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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동료들은 나를 '피덕(피렌체 덕후)'이라고 부른다. 내 돈으로 가 본 5번의 비행기 여행 중 4번이 피렌체였다. 관련된 책도 여러 권 읽고, 경험이 쌓이면서 피렌체의 다양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삐딱하게 본다는 것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더 넓고 깊게 보려는 노력이다. 아마추어 덕후일 뿐이지만, 내가 본 피렌체의 '익숙하지만 낯선 모습'을 풀어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이탈리아 피렌체에는 그 긴 역사 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있다. 유명한 메디치 가문과 훌륭한 예술가들을 만날 수도 있지만, 서민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만날 수 있는 곳도 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서 북서쪽 골목으로 조금 올라가면, 'ㄷ'자 모양의 광장을 만날 수 있다. 광장 정면에는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의 청동 기마상이 버티고 서있다. 코시모 1세를 비롯한 메디치 군주들의 동상은 시뇨리아 광장 등 여러 곳에서 마주칠 수 있다.

과거 메디치 가문의 선조들은 표면적으로나마 피렌체의 공화정을 지지하며 시민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길 극도로 꺼렸다. 하지만 이런 선조들과 달리 피렌체의 군주가 된 후손들은 강력한 전제 정치를 실시하며 곳곳에 자신들의 동상을 세웠다. 어쩌면 이렇게 자신을 전면에 내세운 전제 정치야말로 메디치 가문이 오랜 세월 준비해 온 궁극적인 목표인지도 모른다.

가톨릭은 예수의 생애 중 중요한 이벤트들을 특별히 기리는 문화가 있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찾아와 아들의 임신을 예언하는 수태고지, 광야에서 세례 요한에게 받는 예수의 세례,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고 십자가에서 내려진 직후의 모습(피에타), 예수의 부활과 승천 등이다. 이런 이벤트들은 예술작품의 중요한 주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매년 해당 기간에는 관련 이벤트를 기리기 위한 축제와 의식 등이 행해진다.

이 광장은 수태고지 축일(3월 25일)에 행해지는 행진의 종착지였다. 그래서 '수태고지 광장(Pizza della Santissima Annunziata)'이라고도 불렸으며 광장 정면에 있는 건물이 산타시마 안눈치아타 성당이다('안눈치아타 : Annunziata'라는 말이 영어로 하면 'Annunciation : 수태고지'다). 후에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주인공들이 다시 재회하는 장면의 배경으로 그려지면서 '재회의 광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청동상 뒤로 산타시마 안눈치아타 성당이 보인다
▲ 수태고지 광장 청동상 뒤로 산타시마 안눈치아타 성당이 보인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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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왼쪽은 '인노첸티 보육원(Ospedale degli Innocenti)'으로 유럽 최초의 보육원이자 신생아 병원이었다. 수태고지를 기념하는 광장에 신생아를 위한 보육원이 있다는 것이 묘한 느낌을 준다.

이 보육원은 프란체스코 다티니(Francesco Datini)라는 부유한 상인의 유언에 따라 1445년 설립되었다. 이 곳의 설계는 산타 마리다 델 피오레 성당의 돔 설계로 유명한 브루넬레스키가 맡았다. 정확한 좌우 대칭과 완벽한 반원을 이루는 로지아는 르네상스 건축의 대표 양식 중 하나이다. 이 건물의 아름다움은 내부에 들어가서도 느낄 수 있다. 다른 건물과 달리 물결이 이는 듯한 천장은 부드럽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아름다운 건물에 담긴 슬픈 사연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건물 외관
▲ 인노첸티 보육원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건물 외관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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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의 디자인이 이채롭다
▲ 인노첸티 보육원 내부 천장의 디자인이 이채롭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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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가난한 노동자나 매춘부들이 버린 아이들, 그리고 사제들의 부적절한 행위로 태어난 신생아들을 위한 곳이었다.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던 시절, 운 좋게도 무사히 성장한 아이들은 직물 공장 직원이나 부유한 가정의 하인, 그리고 수녀 등 성직자가 되거나 결혼을 해서 세상으로 돌아갔다.

버려지는 아이들도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갓 낳은 자식과 생이별을 해야하는 부모들의 마음도 편치 않았을 것이다. 과거에도 노동자들의 삶은 고달팠다. 우리는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를 매우 아름답고 부유하며 발달된 곳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곳에서도 저임금과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피렌체의 특산물이었던 모직물을 만들기 위해 아르노 강에서 양모를 씻거나 염색을 하던 사람들을 '치옴피(Ciompi)라고 불렀다. 이들은 도시의 가장 하층 계급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길드에도 가입하기 어려웠다. 길드에 가입할 수 없으니 법적인 권리도 보호받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제대로 자녀를 키울 수 없어 결국 보육원에 아이를 버리게 된다. 가혹한 환경을 견디다 못해 이들은 '치옴피의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이런 하층 노동자들 만큼이나 보호받지 못했던 이들이 길거리의 매춘부였다. 예나 지금이나 매춘부에 대한 시각이 고울 리 없다. 중세시대, 일찍 남편과 사별한 여자들이나, 전쟁과 질병 등으로 부모를 잃은 소녀들이 혼자 길거리에서 살아남기는 특히 더 어려웠다.

공화정을 유지하던 피렌체에서도 시민의 자격은 성인 남성으로 제한되었다. 때문에 가족이나 친척 중 자신을 보호하고 대변해 줄 남자가 없는 경우 제대로 된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피해를 구제받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주변 성인 남성들의 성적 학대에 시달리기도 했다. 길거리 여성이 어디에서 강간을 당해도 제대로 된 법적 보호를 받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이런 여성들은 제대로된 직업도 구할 수도 없었고, 결혼을 하려고 해도 지참금을 마련할 수 없어 결국 매춘으로 빠질 수 밖에 없었다.

16세기에는 정부에서 매춘부 관리 기관을 만들어 매춘 영업 등록을 받았다. 이 등록을 하기 위해 돈을 내야 했으며, 정해진 구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노란색 두건이나 수건 등으로 자신의 직업을 표시해야 했다. 한 마디로 공창제를 실시한 것인데, 등록비를 내지 못하거나 정해진 구역을 벗어 났다가 발각되면 무거운 벌금을 물어야 했다.

이런 매춘부들은 항상 원치 않는 임신의 위험에 놓여 있었다. 아이를 낳더라도 궁핍한 환경으로 인해 엄마가 직접 딸에게 매춘을 알선하기도 했다. 어린 소녀들은 비싼 화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아이가 자신처럼 살기를 바라지 않는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보육원에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갓 태어난 아이를 보육원에 맡기면서도 부모들은 언젠가 다시 만날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훗날 아이를 찾을 수 있도록 반으로 쪼갠 자신의 목걸이나 기타 다른 증표를 아이 몸에 걸어 두었다. 현재 인노첸티 보육원에는 이런 증표들을 모아 두었는데, 보고 있자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현재까지도 이곳은 버려지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입양 가정과 연결해주고 있는데, 이곳에서 입양되어 성장한 이들의 사연 역시 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찾기 위한 여정은 참으로 길고 고달프다.

각 칸마다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고, 그 안에 아이들이 처음 들어올 때 지녔던 증표들이 보관되어 있다. 현재 전시된 것은 주로 1800년대 아이들의 것이다.
▲ 증표가 전시된 곳 각 칸마다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고, 그 안에 아이들이 처음 들어올 때 지녔던 증표들이 보관되어 있다. 현재 전시된 것은 주로 1800년대 아이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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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훗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이 목걸이를 아이에게 걸어줬을 것이다.
▲ 반으로 쪼개진 목걸이 부모는 훗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이 목걸이를 아이에게 걸어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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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 이 곳에서 성장했던 이들의 사연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
▲ 90년대 후반 이곳으로 들어온 소녀의 사연 최근까지 이 곳에서 성장했던 이들의 사연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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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피렌체, #인노첸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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