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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부 루아르(Loire) 강변의 투르(Tours)에서 출발한 기차는 동쪽의 작은 기차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은 아직도 아침 안개 속에 아스라이 잠겨 있었다. 차창 밖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포도밭 사이로 작은 승용차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초원 위에 세워진 집들은 목가적인 풍경 속에 있었다.

기차는 30여 분을 달려 역무원도 없는 작은 쉬농소(Chenonceaux)역에 도착했다. 아침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역 주변에는 안개가 가득 끼어 있었다. 겨울철이지만 다행히 기온은 따뜻해서 앞으로 찾아갈 쉬농소 성(Château de Chenonceau)에 대한 답사길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루아르 강변에 늘어선 프랑스 고성에 대한 첫 여행이라는 설렘으로 마음도 한껏 부풀어오른다.

프랑스 중부지방을 적시며 흐르는 루아르 강변에는 중세시대 프랑스 왕들이 정성을 들여 만들어놓은 고성(古城)들이 모여 있다. 프랑스 왕들이 루아르 강변에 고성을 많이 지은 것은 루아르 강변이 권력의 중심인 파리에서 멀지 않으면서 별장 지역이라 할 만큼 훌륭한 풍광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르사이유 궁전이 장엄하고 남성적인 성이라면 이 루아르 강변의 고성들은 정원과 나무, 전설이 어우러진 여성적인 성들이다. 쉬농소 성은 유네스코(UNESCO)가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루아르 계곡의 여러 고성 가운데 한 곳이다. 그리고 수많은 여인들의 이야기가 담긴 루아르의 고성 중에서도 인기가 가장 높고 특히 여성들이 좋아하는 성이 바로 쉬농소 성이다. 쉬농소 성은 죽기 전에 보아야 할 세계 건축물 중의 한 곳으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아침 안개 속에 플라타너스 숲길이 여행객을 반긴다.
▲ 쉬농소 성 가는 길 아침 안개 속에 플라타너스 숲길이 여행객을 반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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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른 오전 시간에 쉬농소 성을 향해가는 길 입구에 섰다. 길 입구에서 한번 걸음을 멈추고 다시 풍광을 둘러보게 되는 것은 아침 안개 속에서 성까지 이어지는 울창한 숲길을 만났기 때문이다. 숲길 밖을 둘러보니 숲길을 둘러싼 울창한 숲까지도 탄성을 토하게 할 정도로 깊고 푸르렀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키가 큰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이 마치 도열한 병정처럼 여행객들의 답사길을 호위해 주는 것 같았다. 거목 사이사이를 걸을 때마다 싱그러운 나무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는 것만 같았다. 이곳의 플라타너스들은 서울의 큰 길가에 심어진 플라타너스 가로수들과 달리 넓은 대지를 딛고 하늘로 곧게 뻗어 있었다.

내가 걷고 있는 긴 가로수길 앞으로는 프랑스 여성 2명 만이 한가로이 길을 걷고 있었다. 성까지 걸어가는 길이 아득히 멀어 보였지만 길의 시야가 시원스러워서 전혀 지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아름다운 숲속을 걸으면서 눈이 맑아지고 저절로 힐링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빨리 걸을지, 천천히 걸을지를 마음속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천천히 산책하면서 성 앞으로 다가갔다.

양탄자를 벽에 건 이유

길 끝, 안개 속에 귀부인들의 성, 쉬농소 성이 보였다. 성의 정원에 들어서기 전에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냈다. 개인이 소유한 성이어서인지 입장료는 꽤 비쌌다. 나는 이 정도의 입장료를 받는 성이라면 성 내부와 정원의 관리 상태가 상당히 양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매표소 아가씨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를 묻더니 한국어로 된 쉬농소 성 팸플릿을 준다. 번역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줄 만한 자료였다.

매표소를 지나니 또 다른 가로수길이 성의 정원으로 인도를 시작했다. 나는 가로수 길을 따라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쭉 걸어갔다. 그 길 끝에 우아한 쉬농소 성이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프랑스 르네상스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는 자태였다. 이른 아침부터 기차를 갈아타고 찾아온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움이다.

프랑스 여인들의 사랑과 질투가 남은 여인의 성이다.
▲ 쉬농소 성 프랑스 여인들의 사랑과 질투가 남은 여인의 성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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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주 보고 있는 스핑크스 석상 사이를 지나 성 바로 앞에 섰다. 성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얼굴을 들어 성 전체의 외관을 훑어보았다. 쉬농소 성에는 르네상스 시기부터의 연륜이 지붕에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성 전제가 거대하기도 하지만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워서 경이로웠다. 3층의 육중한 몸체가 강 위에 내려앉듯이 압도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회청색의 지붕 위에는 현란하게 장식된 3개의 장식창이 뚫려 있다. 지금 봐도 창문과 굴뚝 장식의 디테일이 놀랍기만 하다. 망루같이 생긴 작은 탑인 터릿(turret)은 점판암 석재로 둥글둥글하게 만들어져서 성의 전면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장식의 아름다움은 프랑스 당대 최고 왕실 장인의 손끝에서 만들어져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 아름다움이다.

나는 성 정면 중앙의 작은 초록색 나무문을 열고 성안으로 들어섰다. 성 1층의 왼쪽 방으로 먼저 들어서니 왕비들을 경호하던 근위병들의 근위병실이 나왔다. 다소 단순한 모양의 벽난로가 근위병실 한가운데에 있는데, 놀랍게도 벽난로에 불을 피운 채 실제로 난방을 하고 있었다. 과거 문화유산인 벽난로에 나뭇가지를 태워서 불을 피우는 모습이 참 실용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왼쪽이 디안, 오른쪽이 카트린
 왼쪽이 디안, 오른쪽이 카트린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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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방으로 들어서자 드디어 쉬농소 성의 여주인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앙리 2세(Henri ∥)의 왕비였던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의 초상화가 벽 위에서 여행객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쉬농소 성은 무려 6명의 여성이 주인이 되었었는데, 성안에 많은 여인들이 살다 보니 프랑스 왕가와 귀족의 혈투와 치정관계가 성안에 고스란히 담기게 되었다. 그래서 쉬농소 성은 '귀부인의 성(Château des Dames)', '여인의 성'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벽난로 곳곳에 카트린 왕비의 친정인 메디치 가의 문장이 남아 있다.
▲ 쉬농소 성 벽난로 벽난로 곳곳에 카트린 왕비의 친정인 메디치 가의 문장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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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의 초상화가 있는 방에는 성경의 삼손의 생애를 묘사한 양탄자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왕비의 방답게 벽난로도 섬세하게 꾸며져 있다. 벽난로를 장식하는 철판을 자세히 보니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문양이 보인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숱하게 보았던 메디치 가문의 문장(紋章)이다. 카트린 드 메디치가 피렌체 공국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었기 때문에 벽난로에 자신의 친정 문장을 새겨 넣었던 것이다.

앙리 2세를 사로잡은 원조 '팜므파탈'

디안의 푸르고 단아한 침대가 그녀의 취향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 디안의 침실 디안의 푸르고 단아한 침대가 그녀의 취향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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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방에는 디안 드 푸아티에(Diane de Poitiers)가 남긴 푸른 침대가 여인들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 성의 첫 여인은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가 아니라 앙리 2세의 정부(情婦)였던 디안 드 푸아티에였다. 앙리 2세는 이 성을 그의 왕비가 아니라 그가 총애하던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선물했던 것이다.

디안 드 푸아티에의 침실 내부를 둘러보면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럽다. 이곳에서 디안의 초상화를 살펴보니 디안과 카트린 중 누가 더 아름다웠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디안의 침실은 오랜 역사로 인해 바닥만 닳았을 뿐 지금 당장이라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했다.

그녀의 침대 뒤 벽면 전체에는 거대한 크기의 양탄자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고색이 창연한 이 양탄자는 다채로운 색상의 실로 그림이 그려져 있고, 양탄자의 중심에는 프랑스 왕실의 여인들이 잔뜩 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양탄자를 주로 바닥에 깔지만 프랑스에서는 아름다운 양탄자를 벽에 걸어 장식용으로 사용도 하고 겨울에는 두꺼운 양탄자가 바람을 막아 난방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디안은 앙리 2세의 부왕이었던 프랑수아 1세(Francois I)의 정부였었다. 그런데 디안이 젊은 앙리 2세와 사랑을 나누게 되면서 프랑스 왕 2대에 걸친 정부가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 왕 앙리 2세는 이탈리아에서 막강한 배경을 가진 메디치 가문의 여인 카트린과 정략 결혼을 한 상태였지만 그의 마음은 팜므 파탈(Femme Fatale), 디안에게 있었다.

디안은 앙리 2세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지만 자신의 무기인 미모를 유지하면서 끝까지 앙리 2세의 사랑을 잃지 않았다. 디안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백옥 같은 피부, 가는 허리, 윤기 있는 갈색 머리 등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다고 한다.

그녀는 왕의 사랑을 이용하여 축제 즐기기에만 마음이 있었다는 사람도 있고, 산전수전 다 겪으며 돈과 권력을 사랑했다는 사람도 있고, 또한 그녀가 영리하고 세련되기 이를 데 없는 궁정의 귀부인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니, 아무래도 그녀는 권력지향적인, 절세의 미인이었던 것 같다.

카트린은 태어나면서 부모를 모두 잃은 불우한 여인이었다. 쉬농소 성에 남은 그녀의 초상화를 보고 있으니 홀로 자라면서 수양하게 된 인내와 슬기로움이 그녀의 눈빛에 남아 있다. 그녀와 앙리 2세는 정략으로 결혼을 한 사이였지만 앙리 2세도 슬기로운 그녀를 존중하고 대우해 주었다고 한다.

팸플릿을 보니 예상외로 카트린은 앙리 2세와의 사이에 자녀 10명을 낳았다고 한다. 앙리 2세는 디안을 사랑했지만 카트린과도 부부의 연을 잘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카트린의 자녀들은 대부분 그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그녀의 아들 세 명이 차례로 프랑스의 왕이 됨으로써 그녀는 왕실 배후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현명한 그녀는 권력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지 않았다. 그녀는 정권에서 한발 물러서 있음으로써 프랑스 국민들의 폭넓은 신망을 받았다. 권력의 정점에서 자중할 줄 알았던 카트린은 인내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왕비 카트린은 앙리 2세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게 되자 의지할 곳이 없게 된 연적 디안에게 복수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에서는 우리나라 드라마 연속극처럼 무지막지한 복수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디안의 쉬농소 성과 왕관의 보석만을 돌려받은 후 디안을 편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한 여인의 '관용'의 순간이었다. 디안이 60대까지 살다가 간 것은 현명한 카트린의 관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쉬농소 성에서 살벌한 치정극의 스토리를 은근히 기대했던 나에게 카트린은 관용이 담긴 반전을 보여주었다.

창밖으로 강이 흐르는 '꿈의 주방'

지금은 갤러리로 사용되는 이 대회랑은 강물 위에 세워져 있다.
▲ 쉬농소 성 대회랑 지금은 갤러리로 사용되는 이 대회랑은 강물 위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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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의 방을 지나니 성 바깥이 보이고 성 바깥에 셰르(Cher)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셰르 강은 겨울에도 수량이 풍부해서 겨울의 풍경을 윤택하게 하고 있었다. 이 셰르 강의 물줄기 위로는 성의 건물이 회랑이 되어 신비롭게 연결되어 있었다.

카트린 왕비가 성의 주인이 되면서 성과 강 건너편을 연결하는 아치형 다리 위에 이 대회랑을 만든 것이다. 카트린 왕비가 살던 당시 이 대회랑은 중세 프랑스 왕정의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다. 나는 대회랑 연회장에 서서 이곳에 가득 차 있었을 프랑스 왕족들의 호사스러운 모임을 상상해 보았다.

나는 강 위를 건너는 기분으로 대회랑의 반대쪽 끝까지 걸어갔다. 대회랑의 양쪽 끝에는 난로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난로 중 한 개는 진짜 난로가 아니라 모양만 그려진 난로였다. 대회랑 양쪽 끝에 대칭형의 난로를 둠으로써 성의 구도를 완벽하게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대낮에 불을 밝힌 샹들리에도 옛 모습 그대로 장엄하고 창문 앞마다 갖추어진 목제 의자도 참으로 안락하다.

게다가 대회랑의 바닥은 온통 희고 검은 대리석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현재는 미술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도 사용되고 있는데 미술품을 걸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아닐까 싶다. 현재의 건축비로 이러한 대회랑을 짓는다면 정말 천문학적인 건축비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곳이다.

주방의 벽 곳곳에 고풍스러운 조리기구가 가득 붙어 있다.
▲ 쉬농소 성 주방 주방의 벽 곳곳에 고풍스러운 조리기구가 가득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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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랑을 지나 지하로 내려가보니 1521년 당시 쉬농소 성의 음식을 책임졌던 주방이 나온다. 성의 크기에 비해 아주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주방이다. 현재 전 세계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프랑스 요리가 대중화되기 전, 모양과 맛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 프랑스 고성들의 주방이었다.

주방의 벽에는 고풍스러운 조리기구들이 장식품처럼 빽빽하게 걸려 있고, 그릇장, 물통, 식기, 항아리들이 매끄럽게 잘 닦인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주방의 냄비들에는 중세시대 당시 나무를 태워서 음식을 조리한 흔적들이 불에 그을린 채 그대로 남아 있다.

주방의 위치가 성의 지하라고는 하지만 성이 강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창문을 열면 흐르는 강물이 보였다. 아마도 전망이 이렇게 시원한 주방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 주방은 주방 인테리어와 소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정말 마음을 빼앗길 만한 곳이다.

하나의 성, 두 개의 정원

쉬농소 성은 셰르 강 위에 세워진 물 위의 성이다.
▲ 쉬농소 성 아치교 쉬농소 성은 셰르 강 위에 세워진 물 위의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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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인들의 방을 모두 돌아보고 강바람 시원한 성 밖으로 나왔다. 성 입구에서 돌아 나와 강변으로 가니, 조금 전에 보았던 대회랑 아래에 다섯 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다리가 버티고 있었다. 석조 아치교가 성의 하단을 지탱하고 강 위에 서 있는 독특한 구조는 처음 접하는 모습인데, 정녕 아름답고 아름답다.

긴 회랑을 포함한 장방형 모양의 성의 본채는 남북으로 연결되어 셰르 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강 위에 다리처럼 세워진 '물의 성'을 성 밖으로 나와 강변에서 보니 훨씬 더 아름다웠다. 정원의 남쪽 끝에 서서 쉬농소 성과 강물을 함께 바라보는 전경이 쉬농소 성 전경 감상의 하이라이트이다. 나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을 걸작 건축물을 감상하며 한동안 강변에 앉아 있었다.

여인들의 사랑과 질투가 함께 흘렀을 강물은 지금도 변함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산 위에 요새로 세워진 다른 성들과 달리 성 건축물 바로 아래에 풍부한 강물이 흐르니 마음이 시원하고 여유롭다. 강물을 보고 있으려니, 우리나라에서는 천연기념물인 수달이 강물 위로 잠깐 머리를 내밀었다가 들어갔다. 수달이 서식하고 있으니 저 강물 속에는 수달의 먹이인 물고기도 많을 것이다.

성 밑을 흐르는 셰르 강도 아름답지만 쉬농소 성의 아름다운 정원이 또한 성과 잘 어우러져 있다. 성의 내부만큼 정원도 아름답다. 프랑스에서는 성뿐만 아니라 성 주변의 정원도 중시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생전 디안의 성격대로 시원시원하고 아름답다.
▲ 디안의 정원 생전 디안의 성격대로 시원시원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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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 동편에 자리 잡은 디안의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쉬농소 성의 첫 주인이었던 디안이 만든, 쉬농소 성 최초의 정원이다. 디안의 정원은 그녀가 살던 중세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디안의 정원은 주인 디안의 화려한 외모를 그대로 닮아 있다. 디안의 정원은 요염하고 자신감 있게 넓게 펼쳐져 있다.

고전적이고 강한 그녀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 카트린의 정원 고전적이고 강한 그녀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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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 편, 성의 서쪽에는 성을 빼앗은 카트린이 꾸민 범상치 않은 정원이 있다. 카트린의 정원도 정원을 꾸민 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닮아 있다. 카트린의 정원은 르네상스 스타일로 대단히 고전적이며 강건하다. 원형의 연못을 중심으로 6개로 구획된 은밀한 배치는 카트린이 품었던 절제된 인내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두 연적의 정원은 쉬농소 성을 가운데 두고 묘하게도 마주 보고 있다. 성을 중간에 둔 두 여인의 정원의 배치가 너무나도 인상적이다. 마치 두 여인이 서로를 바라봐 달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자신의 삶을 살아냈던 두 여인. 후대 사람들의 지지와 비판이 있긴 하지만, 수백 년 후 먼 동양에서 온 내가 두 여인을 평가하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두 여인의 속삭임을 멀리하고 나는 쉬농소 성 정원 밖으로 나섰다. 다시 내 앞으로 아름다운 플라타너스가 손짓하고 있었다.


태그:#프랑스, #카트린, #프랑스 여행, #투르 , #쉬농소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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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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