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너무도 절묘하게 닮은 양국의 역사

최근 들어 베트남과 인적 교류를 비롯하여 양국 관계가 부쩍 가까워지고 있다. 사실 우리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는 그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고대부터 현재까지 너무도 절묘하게 닮아있다.

중국은 항상 자신들의 분열을 종식하고 통일을 실현시키게 되면 어김없이 한반도와 베트남에 영향력 확대를 기도하였다. 베트남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중국과의 인접국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오랜 기간 동안 중국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베트남은 기원전 3세기부터 중국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았다. 베트남은 광동(廣東) 지방에 중심을 두고 중국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국가인 남월(南越)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남월의 건국자 조타(趙佗)가 중국인이었지만 기층민들은 대부분 월족이었고 지도층에도 월족이 많았다. 기원전 111년에 한나라 무제가 남월을 병합했는데, 당시 한나라는 북베트남 지역에 9개의 군, 즉 한9군을 설치하였다. 공교롭게도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도 한 무제의 공격을 받아 북한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그 뒤 7세기에 들어 중국의 남북조시대가 끝나고 수나라가 대륙을 통일하자 수나라는 고구려와 베트남 정복에 나서 고구려 공격에는 실패했지만 베트남 공격은 성공을 거뒀다. 그 뒤 679년 당나라는 북베트남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켜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중국에 대한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

이후 베트남은 불교가 융성하게 되었고, 3국통일을 이룬 신라도 불교국가라 할 만큼 불교가 융성하였다. 대승불교라는 점도 양측이 동일하다. 당시까지 베트남이 한국에 비해 중국의 직접 지배를 더욱 오랫동안 받은 것은 당시 베트남이 지리적으로 중국과 더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당나라 말기에 베트남에는 국가적 주체의식을 가진 상류 계층이 형성되었다. 중국이 5대10국 시대에 들어 혼란에 접어들자 939년 베트남은 드디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한국 역사에서 중국 관계에서 가장 독립적이었던 고려 왕조가 세워진 것은 이 시기와 비슷한 918년이었다.

물론 당시 베트남은 중국과의 형식적인 조공 관계는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트남에 딘보린(丁部領)이라는 민족 영웅이 출현하면서 전국을 통일하고 968년에는 황제를 칭하였다. 당시 고려와 베트남이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5대10국 시대의 혼란기를 겪었고 송나라의 통일 이후에도 송나라가 문치국가로서 군사적으로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송나라는 베트남을 두 번 침략했지만 베트남의 매서운 반격에 모두 패퇴했다.

이후 중국 대륙에 세계 최강 원나라가 건국되었는데, 원나라는 하노이를 세 번이나 점령했지만 베트남의 완강한 조항에 부딪쳐 매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직접 지배 대신 조공 관계 수립의 타협이 이뤄졌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까지 이어졌다.

특히 외세 침략을 받으면서 베트남에는 민족의식이 형성되었고, 몽골의 거센 침략을 받으면서 건국 신화를 탄생시켰다. 우리 한민족도 몽골의 침략을 받은 13세기에 민족적 각성이 일어나면서 일연 스님이 단군신화를 정리해냈다.

명나라의 대외 팽창기였던 영락제 때인 1406년 베트남이 명나라에 조공관계를 인정하지 않자 영락제는 군사를 이끌고 베트남 공격에 나서 하노이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레 러이의 영도 하에 20년 동안 독립전쟁이 전개되었고, 수세에 몰린 명나라 군대는 마침내 철수하게 되었다. 대신 베트남은 중국과 형식적인 조공관계를 맺기로 하였다. 같은 시기 조선은 명나라에 대항하지 않고 스스로 조공관계를 인정했으므로 조공관계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가 베이징을 수도로 정한 뒤 베트남은 한국보다 베이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자주성을 견지할 수 있게 되었다. 베트남은 이때 나라 이름을 대월(大越)이라 불렀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다만 중국에 조공할 때는 스스로 왕으로 낮췄다.

한편 베트남은 오랜 기간 동안 자국 문자를 가지지 않고 한자를 사용해왔다. 예를 들어, 하노이는 한자로 "河內"이고 그 중국어 발음은 "허네이"다. 발음까지 중국어 혹은 우리 독음과 유사하다. 18세기에 이르러 베트남은 한자음을 빌어 구어를 옮겨 사용하는 '쯔놈(字喃)'이라는 자국 문자(우리나라의 이두와 같은 형태)를 만들었다. 이후 포교를 위해 베트남에 온 예수회 성직자들이 베트남 구어의 음을 라틴어의 알파벳으로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로마자로 표기하는 이 방식의 문자가 오늘날 베트남어의 표기 방식으로 되었다.

베트남과 한국의 유사성은 현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식민 통치를 받은 경험과 그 뒤 외세에 의한 남북 분단 역시 동일하다. 또한 슈퍼파워 강대국 미국이 고전을 면치 못했던 곳이 바로 한국과 베트남이었다. 6.25 전쟁은 미국이 최초로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전쟁이고, 베트남 전쟁에서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박정희 적폐를 딛고 우호와 미래로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일본에만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그것이 미국의 종속적 위상에 놓인 국가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이 벌인 비정상적 사건이기 때문에 양국 관계의 우호와 미래를 위하여 지난 과거에 대한 상응하는 반성은 필요하다.

특히 베트남과 우리나라는 상호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향후 미국이나 중국 등 주변 강대국에 대응하여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전략적 파트너가 될 수도 있다.

새로운 시대, 양국관계의 건강한 발전을 기대한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중국 푸단대학에서 국제관계학 박사를 받았고, 그간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등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해왔다. <변이 국회의원의 탄생>, <논어>, <도덕경>, <광주백서>, <사마천 사기 56>등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유신과 전두환정권에 반대해 수배, 구속된 바 있으며, 시민이 만들어가는 민주주의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