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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국가 차원의 군트라우마센터를 만들자는 의미로 군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바로가기)에서 국가의 책임을 대신 짊어지고 있는 '군피해치유센터 함께'를 후원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신정식님은 트라우마치유활동가입니다. - 편집자 말

공연 <손잡고 추는 가장 느리고 아픈 춤, 쓰리쓰리랑>. 무용수들이 죽은 군인의 몸 위에 태극기를 얹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공연 <손잡고 추는 가장 느리고 아픈 춤, 쓰리쓰리랑>. 무용수들이 죽은 군인의 몸 위에 태극기를 얹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 최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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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죽은 후 두 개의 시계가 생겼어요. 그 순간에 멈춰버린 시간... 아이와 갔던 놀이공원을 지날 때, 군복 입은 청년을 볼 때, 군대가 떠오르는 국방색, 숨기기 급급했던 부대장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만 스쳐가도 가슴이 저리고 세상은 멈춰버려요.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할까 봐 따라 죽지는 못하지만, 멈춘 시계를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하게 돼요." - 어느 의문사 유가족

"제가 깨진 도자기 같이 느껴져요. 본드로 붙였지만 예전의 저는 될 수 없어요. 군대 생각하기 싫지만 깨어있는 시간 수십 번씩 생각나요. 저를 괴롭혔던 사람들의 얼굴과 말들 그리고 살인하는 장면을 떠올려요.

저는 돈을 아주 많이 벌고 싶어요. 엄청난 부자들의 성공담을 눈여겨보죠. 돈 벌면 청부살인해야죠. 괴롭힌 선임들 하나하나를 잔인하게 죽일 거예요. 내 손 하나 안대고... 돈과 힘이 있으면 처벌 되지 않는 세상이잖아요. - 어느 군피해 청년

현재도 생생하게 경험되지만 남들에게 이해되지 못할 까봐 말해지지 않는 분노와 아픔들이 있습니다. 일본의 트라우마 전문가 미야지 나오코는 트라우마를 '섬'으로 비유했습니다.

침묵의 '내해(內海)'가 있는 도넛 모양의 화산섬이 넓은 바다에 갑자기 생겨납니다. 그 섬의 내해에는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말할 수 없는 희생자, 살아남았지만 소리를 낼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잠겨있습니다. 군피해는 오랫동안 '말하는 것'을 잃어 버렸었던 집단적 트라우마입니다. 대중에게 보이지 않았던 섬이었습니다.

고 홍정기 일병의 엄마 김미경(가명)씨가 아들의 유품 상자들 옮기고 있다.
 고 홍정기 일병의 엄마 김미경(가명)씨가 아들의 유품 상자들 옮기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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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모두에게 병이..."

"솔직히 어떨 때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부러워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지원, 정치인들이 같이 하잖아요. 우리 아들은 국가에서 불러서 간 거잖아요. 근데 왜 사고 나고는 아무도 같이하지 않는 거죠? 사건이 나고 처음부터 책임 있게 공개하고 힘든 시간에 도와주어야 되는 거잖아요." - 유가족 오명자

"사건 듣고 충격으로 입원했어요. 남편은 속상해 술만 마시고 사건에 관해 해야 할 일들을 피해버렸어요. 그러다 보니 세 살 많은 형이 동생 시신을 확인했어요. 어리다 무시하며 담배연기를 얼굴에 뿜어 대는 군인과 상대했지요. 너무 미안해요.

큰 애는 몇 년 후 정신병이 생겼어요. 동생 죽은 후 부모의 한과 분노를 그 애에게 쏟아내기도 했어요. 자기도 충격인데 너무 많은 걸 하며 자기도 병이 난거죠. 아이가 죽은 일로 우리 가족은 모두 환자가 됐어요." - 유가족 김숙희  

군복무의 의무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별 고민 않고 군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사건 후 그 자명함이 사라집니다. 군대는 견고하고 폐쇄적인 벽으로 변하고 부모들은 어찌할 줄 모릅니다. 진상규명과 정보공개, 책임소재와 법률소송, 보훈자 지정 절차 등 생전 처음 겪는 일들을 만납니다. 아픈 몸과 마음을 추스르려 해보지만 혼돈의 시간 동안 그들은 철저히 혼자가 됩니다.

관심 받지 못한 자, 추도 받지 못한 자 때로는 나약하고 적응 못한 자와 그의 부모가 됩니다. 갑작스런 삶의 불운과 고통에 마주하며 어찌 할 줄 모르는 한 개인이 됩니다.
  
아픔이가 아픔이에게 보내는 편지, '군피해치유센터 함께'

고 노우빈 훈련병 엄마 공복순씨는 사진 속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고 노우빈 훈련병 엄마 공복순씨는 사진 속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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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피해치유센터 함께(아래 함께)'는 국가적 책임의 부재 중, 그동안 침묵 속에 있었던 피해당사자가 설립한 단체입니다. 단체를 만들고자 한 공복순 대표 또한 자식(고 노우빈 훈련병)의 죽음 앞에 어찌할 줄 모르고 아파하던 어머니였습니다.

"자식이 죽고 나자 이런 일을 먼저 겪은 '선배'들이 원망스러웠어요. '왜 사회에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러면 조금은 더 바뀌지 않았겠느냐'고요."

공 대표는 사건 전까지 교사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우던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사회단체에 관심을 갖거나 활동해 본 경험도 없었습니다. 단체를 만들고 좌충우돌할 때는 솔직히 놓고 싶기도 합니다. 공 대표가 힘들 때 가장 잘 하는 일은 사람들을 찾아가 '함께'와 함께 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입니다. 또 같은 입장의 힘든 가족들과 함께하는 일입니다.

"대전 현충원에 추모꽃과 편지를 놓고 왔어요.. 다녀온 뒤 한, 두 명이라도 전화를 걸어와 이야기 나누면 그렇게 기뻐요. 가족들과 한양도성길 걷고 같이 밥 한 끼라도 나누면 이 일을 시작하길 잘 했다 생각 들고요."

군피해 생존자의 어머니 박경희씨(가명, 관련기사 : "씨X 돌았냐? 이거 먹어" 선임이 들이민 매미 한 마리)는 혼자 생계를 꾸려가는 세 아들의 엄마입니다. 기초생활수급자라 형편은 넉넉지 못합니다. 아들도 아프고 본인도 아픕니다. 그럼에도 직접 음식을 만들어 국군병원의 아픈 병사들을 찾아갑니다. 음식을 전하며 고통을 함께하는 이웃이 됩니다.

군피해 생존자의 아버지 한 분은 국방부에서 유명한 싸움꾼입니다. 아들의 인권침해에 대응하며 갖게 된 노하우를 다른 피해 장병을 위해 쓰고 싶어 스스로 1인 NGO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할지 모르는 군피해 가족이 있으면 전국 어디든 달려가서 다시 또 싸움꾼이 되길 자청합니다.

자신들도 어렵고 아프다고 합니다. 불신이 큰 가족들 사이에서 욕도 먹고 서로 불화하는 날도 많아 속상합니다. 다 내려놓고 싶을 때 그들을 지탱하는 것이 있다면 살았든 죽었든 자식이라는 존재입니다.

"너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을 거야. 누군가 아프지 않도록 돕는 것, 군대를 바꾸는 일을 할 거야. 그러니 너도 하늘에서 엄마 좀 도와줘."

죽어서라도 아들이 살아있었으면 하는, 살아있게 하고 싶은 부모의 마음입니다.

한 때 고립됐었고, 피해자였던 부모들은 이제 비슷한 아픔을 지나는 사람들을 찾아가 돕습니다. 그들은 이제 피해자가 아니라 기여자가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몇몇 개인의 헌신으로, 소수의 사람들만이 연결되는 지원으로는 만나지 못하는 부모와 청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민욱(가명) 일병은 군대 내 괴롭힘으로 '군복무 부적응자(제2국민역)'로 제대 했다. 극심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시달리는 아들을 위해 엄마 박경희(가명)씨는 직접 발로 뛰며 아들의 피해 사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박씨도 함께 병을 얻었다.
 이민욱(가명) 일병은 군대 내 괴롭힘으로 '군복무 부적응자(제2국민역)'로 제대 했다. 극심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시달리는 아들을 위해 엄마 박경희(가명)씨는 직접 발로 뛰며 아들의 피해 사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박씨도 함께 병을 얻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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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응답하라, 군트라우마센터

PTSD(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는 점차 주류 의학의 담론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도 세월호 참사를 목격하며 '트라우마'는 시대의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음식이 안 맞거나, 싫은 사람이 불편한 때도 트라우마를 남용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트라우마 담론의 부작용은 사회적 고통이 심리적 문제로 환원되어지는 것입니다. 정신건강문제를 가진 환자로 보거나 스스로를 무력한 피해자로써 정체성화 할 수도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후 위기를 느낀 정권은 발빠르게 사건 한 달 후 트라우마센터 설치라는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사건 직후 유가족들이 필요했던 것은 아주 기본적인 지원과 연결들이었고 무엇보다 원했던 것은 진실의 규명과 정의였습니다.

애도는 좁은 상담실 안에서 전문가가 제공하는 서비스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경감시키려는 노력 역시 충분히 해야 하지만 그 고통을 만드는 사회적 맥락에 대해 생략하지 않아야 합니다. 트라우마센터가 만들어 진다 하여도 군사건의 은폐와 축소가 계속된다면 군피해자들은 거짓 치유의 제안을 거부할 것입니다.

설립될 트라우마센터는 심리치료 뿐 아니라 사건 후 실질적으로 필요한 의료비, 법률, 경제지원 등 다층적·포괄적 지원하려는 국가의 의지가 법률적 근거로 마련되어야 합니다. 또한 국가의 공백 속에서도 기여자로 나섰던 상처받은 피해 당사자들의 목소리와 힘을 인정해야 합니다. 센터의 운영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스스로 정의하는 '치유'를 위해 자발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것입니다.

듣는 힘을 가진 이웃들, 고통에 감응하는 국가

공연 <손잡고 추는 가장 느리고 아픈 춤, 쓰리쓰리랑>. 군인 복장을 한 무용수가 줄에 매달려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다.
 공연 <손잡고 추는 가장 느리고 아픈 춤, 쓰리쓰리랑>. 군인 복장을 한 무용수가 줄에 매달려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다.
ⓒ 최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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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직후 추도식 열렸습니다. 남편을 잃은 젊은 미망인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국가를 위해 죽었는데 울지 마세요."

고통이 표현되는 것, 기억되는 것이 권력자들에게는 좋은 일이 아닌가 봅니다. 우리가 어딘가에서 자주 들었던 말. 분단의 위험과 경제발전을 위해 사소한 아픔쯤은 잊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그 말에 속지 않습니다. 큰 힘을 상대하면서도 쉬이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더 나은 사회로 옮겨 갈 수 있도록 하는 '동력'입니다.

그 목소리에서 시작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그 힘을 보고, 듣지 못한다면 함께 무언가 하지 않는다면 10년 후 지금의 어린이들이 청년이 되고 군인이 되었을 때도 지금의 사건들은 재현 될지 모릅니다. 그동안 기사로 전달된 부모들의 이야기들은 불우한 개인의 푸념에 그치고 곧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과거 '울지 말라' 하는 국가에서 사람들의 눈물, 이야기, 바람들에 감응할 수 있는 사회가 되고, 그것의 총합이 국가라고 불려 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희망은 '듣는 힘'을 가진 이웃들이 많아질 때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제야 엄마의 군대 밖 전쟁은 잦아들고 좀 더 평화로운 시간도 찾아 올 수 있을 겁니다.


태그:#군대, #트라우마, #군트라우마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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