어낸 복잡한 회한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것도 이상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나이가 되어서 다시 훔쳐본 그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무조건 열심히 내가 할 일을 한다는 것으로 '올바른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야기가 주로 다루는 시기는 1,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영국이다 보니, 공간적으로는 달링턴 홀이라는 저택에 갇혀 있지만 '이곳에서 세상을 볼 수 있었다'라는 스티븐스의 말처럼, 다양한 역사적인 선택이 공간 안으로 자연스럽게 얽혀진다.

달링턴 경의 노력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했음을 세월이 입증해 주었다고
해서, 어떤 면으로든 어떻게 내가 비난받아야 한단 말인가? 내가 그분을 모셔 온 세월을 통틀어, 증거를 저울질하고 나아갈 길을 판단한 것은 바로 그분 자신이었으며, 나는 다만 나 자신이 전문 분야에서 지극히 온당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가히 '일등급'이라 인정받을 만한 수준에서 내 능력 닿는 데까지 직무를 수행한 것밖에 없다. 오늘날 나리의 삶과 업적이 안쓰러운 헛수고쯤으로 여겨진다 해도 내 탓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에게도 응분의 가책이나 수치를 느끼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 p.251~252

작가는 '듣기만 할 뿐 판단하지 않는' 스티븐스의 태도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달링턴 경의 충직한 종복으로서 그가 했던 일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달링턴 경이 '평화'를 위해 했던 행동들이 어떻게 나치 독일에 이용되었으며, 영국을 전쟁에 끌어들였는지를 보여주면서 스티븐스에게 계속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당신의 주인이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판단은 무엇인가?'

스티븐스는 끝내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주인이 원하는 것을 '충실하게' 도와주는 것이 그의 '업무'였으며, 그것을 제대로 해낸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굳이 아이히만이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의 삶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만나는 수많은 '직업인'들의 자세가 스티븐스의 태도를 종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되는 장면이다.

스티븐스의 갈등은 그가 켄턴 양을 찾아 세상으로 나오면서 시작되며, 작가는 그가 떠나는 6일간의 짧은 여행에서 만나는 '달링턴 홀 외부의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한 감정의 변화를 조심스럽지만 끈질기게 그려낸다.

인생의 황혼에서 떠난 여행에서야 돌아보게 된 자신의 삶과 삶에 대한 의문을, 과연 당신이라면 견뎌낼 수 있을까? 내면적인 갈등이 그 자신의 독백으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이시구로의 집요한 묘사가 책을 읽는 내내 계속 괴로웠던 이유도, 이런 갈등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갈등을 '시대적인 특수성'때문이라며 변명할 수도 있다. 스티븐스가 거쳐온 1930년대는 계급의 붕괴와 함께 시민으로 권력이 이동되는 전환기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가치관이 새로운 시대에 대한 요구 사항과 끝없이 충돌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삶은 더욱 더 복잡하게 분화된 다양한 가치 기준들로 훨씬 더 복잡해졌으며, 우리는 매일매일의 삶에서 충돌하는 가치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한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그건 비겁한 짓이었어요, 스티븐스 씨. 비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어요. 제가 나간들 어디로 갈 수 있었겠어요? ...(중략)... 물론, 조만간 새 일자리가 나타날 거라고 스스로 위로해 보기도 했죠. 하지만 정말 두려웠어요, 스티븐스 씨. 떠난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저기 바깥세상에서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고 관심도 가져 주지 않는다는 현실을 절감하고 있는 내 모습만 떠올랐어요. 그 수준이에요. 나의 고상한 원칙들을 다 합쳐본들 그 정도밖에 안 되죠. 나 자신이 너무 수치스러워요. 하지만 끝내 떠날 수 없었어요, 스티븐스 씨.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 p.187~188

(독일 측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유태인에 대한 차별을 받아들인 달링턴 경의 뜻을 따르며, 같이 일하던 하녀를 해고하는 문제로 그와 대립하던 켄턴 양이'비겁함'에 대해 얘기한다. 그녀는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비겁했다고 자책한다. 그녀의 모습이 내 지금의 비겁함이 겹쳐지니 책 속의 문장은 나의 목소리가 되어 귓가를 울린다.

책을 덮으면서 느꼈던 묵직함을 쉽게 떨쳐낼 수는 없을 것만 같다. 나는 이미 '달링턴 홀'로 상징되는 안전한 세계를 벗어나 삶이 던지는 무거운 질문들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더 이상은 스무 살에 원했던 것처럼 단순한 기준만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생의 끝자락에서야 스티븐스가 보게 된 것들을 그보다는 일찍 알아챈 것은 다행스럽지만, 마흔의 나는 여전히 '안전한 세계'에서 오직 최고가 되는 것을 욕망하던 스무 살을 그리워하며 후회한다.

"하지만 이따금 한없이 처량해지는 순간이 없다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얼마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가.'하고 자책하게 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지금과 다른 삶, 어쩌면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더 나은' 삶을 생각하게 되지요. ...(중략)... 하긴 이제와서 시간을 거꾸로 돌릴 방법도 없으니까요. 사람이 과거의 가능성에만 매달려 살 수는 없는 겁니다. 지금 가진 것도 그 못지않게 좋다, 아니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감사해야 하는 거죠." - p.293~294

스무 해가 지나 다시 만난 <남아 있는 나날>은 이십대의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을 풍성하게 던져 주었고, 그들의 모든 인생에서 내가 보인다. 그들의 삶이 갖는 고민들이 나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서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나의 삶은 어때야 하는지 쉽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 과연, 나에게 '남아 있는 나날'은 어떤 모습일까?

책정보: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송은경 옮김 (민음사)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민음사(2010)


태그:#오늘날의 책읽기, #2017년 노벨 문학상,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있는 나날, #안소니 홉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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