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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제목이 인상적이다. 맨 뒤 작가의 말을 읽어보면 편집자가 지어준 제목인 듯하다. 역시 다 읽고 나서도 이 소설을 정확히 말해주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은 말 그대로 '딸에 대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엄마인 화자가 딸과 그의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고, 묘사하고, 개입하고, 그로 인해 결국 자신이 흔들리고 변화하는 이야기다.

지난해 명절 황금연휴에 엄마와 단둘이 정동진으로 일박 여행을 가던 길,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이 책을 읽었다. 내가 먼저 엄마에게 어딘가를 가자고 제안한 것은 처음이었고, 둘만 길을 나선 것도 처음이었다.

소설 <딸에 대하여>
 소설 <딸에 대하여>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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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책이 제목은 비록 '딸에 대하여'이지만 사실은 '엄마에 대하여'이기를 기대하며 읽었다. 처음 읽는 작가였는데 첫 장부터 대번에 내가 좋아하는 문장의 결이었다. 정갈하면서도 여운이 남는 맛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더욱 기대했다. 엄마 자신의 목소리로 결국 엄마에 대하여 이야기해주기를.

끝까지 읽고 난 감상은 기대가 반 정도 충족되었다는 것이다. 엄마의 목소리로 느껴지긴 했는데, 엄마의 세계는 보이지 않았다. 이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딸의 세계이다. 엄마는 그것으로부터 고통받고 또 변화하는 존재이지만, 어쨌거나 중심에는 딸의 세계가 놓여 있다. 엄마는 그것을 거부하든 받아들이든 타협하든 해야 한다.    

이때 딸의 세계란 것은 나한테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세계이다. 딸은 레즈비언이고, 대학 시간강사 노동자이고, 불의에 저항하고 약자들에 연대하는 운동권이다. 이렇게 일축해서 좀 미안하지만, 일축하지 않을 수도 없는 캐릭터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딸의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자기 정당성이 흔들릴 일이 없기 때문이다. 딸의 세계에서 딸과 딸의 애인과 친구들은 쭉 옳은 일을 하니까. 핍박받기는 하지만 옳지 않은 적은 없다.    

반면 엄마는 발 딛고 선 땅이 끝없이 요동쳐서 뭐라도 잡고 매달려야 한다. 자신도 요양보호사 일을 하면서 인간 존엄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를 겪고, 그것이 결국 딸애가 저항하는 기성사회의 부당함과 맞닿아 있다는 것까지도 버겁게 깨달아야 한다.    

말하자면 나는 이 소설이 엄마가 딸을 향해 쓴 '딸에 대하여'가 아니라, 딸이 엄마를 향해 쓴 '나에 대하여'로 읽혔고, 그것이 아쉬웠던 것 같다. 대신 소설 바깥의, 더 소설적인 내 엄마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2시간 반 거리의 강릉까지 6시간 가까이 걸리고 있었고, 버스 안에서 소설책 한 권을 다 읽을 판이었다. 문득문득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리면 내 엄마의 옆모습이 보였다. 익숙하고 낯선 얼굴.   

최근 몇 년 사이 나는 엄마라는 사람을 새로이 알아가고 있다. 나한테는 엄마야말로 그 유명한 '다시 만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났을 때부터 가장 가까웠던 세계임에도, 지금 완전히 새롭게 만나고 있다.

어릴 적 기억 속 엄마는 너무나 예민하고, 우울하고, 상처투성이, 아프지 않은 데가 없고, 많이 먹는 것 말고는 말썽 한번 부린 적 없는 나를 파리채나 잡지로 때리기도 하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소리를 자주 지르고, 살 빼라는 소리밖에 안 하고, 무엇보다 아빠에게 버림받은 안쓰러운 사람.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엄마는 분명히 그 과거의 연장선에 있지만 많이 다른 사람이다. 고통에서 삶의 정수를 길어 올린 사람. 신앙 없이도 이겨낸 사람. 현명하고 강하고 빛나는 사람. 타인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 즐길 줄 아는 사람. 넉넉한 사람. 연애를 잘하는 사람. 시크하면서도 애교 있는 사람. 예쁜 사람. 정말 예쁜 사람.   

단순히 엄마가 그간 경험 속에서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그거야 당연하겠지만, 엄마만 달라졌다면 나는 지금의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나 또한 끝없이 달라졌기 때문에 지금의 엄마와 다행히, 극적으로 마주친 것이다.

십대는 물론이고 이십 대 시절까지도, 엄마가 대체 왜 저러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엄마는 대체 누구인지...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오래된 비디오테이프를 되감아 보듯이 장면 장면을, 부분 부분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 그때 그래서 그랬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너무 오래 밀린 숙제지만 늘 그렇듯이 나는 진도가 겁나 빠른 편이다.   

딸의 세계가 변화하고 엄마의 세계가 변화하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두 세계가 만나는 이야기. 이것이 소설 바깥에서 나와 내 엄마가 지금 겪고 있는 이야기이다. 누가 써주면 좋겠지만, 안 쓰여져도 상관없는 이야기.

내가 이쪽 끝에서 걸어간다.
엄마가 저쪽 끝에서 걸어온다.
마주쳤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덧붙이는 글 | 내 이십 대 전체를 쥐고 흔든 것은 너무나 자명하게도 ‘소설’인데, 더 정확히 말하면 ‘남자가 쓴 소설’이었다. 지금은 어느덧 반대가 되어서, 가장 사랑했던 박민규를 절독했으며 / 전작을 사서 모았던 김도언은 이름도 마주치고 싶지 않고 / 거침없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천명관의 세계관이 진부하게 느껴진다. 김영하나 김연수 같은 명실상부 지적이고 세련된 중견 작가의 소설을 더 이상 업데이트해서 읽어야 할 필요가 안 생기고, 조정래 김훈 황석영 등 할아버지들의 훈화 말씀은 뭐 말할 것도 없다. 그것들을 다 제하고 나니 여자 소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인데, 사실 여자들은 늘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잘.

그렇다고 내가 어떤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기점으로 일부러 남소설 여소설을 가르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냥 어느 날 서점에 가서 쓸어 담아온 책들이 다 여소설인 걸 발견하며 놀라고... 뭐 그런 흔한 이야기.



딸에 대하여

김혜진 지음, 민음사(2017)


태그:#딸에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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