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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박범신의 소설 <은교>에서 70대의 시인 이적요가 한 말이다. 새파랗게 어린 나는 소설 속 시인의 말을 '시니어클럽' 노동법 강의에서 매번 노인들에게 옮긴다.

그의 말처럼 나이가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죄가 아님에도 강의를 듣는 어르신들은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한다. 나이가 들어 노동능력이 떨어지고 그로 인해 소득이 줄어들어 가계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큰 이유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라 위로하고, 열심히 사신 어르신들의 노후를 국가가 보장해 주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함께 개탄한다. 그리고 늘어난 수명만큼 스스로를 부양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다시금 노동현장으로 내몰리는 그들에게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법을 알려드린다.

시니어클럽은 고령사회 어르신들의 일자리 창출과 사회참여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교육이나 구직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부천에서도 분기별로 30여 명의 고령 구직자를 상대로 '맞춤형 일자리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시니어클럽에서 어르신 구직자분들이 고령자 노동환경과 노동법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다.
▲ 시니어 클럽 노동법 강의 시니어클럽에서 어르신 구직자분들이 고령자 노동환경과 노동법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다.
ⓒ 이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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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형 일자리 사업'에 노동법 강좌가 포함된 것은 몇 해 전부터였다. 어르신들이 이른 은퇴 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자리는 지방자치단체의 공공일자리나 경비 근로, 식당보조, 운전 등이다. 대부분이 저임금에 열악한 근로조건의 직업들이다.

경비 근로의 경우 주·야간 맞교대로 24시간 일을 하지만 연장근로나 휴일근로에 대한 가산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가만히 앉아서 감시하는데 뭐가 힘드냐'는 논리인데 실제로는 택배, 순찰, 그리고 입주민의 끊이지 않는 민원에 잠시도 쉴 새 없이 일해야 한다.

이처럼 노인들은 노동인권 보호의 가장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 취약계층이다. 우리 사회 노인들이 처한 노동환경의 현실을 토론하고 노동인권을 보호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강의의 목표다. 목표는 거창하지만, 어르신들의 많이 일하는 직종과 관련된 근로기준법 조항을 함께 공부한다. 월급 떼이지 않고, 해고당하면 제대로 보상받고, 어르신들도 고용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꿀팁'을 드리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노동법을 공부하고도 어르신들은 써먹을 곳을 찾지 못한다. 지역사회의 노인 일자리 공급이 수요를 감당하기에 절대적으로 벅차기 때문이다. 그나마 어르신들이 일자리의 기회를 얻는 곳은 지방자치단체나 지역 공공기관의 공공일자리인데 대개 3개월에서 길어야 6개월의 단기간 일자리다.

이마저도 한차례 기회를 가지게 되면 다음에는 응모할 수 없는 사업이 부지기수다. 하는 일의 내용도 전동차 수신호, 길가 꽃 심기, 건널목 지킴이 등 단순 업무가 대부분이다. 강의 도중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일을 통한 자기 성취라는 점에서 만족하기 어렵다는 볼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노인 일자리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때다. 부천시에서 몇 해 전 이뤄진 새로운 시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역의 노동단체와 경영자단체가 함께 고령자 일자리 창출을 위한 목적으로 청소회사를 만들었다. 부천시는 지방자치단체가 담당해야 함에도 비용의 문제로 민간에 위탁을 줬던 가로청소 업무 일부를 떼어내 해당 청소회사에 맡겼다.

가로청소 업체 퇴직자나 고령자를 채용한 청소회사는 운영비와 인건비 외에 회사 몫의 이윤을 이를 개별 노동자의 근로조건 향상에 사용했다. 때문에 1일 4시간 주 5일을 일하는 노동자에게 월 120만 원 이상을 지급하는 등 일자리의 질이 크게 개선되었다.

무엇보다 이윤의 일정 부분을 노동자에게 투자하면서 회사가 노동자들의 삶을 함께 챙길 수 있는 것도 이점이다. 고령 노동자들을 상대로 변화된 노동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제2의 인생 설계 강좌를 열거나, 인문학 강좌를 통해 교양을 넓히는데 활용하는 식이다.

당시 작업을 마친 어르신들을 모시고 뮤지컬을 보러 간다며 들뜬 회사의 관계자가 기억난다. 평생을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자식 위해 일하며 문화생활이라고는 영화 몇 번 본 게 전부였을 어르신들에게 뮤지컬 관람은 낯설지만 설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시민사회나 지방자치단체의 선의를 기반으로 하다 보니 경영상의 미숙함이 발생하고 예산만 챙기는 불량업체가 나올 수도 있다. 정책적으로 기존 민간업체에 대한 역차별 논란이 벌어지기도 하고 일자리의 수를 늘려 많은 이들에게 기회를 주려다 보니 비정규직 양산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이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지원센터를 만들어 사회적 경제의 가치에 맞는 경영기법을 교육하고 사업위탁 시점에서부터 투명한 입찰과 예산사용이 이뤄지도록 적극적으로 감독하면 될 일이다. 지역의 노동사회단체를 참여시켜 사업을 평가하고 일자리의 질을 잘 관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중앙정부도 지방자치단체의 노인 일자리 수로만 일자리 정책을 평가하면 안 된다. 지저분하고 남들 하기 싫은 일자리를 싼값에 떠넘기는 식의 노인 일자리라면 숫자가 늘어난들 사회적으로 죄악이다. 근속기간과 종사자 만족도 등을 평가하여 일자리의 질을 점검하는 새로운 지표가 절실하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한국노총 부천상담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중기이코노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노인 일자리, #일자리, #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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