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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존재는 늘 아이로 대체됩니다. 아이를 품은 '엄마'가 아닌, '미래'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라는 대중교통 임산부석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결혼과 출산을 거치면서 자신의 이름은 사라진 채 누구누구의 엄마로 살아가는 엄마들. [주간애미]는 '애 말고 엄마'에 집중합니다. '맘충', '니 애미'... 어느새 사회적 혐오의 대상이 돼버린 '애미'들을 위한 콘텐츠를 지향합니다. [편집자말]
부모교육모임 '삐삐앤루팡'의 구성원 (왼쪽부터) 김수민, 박지영, 조희진, 박지연씨.
 부모교육모임 '삐삐앤루팡'의 구성원 (왼쪽부터) 김수민, 박지영, 조희진, 박지연씨.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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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가 처음 만난 건 2016년 말, '와우북클럽'이라는 청소년 책읽기 모임에서였다. 6주간의 만남을 거치면서 서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음을 확인한 세 여자는 '삐삐앤루팡'이라는 모임을 결성한다.

10년 직장생활을 끝내고 청소년 관련 일을 모색하고 있던 박지연(45)은 '삐삐', 아이들과 어른들을 대상으로 그림책 수업을 해온 김수민(39)은 '앤', 청소년 교육학을 공부한 조희진(37)은 '루팡'. 각각 어린 시절 좋아했던 동화 속 캐릭터에서 별명을 따왔다. 이들은 모두 초등학생 자녀를 둔 엄마들이다.

'청소년'이라는 공통분모로 모인 만큼 처음에는 한 달에 한두 번 스터디 모임을 하며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호기롭게 공모사업에 지원했다 똑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들이 진짜로 하고 싶은 게 뭔지, 모임의 방향성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결과는 의외였다. 세 여자는 여전히 아이보다는 자기 자신이 더 궁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이 아이보다 부모의 성장에 집중하는 부모교육을 시작하게 된 이유다.

지난 7일 오후, 페미니즘 카페 '두잉'에서 삐삐앤루팡을 만났다. 삐삐, 앤, 루팡 세 사람 그리고 삐삐앤루팡 워크숍을 통해 새롭게 팀에 합류한 '박 작가' 박지영(36)씨가 함께 했다. '죽이 잘 맞는' 멤버들답게 수다인지 인터뷰인지 모를 대화가 시작됐다. '루팡' 조희진씨는 팀의 방향을 새롭게 정하던 4월을 이렇게 회상했다.

부모교육모임 '삐삐앤루팡'에서 '루팡'의 별명을 가진 조희진씨.
 부모교육모임 '삐삐앤루팡'에서 '루팡'의 별명을 가진 조희진씨.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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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이 돌잔치 대신 제 사진 전시회를 열 정도로 자아가 강했어요. 그런데 두 아이를 낳고 경력단절이 되면서 깊은 우울감에 빠져 있었어요. 6년간 육아만 했어요. 그러다 상담센터를 제 발로 찾아가서 치료를 받다 상담 선생님 추천으로 미술심리를 공부하게 됐고, 방송통신대에서 청소년 교육학을 전공했어요.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한 후에는 아이 초등학교 친구들,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미술수업을 진행했어요.

그렇게 학부모들을 만났는데 그 분들이 갖고 있는 재능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표출하는 걸 두려워하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답답하기도 하고 엄마들에게 계속 마음이 갔어요. 제가 우울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청소년도 청소년이지만 엄마인 그들, 갇혀 있는 그들을 끄집어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나는 아직도 더 관심이 있고 나는 엄마들한테 마음이 더 같다고 화두를 던지게 됐어요."

엄마됨이 행복할 수는 없을까?

한국에서 엄마로 산다는 건 '극한직업'이다. 전업맘들은 경력단절로 인해 사회적 자아를 상실한 채 살아가고, 워킹맘들은 일과 육아 사이에서 늘 죄책감을 느낀다. '애는 엄마 하기 나름'이라고 보는 모성 이데올로기는 엄마에게만 더 많은 역할을 요구한다. 이렇게 힘들게 '엄마 노릇'을 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맘충', '니 애미' 같은 사회적 혐오다. <82년생 김지영>에 그토록 많은 엄마들이 열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엄마됨이 행복할 수는 없을까?'
'엄마가 되면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없나?'
'엄마가 자존감이 있어야 아이도 행복하지 않나?'

삐삐앤루팡의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삐삐앤루팡의 모토는 '내 삶을 디자인 하다'이다. 부모가 된 어른들이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삶을 디자인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엄마, 아내, 며느리 등 역할로 규정된 나를 내려놓고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진짜로 하고 싶은 게 뭔지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삐삐' 박지연씨는 "내가 잘 설 수 있어야 아이들도 하나의 주체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부모교육모임 '삐삐앤루팡'에서 '삐삐'의 별명을 가진 박지연씨.
 부모교육모임 '삐삐앤루팡'에서 '삐삐'의 별명을 가진 박지연씨.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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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스스로 클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예요. 부모들이 아이가 스스로 성장할 수 있게끔 토양이 되는 역할, 뿌리 같은 역할을 하면 되는데 자기 욕망을 아이한테 투사하는 과정에서 아이가 스스로 클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요. 그렇게 되는 이유는 부모들 스스로가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자기 삶을 디자인해 본 경험이 없어요. 내가 온전히 서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데, 부모들이 아이를 독립적인 주체로 받아들이는 훈련이 스스로 안 되는 거예요."

부모 자신이 성장했을 때 아이들도 그런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삐삐앤루팡의 생각이다. 이들이 현재 진행하는 사업은 크게 세 가지다. 워크숍 형태로 진행되는 '어쩌다 부모', '아티스트 웨이' 그리고 독서모임인 '레드클럽'. 수업 도구는 멤버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인 그림책(김수민), 사진(조희진) 그리고 영화(박지연)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그림책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김수민씨는 그림책 심리 수업을 하며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고, 영화를 전공한 박지연씨는 일과 육아 사이에서 분투하다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퇴사를 감행했다.

'어쩌다 부모'는 지난 8월~9월 6주 과정으로 진행됐다. 아이들이 어린이집과 학교에 있는 평일 낮 시간에 진행이 되다 보니 참가자들은 주로 전업맘들. 영화 <문라이트>를 통해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고, 그림책 <나><두 사람> 등을 읽으며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함께 사진을 보고 또 직접 찍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썼다. 가장 좋아하는, 가장 나다운 옷을 입고 와서 폴짝 뛰어보기도 했다. 워크숍은 5~10명 이내 소수정예로 진행됐다. 6주 과정이 부담스러운 이들을 위해 9월부터 매달 원데이 클래스를 열고 있다.

부모교육모임 '삐삐앤루팡'에서 '앤'의 별명을 가진 김수민씨.
 부모교육모임 '삐삐앤루팡'에서 '앤'의 별명을 가진 김수민씨.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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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연 : "한분은 처음 시작할 때 저희가 드로잉북을 주면서 6주차 프로그램 끝날 때까지 완성하라고 했는데 정말 너무 열심히 한 거예요. 본인은 그림 못 그린다고 자신감이 없었는데 절대 못 그리는 분이 아니에요. 알고 보니 결혼하기 전에 애니메이션 회사에 다녔던 분이었어요. 엄마들은 자기가 어떤 재능을 갖고 있어도 그게 재능인 걸로 인식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김수민 : "결혼하기 전에는 사회에서 일이라는 걸로 인정을 받잖아요. 그렇게 내 가치가 존중을 받았는데 출산과 동시에 육아를 하고 경력이 단절되면서 그 능력이 낮게 취급되는 거예요. 그걸로 돈을 벌어오지 못하니까. 아이 키우는 여자가 하는 활동은 소꿉놀이, 배부른 여자들 사치처럼 취급 되는 거예요."

삐삐앤루팡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삐삐앤루팡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 삐삐앤루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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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앤루팡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사진을 함께 보고 있다.
 삐삐앤루팡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사진을 함께 보고 있다.
ⓒ 삐삐앤루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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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부모'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뭔지를 깨닫는 초급 과정이라면, '아티스트 웨이'는 자신만의 창조성을 회복하는 12주 심화과정이다. 미국 작가인 줄리아 카메론이 제안한 창조성 회복 프로그램에서 모티브를 얻어왔다.

김수민씨는 "줄리아 카메론은 '우리는 누구나 예술가다, 예술적인 본능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면서 "일상을 사는 평범한 우리 안의 창조성을 깨워보자는 취지에서 워크숍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박 작가' 박지영씨는 8월~11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도예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 워킹맘으로 살면서 이직과 퇴사를 계속 반복해왔다는 그는 '번아웃'된 상태에서 삐삐앤루팡을 만났다. 영어강사 일을 하며 이직을 준비 중인 그는 그림이든 글이든 앞으로는 작가로서 살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 닉네임을 '박 작가'로 지었다.

혼자였다면 막연히 '하고 싶은데' 생각하고 말았겠지만 참가자들과 함께 서로 응원하고 격려하면서 12주 워크숍을 진행하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조희진씨는 '아티스트 웨이'를 통해 한동안 놓았던 사진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내년에는 돌잔치 이후 10년 만의 개인전시회도 준비 중이다. 

"유난히 힘든 '요즘 엄마들'... 개인의 문제 아니다"

나 자신을 찾는 과정은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엄마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박지연 : "엄마들을 만나보면 다들 고민이 있는데 그걸 학부모 커뮤니티나 어린이집 커뮤니티에서는 다 밝힐 수가 없어요. '엄마 가면'을 쓰고 있어야 하니까. 힘들어도 힘들다는 걸 드러내지 못하는 거예요. 힘든 이야기를 하면 내가 나쁜 엄마가 되니까. 좋은 엄마 이데올로기에 엄마들 스스로도 갇혀 있고 사회도 그걸 요구해요. 엄마들이 고민을 이야기 하면 '누구나 다 그래, 그때는 다 그래' 개인의 문제로 한정을 하는데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에요. 터놓고 이야기 해보면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을 다들 하고 있어요. 이건 구조적 문제예요. 고민을 끄집어내서 자기 언어로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레드클럽'은 엄마들이 대체 왜 이렇게 힘든 건지, 그 사회구조적 원인을 책을 읽으며 함께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9월에는 <엄마도 아프다>를 함께 읽었다. 박지영씨는 "책에 모성도 감정 중 하나이고 기복이 있는데 유독 모성만 타고난 본성인 것처럼 엄마들에게 강요된다는 내용이 나온다"면서 "정말 공감하면서 읽었다"고 말했다. 2018년 1월부터는 '그 유명하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을 예정이다. 시즌제 멤버십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삐삐앤루팡 멤버들도, 이들이 여는 워크숍을 찾는 이들도 대부분 30~40대 엄마들이다. 왜 '요즘 엄마들'이 유난히 힘든 걸까. 박지연씨는 "'82년생 김지영'으로 대표되는 요즘 엄마들은 자아실현 욕구나 '나'라는 존재가 굉장히 중요하고, 부모들이 남자하고 다르지 않게 차별 없이 키운 세대"라면서 "그런데 엄마가 된 다음에 엄마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게 되니 그걸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부모교육모임 '삐삐앤루팡'에서 '박작가'의 별명을 가진 박지영씨.
 부모교육모임 '삐삐앤루팡'에서 '박작가'의 별명을 가진 박지영씨.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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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연 : "엄마이기 이전에 나라는 존재가 있고, 내 안의 여러 정체성 중에서 엄마가 있는 건데 아이를 낳게 되면 '엄마=나'가 되는 거예요. 엄마 이외의 다른 정체성은 부정돼요. 내 안에 수많은 정체성이 있는데 왜 다 버리고 왜 '엄마'라는 순정부품으로 존재해야 하는 걸까요?"

박지영 : "저희 엄마들은 대부분 전업주부들이 많았고 개인적 욕구가 철저하게 억눌러졌었어요. 그러면서 본인의 딸들에게는 '너는 나처럼 살지 말라'고 주입을 했죠. 우리 세대는 난 엄마처럼 살 수 없다고 주입받으며 자랐는데 막상 육아를 담당하게 되면 엄마와 다를 바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더 힘든 것 같아요."

조희진 :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자랐지만 결혼과 육아라는 시스템에 들어오면서 '배운 대로'가 아니라 '본 대로' 살게 돼요. 거기에서 가치 충돌이 일어나는 거죠. 이걸 더 이상 내 아이에게 대물림해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부모로서 내 삶을 스스로 디자인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결성한 지 이제 갓 1년 된 삐삐앤루팡에게는 과제가 많다. 일단 먹고사는 고민을 빼놓을 수 없다. 각자 생계를 위한 일을 하며 여러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아직은 제대로 된 수익 모델을 만들지 못했다. 워크숍 참가비를 받기는 하지만 인건비와 재료비도 안 나온다고.

초기에는 지원사업의 도움을 받되, 장기적으로는 지속가능한 수익모델을 만들어가는 것이 목표다. 각종 워크숍도 현재는 주로 전업맘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워킹맘, 나아가 아빠들까지도 참여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부모교육모임 '삐삐앤루팡'의 구성원 (왼쪽부터) 김수민, 박지연, 조희진, 박지영씨.
 부모교육모임 '삐삐앤루팡'의 구성원 (왼쪽부터) 김수민, 박지연, 조희진, 박지영씨.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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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 : "꾸준하게 이어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우리가 걸음을 멈추지 않아야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자극을 받아서 자기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 나올 거예요."
박지연 : "며칠 전 다 함께 <샘과 데이브가 땅을 팠어요>라는 그림책을 읽었어요. 말 그대로 땅 파는 이야기인데 우리 이야기라면서 많이 웃었어요. 지금 저희는 삽질하고 있는 단계인 거죠(웃음). 결국 끝까지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오후 4시, 멤버들은 아이들 데리러 가야 한다며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덧붙이는 글 | 삐삐앤루팡 블로그 http://blog.naver.com/pipiannelupin



태그:#주간애미, #삐삐앤루팡, #엄마도 아프다, #모성, #82년생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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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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