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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e북을 구매해 봤다. 시집은 어쩐지 종이로 된 책을 사서 다 읽고 난 후라도 책꽂이에 꽂아 놓아야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했는데 유병록 시인의 시 일부를 보고 전체를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 구매 즉시 읽을 수 있는 e북이 떠올랐다. 또 요즘은 만화도 웹툰이 인기이고, e북이 시집은 물론 장편류까지 다양하게 나와있다. 유명세를 떨치는 웹진들도 있다.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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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록 시인의 첫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를 접하고 과연 무슨 의미일까 궁금해하며 시집의 첫 장을 넘겼다. 목숨이 두근거리다니. 보통은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표현하지 않는가. 목숨이 두근거릴 정도면 삶의 기대가 크다는 것인지 아니면, 죽음 저 너머 세계가 불안하기 짝이 없어 무섭고 두려움을 그리 표현한 것인지. 시집을 끝까지 정독하기 전에는 그 의미를 몰랐다.

1982년생으로 비교적 젊은 시인으로 생각된다. 1977년생으로서 나보다 5년 늦게 태어난 시인의 시집에서 시를 읽은 지 오래지 않아 죽음을 떠올렸으니 시집 전체의 장엄한 분위기가 시를 읽는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아직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6년 전 돌아가신 시아버지와 2년 전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임종을 맞을 때도 나와는 먼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 아니겠는가. 죽음의 미학을 시로 풀어낸 유병록의 세계. 그 세계로 들어가 보자.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는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영유아기, 청소년기, 중장년기, 노년기를 의미하는 것처럼 각 부마다 인생의 큰 시기가 담겨있다. 1부는 순수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영유아기, 2부는 질풍노도의 청소년기, 3부는 갈등하면서도 우직하게 살아가는 중장년의 모습 마지막으로 4부는 저무는 석양처럼 인생의 종착지에 다가가며 삶을 되돌아보는 회한 섞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집의 첫 번째 시는 '붉은 달'이다. 유병록 시집에서는 흰색, 검은색과 함께 빨간색이 자주 등장한다. 유병록에게 빨강은 인간의 피이며, 곧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시집 첫 번째에 '붉은 달'을 넣은 것은 인간의 탄생을 의미한 게 아닐까. 떠오르는 달, 아직 낮의 태양처럼 강렬하고 힘차며 주체적이지는 못하지만, 미약하게나마 달은 떠올랐고 붉었다. 아기가 어머니의 자궁을 뚫고 핏덩어리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붉은 달

붉게 익어가는
토마토는 대지가 꺼내놓은 수천개의 심장

그러니까 붉은 달이 뜬 적 있었던 거다 아무도 수확하지 않는 들판에 도착한,
이를테면, 붉은 달이라 불리는 자가

제단에 올려놓은 촛불처럼, 자신이 유일한 제물인 것처럼 어둠속에서
빛났던 거다 비명을 삼키며 들판을 지켰으나

아무도 매장되지 않은 들판이란 없다

붉은 달은 저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 사방으로 솟구친 붉은 빛이 들판을
물들인 것

이것은 토마토밭 사이로 구전되는 동화
피 뿌린 대지에 관한 전설

그를 기리기 위해 운집한 군중처럼
올해의 대지에도 토마토는 붉게 타오른다 들판 빼곡이 자라난 붉은빛이
울타리 너머로 흘러넘친다

토마토를 베어 물 때마다
내 심장으로 수혈되는 붉은 빛

붉은 달이 뜬다

2부에서 눈길이 갔던 시는 '엘리 엘리 라마 엘리베이터'다. 질풍노도의 시기 청소년기를 상징하는 2부의 시들. 학교 성적, 친구 관계, 가족 관계 등에서 고민하며 좌절하는 인간의 모습. 그러다 목숨을 버리는 처연한 인간을 시인은 이렇게 묘사했다. 

엘리 엘리 라마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는 무엇이든 들어올린다

거리를 쏘다니던 가방과 그림자, 병든 지팡이와 활짝 핀 브로치도 저녁
이면 엘리베이터에 담겨 집으로 간다 구원받은 표정으로 열쇠를 만지작 거리며

하늘 가까이로 올라가는 엘리 엘리 엘리베이터.

(중략)

드물지만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지상으로 내려오는 자가 있다 높이를
실감한 자와 남은 자들이 베란다에서 눈송이처럼 뿌려대는 울음, 그러나
곧 몇 켤레의 구두와 울음을 싣고 사라지는 엘리베이터

그토록 죽음을 불안해하는 인간이 스스로 삶을 버릴 수도 있는 나약한 존재임을 시인은 애기하고 있다. 자살률 1위라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버랩되는 순간이다.

3부는 중장년기를 의미한 것이 아닐까. 흰색의 어리숙함, 순수함, 미숙함에서 벗어나 어느덧 빨강이 되어가는 시기. 저무는 석양과 같이 인생의 중반이 지나가는 모습이다. 혹은 열정적인 사랑을 '빨강'으로 표현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는 흰색에서 점점 붉은 빛으로 변하는 인간의 삶. 지나고 보면 아스라한 추억일 뿐인데 그때 그 사랑은 마치 열사병처럼 뜨겁고 아팠다.

빨강

나는 아무래도 빨강이 되어가는 중이다

빨강을 만난 건 겨울이었거나 겨울이 아니었더라도, 그는 흰 눈위에
떨어진 핏방울 혹은 얼음 속의 불

우리 잠시 스쳤을 뿐인데

묻었나봐
꼭 여며두었던 소매 끝이거나 긴 목도리의 한쪽
열꽃이 번지고

나는 사흘에 한번 빨강을 앓고 하루에 한번 그를 앓으며
빨강이 되어간다

빨강은 얼어붙은 불이었거나 불타는 얼음

이미
날은 어두워졌는데 얼음은 관용의 기미조차 없는데

몇켤레의 빨강 발자국 지나간다 구름위 어느 따뜻한 나라에서 실수로
떨어뜨린 사과처럼 몇 개의 붉은 지붕이 빛난다

빨강은 죽어간다
그리고 아직은 살아있다

색(色)에 빠지면 흑백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는데

나는 붉어진다
홍조를 띤 것처럼 빨강이 되어간다 불타오를수록
추운

4부는 노년기, 인생의 막바지를 표현했다. 이제는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어깨 위의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의 제목은 상여를 맨 모습을 묘사했다. 상여를 맨 사람의 어깨 위에는 죽은 자의 관이 있고 관 안에는 죽은 자가 있다.

이제는 상여를 매는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최초의 내 기억은 7살 때 둘째큰아버지의 장례때 모습이다. 상여를 맨 사람들 뒤로 큰어머니와 사촌들이 울면서 뒤따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노년은 곧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의미하고 죽음은 곧 이승과의 이별이다.

어깨 위의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걷는 자여
몇세기 동안이나 길을 잃고 헤맨 얼굴로 지구 몇바퀴를 지나온
행색으로

따뜻한 집을 찾아가는 중입니까

일행도 지팡이도 없이
이미 목적지를 지나친 것처럼 애초에 목적지가 없는 순례처럼

어디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까

떠나온 곳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자여
굽은 어깨 위의 집은 무엇입니까

(중략)

당신 어깨 위의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더 이상 묻지 말아달라는 표정으로 불길한 이름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
눈빛으로

걷는 자여
어깨 위의 죽음이 자라서 혼자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작정입니까

유병록의 시 중 '가장 높은 곳에'를 읽으며 현재 치매를 앓고 계시는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시고 뭘 하는 줄도 모르고 식사 시간이 되면 기도하시는 모습이 시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심장이 뛰고 팔다리는 멀쩡한데 머리가 망가져 영혼은 죽어버린 치매 노인의 모습. '가장 높은 곳에'가 안타까운 외할머니를 묘사한 듯 내 가슴을 울렸다.

가장 높은 곳에

반도처럼 툭 튀어나온 두 다리는
걸어가지 뛰어다니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두손은
밥 짓고 일하고 청소하지 무엇을 위해서인 줄도 모르고 기도하지

그리고 머리가 있다
머리가 망가지면 죽는다 심장이 뛰어도 두 팔 다리가 멀쩡해도 죽는다
의사는 말하겠지 그만 식민지들을 내려놓으라고

(중략)

머리는 생각하고 반성하고 명령한다

복종하는 몸이지만
제멋대로 움직이고 싶은 때가 있다

가끔은 주먹 쥔 손이 머리를 때리기도 한다 곧 주먹을 펴서 머리를 문지르며
용서를 빌지만

그런 순간이 좋다

유병록의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는 나에게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젊다면 젊을 수도 있고, 나이가 들었다면 들었을 수도 있는 내 나이 41살. 우연히 접한 한 시인의 시집이 탄생부터 죽음까지 인간의 순간순간들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고통일 수도, 환희의 시간일 수도 있는 인생길. 죽음조차 미학적으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용기가 부럽다. 나는 아직 멀었다.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유병록 지음, 창비(2014)


태그:#유병록, #서평, #시집, #목숨이두근거릴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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