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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시월 마지막 날이면 라디오에선 어김없이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는 닳고 닳은 노래, <잊혀진 계절>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청취자들은 싱거운 소리에 낄낄대고, 징징 짜는 소리와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고, 안다 한들 크게 의미 없는 이야기를 귓등으로 들으며 11월에 손을 내민다. 그렇게 시월을 보내며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찬바람이 불어도 마음속까지 스며들지 않기를 바라며 노래한다.

시월과 11월 사이에서 이용의 노래 '잊혀진 계절'을 들으며 이토록 통속적인 노래가 가슴을 울리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본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라고 말할 때 기억은 이야기다. 이야기가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사랑받고 있다.

(주)창비 출판. 창비시선 414. 이시영 시집
▲ <하동> 책표지 (주)창비 출판. 창비시선 414. 이시영 시집
ⓒ (주)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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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고 하면 압축하고 조밀 조밀하며 노골적이지 않고 살짝 비틀기도 하면서 감추는 맛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은유와 암시, 긴장과 역설, 애매모호함은 시어의 특징이라 했다.

그런데 이시영 시집 <하동>은 그런 통념을 과감하게 깨버린다. 오히려 현대사의 질곡인 여순 때 산 사람과 세월호와 같은 구체적 사건을 직접 전달하려고 하고, 진실을 전달하려는 시인의 감정을 이야기로 풀어놓는다.

그렇게 흔히 말하는 '이야기시'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도 <하동>은 전혀 느슨하지 않다. 서사가 있고, 울부짖음이 있는 이야기는 상당히 압축적이고 인상적이며 선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면에서 시인은 담론을 추구한다. 이 시대가 허투루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에 대해 귀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시인의 말'에서 이시영은 시 비평과 시작 행위를 절묘하게 일치시켜온 김수영을 떠올리며 "시인으로서의 창조성이 쇠진되었다고 느끼면 깨끗이 시 쓰기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절필까지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낸 이유는 '관습적으로 비슷한 시집을 내지 않겠다'는 시인의 다짐이기도 하다.

그럼, 양심과 무관한 현대적 감수성의 시인들을 증오했던 김수영처럼 이시영 시인이 <하동>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담론은 무엇이었을까? 시인의 양심을 두드린 우리 현대사가 갖고 있는 아픈 기억들,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시영 시인의 이야기는 어릴 적 추억 속에서 소환된다. 달리 설명을 붙일 이유도 없고 그냥 읽기만 해도 가슴 먹먹하게 눈물이 나는 시가 있는가 하면, 싱거운 소리 같은데 마냥 웃을 수 없는 이야기도 있다.

가령, <잿간>은 유전자 변형식품(GMO)의 대명사인 몬산토에 점령당한 우리 식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서른살 넘은 딸애에게 아버지 어렸을 적에는 뒷간에 가서 볼일을 보고 난 뒤 짚으로 밑을 닦았다는 얘기를 했더니 '우웩!' 하며 토악질을 하더라. 그러나 1960년대까지 시골에는 잿간이라는 여성용 변소와 흑돼지가 밑에서 입을 쩌억 벌리고 있는 남성용 뒷간이 따로 있었는데 어린 나는 주로 잿간을 찾아 용변을 해결했다. (중략) 우리가 어릴 적 먹고 자란 음식은 몬산토가 아니라 이슬 젖은 밭고랑에 뛰던 청개구리 같은 싱싱한 것이었다."- 19쪽(<잿간>)

이시영은 탈영을 낭만적으로 그렸다. 그것도 군기가 세기로 유명한 해병대에서 발생한 장교 탈영이었다. 현재 경례 구호가 '필승'인 해병대에서 '충성'이라는 구호를 쓴 것으로 봐서 군사독재정권이 유신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발악하던 1973년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 분단국가가 아니라 해도 탈영은 군법에 회부되어 사형까지도 이를 수 있는 중범죄다.

그런데 이시영의 <달빛>은 반국가나 반체제적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밝은 달빛마저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분단 현실이 유죄고, 오승철 시인은 달빛이 유죄라고 했다. 탈영은 사람 마음을 훔친 달빛이 도망간 것이었다.

"해병대 야외 막사 화장실에 간 송모 중위가 새벽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충성!' 위병소 앞 플래시 불빛 요란한 탈영이었다. 수십년이 지난 후 안국동 기원에서 앙증맞도록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에쎄 담배를 끼운 그에게 물었다. '아니 그때 왜 그런 거요?' 그의 대답이 의외로 간단했다. '달빛이 너무나 밝아서……'" -56쪽(<달빛>)

시인은 여수, 순천, 광양, 보성, 하동, 남원, 구례, 곡성 등지에서 직접 경험했거나 들었던 좌·우익 폭력과 갈등이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임을 여러 편의 시에서 고발한다. 빨치산 토벌대에 의해 즉결 처분되었던 조합 서기 이야기인 <산동 애가>나 이웃이 이웃을 고발하며 죽여야 했던 이야기인 <연통>은 국가 폭력과 그로 인한 비인간화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동네가 모두 150여호라 하루걸러 잔치요 잔치 끝엔 더러 크고 작은 싸움이 끊이지 않았는데 마지막은 꼭 '저놈이 여순 때……'로 이어지곤 했다. ..... 여순 땐 이쪽저쪽에서 서로 첩자라고 고자질하여 고생 많았구만. 아버지 닮아 말할 때마다 파르르 일자로 떨리던 눈이 그날따라 축축이 젖어드는 것을 그때 나는 보았다." - 67쪽(<연통>)

시인은 세상의 아픔에 눈을 감지 않는다. 어느 세월호 어머니의 트윗을 관심글로 지정한 <2014년 9월 19일>은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애끓는 모정과 탄식을 시인은 모른척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인용만 한다. 아픔이 시인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시인은 말을 보태지 않은 인용으로 세월호가 우리 시대의 이야기, 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죄로……2만원밖에 못 줬는데 고스란히 남아 있던 지폐 두 장. 배 안에서 하루를 보냈을 텐데 친구들 과자 사 먹고 음료수 사 먹을 때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104쪽(<2014년 9월 19일>)

이시영 시집 <하동>은 얇지만 숱한 사연을 담은 이야기들을 노래하고 있다.


하동

이시영 지음, 창비(2017)


태그:#이시영, #하동, #시집, #여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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