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거슨이 인정한 남자

존 스테인(John Stein)이라는 본명 대신 '조크(Jock)'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했던 스테인 감독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지역 명문클럽 셀틱FC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명성을 떨쳤다. 23년간 잉글랜드 EPL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이끌고 32개의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스승으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자존심이 강해 타 클럽 감독들과 기 싸움을 멈추지 않았던 퍼거슨도 과거 남성잡지 <GQ>와 단독 인터뷰에서 스테인을 회상하며 "스테인은 '1인 대학'이었다"며 그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음을 인정했다. 

손에는 곡괭이, 발엔 축구화

스테인 감독은 1992년 사우스 라나크셔주에 위치한 번뱅크라는 광신촌에서 태어났다. 대개의 지역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어린 시절부터 광산에서 석탄을 캤다. 이처럼 고된 노동의 힘겨움을 잊기 위해 스테인은 축구로 그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프로무대에 발을 들여놓은 건 스무 살이던 1942년 지역 클럽 알비온 로버스에 입단하면서부터다. 이때까지만 해도 스테인 감독은 주중엔 광부로 일하다 주말에는 축구 선수로 변신하는 '이중생활'을 지속했다.

곡괭이를 내려놓고 전업선수로 변신한 건 1950년 라넬리타운(웨일스)으로 건너간 직후부터다. 스테인 감독은 1년 뒤 1200파운드의 이적료에 스코틀랜드 명문 셀틱으로 이적해 1956년 현역 은퇴를 하기 전까지 주장 겸 주전 센터하프로 활약했다.

셀틱의 황금기를 구축하다

은퇴와 함께 셀틱의 리저브팀 감독으로 부임해 본격적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스테인 감독은 1960년 던펌린 애슬레틱 지휘봉을 잡으며 프로 무대에 입성한다. 리빌딩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그는 4개월 동안 승리가 없던 던펌린을 이끌고 1961년 스코티쉬컵 우승을 견인하며 환골탈태에 성공한다.

이후 그는 하이버니언을 거쳐 1965년 마침내 친정팀 셀틱의 지휘봉을 잡아 영광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다. 가톨릭 신자들이 주축이 되어 창단한 클럽의 배경 탓에 한때 '비(非)신자 감독'이라는 이유로 자격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부임하자마자 6주 만에 FA컵 우승을 일궈내 실력으로 논란을 잠재웠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듬해 정규리그와 FA컵, 리그컵을 모두 제패하며 '스코틀랜드 트레블'을 달성한 스테인 군단은 내친김에 유럽클럽대항전마저 거머쥐며 자국 리그를 넘어 유럽최강자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전술의 대가, 카테나치오를 격파하다

오늘날 스테인 감독은 '탁월한 전술가'로 기억된다. 4-2-4 시스템을 주력으로 사용한 그는 당시로선 생소했던 '공격형 풀백'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감독으로 알려졌다. 또한, 투톱을 수시로 미드필드 라인까지 내려 공간을 확보해 윙어의 적극적인 공격 가담을 주문했다.

스테인 감독의 전술적 역량이 가장 잘 드러났던 대회론 1966-1967시즌 유러피언컵(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꼽을 수 있다. 셀틱은 취리히, 낭트, 보이보디나, 두클라프라하 등을 제치고 결승에서 이탈리아 명문 인테르마저 꺾어 영국 클럽 중 최초로 유럽클럽대항전 정상에 우뚝 섰다.

결승전을 앞두고 축구전문가들은 카테나치오를 앞세운 인테르의 우세를 점쳤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셀틱은 유기적인 공격전술을 앞세워 무려 49차례의 슈팅을 기록하는 등 일방적인 우세 속에 2-1로 승리해 전 유럽을 놀라게 했다.

경기 직후 스코틀랜드 언론이 우승 멤버들에게 결승전이 열렸던 장소인 리스본의 이름을 따서 '리스본의 사자들'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도 이 때문이다.

클럽의 황금기를 이룬 스테인 감독의 발자취는 지금까지 전해진다. 홈구장 셀틱 파크의 서포터즈측 스탠드의 이름이 바로 '조크 스테인 스탠드'다. 13년간의 재임기간 중 유러피언컵을 포함해 25개의 우승트로피를 거머쥐며 황금기를 주도한 거장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품위를 잃지 않는 감독

셀틱에서 맛본 영광을 뒤로 한 스테인 감독은 1978년 리즈 유나이티드로 적을 옮겨 야심차게 잉글랜드 무대에 도전했으나 낮은 승률로 중도하차하고 만다. 그러자 스코틀랜드 협회 측에선 그에게 스코틀랜드 국가대표 사령탑을 제안한다.

협회의 요청을 받아들인 스테인 감독은 당시 에버딘 감독이었던 알렉스 퍼거슨을 코치직으로 발탁, 1982 스페인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뤄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다음 멕시코 월드컵 대표팀 감독으로도 재임된다. 하지만 그는 웨일스와 예선 경기 도중 급성 심장질환으로 유명을 달리한다.

퍼거슨 감독은 2007년 펴낸 자서전에서 "후반 중반 들어서도 우리는 0-1로 지고 있었다. 하지만 스테인 감독은 '설령 우리가 지더라도 품위를 잃지 말자'고 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다행히 스코틀랜드는 후반 80분 동점골을 넣어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획득, 호주를 꺾고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뤘다.

스테인 감독은 진정 축구를 위해 태어난 감독이었다. 전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빨리 간파했고, 이를 과감히 실행했던 그의 실천력이 있었기에 스코틀랜드가 쉽사리 무시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생의 마지막을 축구와 함께 했던 스테인 감독. 죽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그는 진정한 '그라운드의 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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