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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6일,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의 한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이 진행됐다.
▲ 이일만 선생님 빈소 사진 2018년 1월 26일,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의 한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이 진행됐다.
ⓒ 구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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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 어느 날, 다급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동안 일본에서 문화재환수운동에 도움을 주신 이일만 선생(73, 도쿄강제징용 진상조사단 사무국장)이 1월 19일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부고가 여기저기서 날아들었고, 급히 일본에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장례식장에 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내가 이일만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다. 첫째로 공식 석상에서 우연히 만나는 경우다. 선생님을 처음 뵌 날도 도쿄지방법원에서 한일협정 문서 공개 판결이 나던 날이었다. 또 문화재 관련 일본 단체와 함께하는 공동 세미나에서 만날 수 있는데, 누가 참석할지 모르는 문화재 환수 회의에서는 선생님을 만나도 누구든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둘째로는 통일부의 '간접접촉신고'를 한 뒤 서면으로 번역 등을 부탁할 때다. 이것은 직접 만날 수 있는 건 아니고 문화재 환수 문제와 관련해 업무적인 연락만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세 번째로 직접 만날 수 있는 방법은 통일부에 '직접접촉신고'를 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까다롭냐고요? '조선'이기 때문입니다

2012년, 한일협정 문서 공개 재판에 승소하자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왼쪽이 이일만 선생이다.
▲ 2012년 한일협정 문서 공개 재판 승소 2012년, 한일협정 문서 공개 재판에 승소하자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왼쪽이 이일만 선생이다.
ⓒ 구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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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하나 만나는데 뭐 이리 까다롭느냐 묻는다면... 그가 일본에 사는 '조선 국적자'이기 때문이다. '조선'이라 하면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나라이며 1897년 대한제국을 거쳐 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조약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국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등으로 인해 일본에 이주하게 된 조선인들은 해방 이후 일본에 머무르게 됐는데 이때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지 않고 남한이나 북한 국적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늘도 통일된 조국을 기다리며 국적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이일만 선생은 참여정부 시절, 서울에 온 적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 광화문 대형서점에 들러 전자사전을 하나 구입했다. 일본어를 번역할 때 사전에 있는 일한사전이 무척이나 도움이 된다고 했다. 10년 가까이 지난 2014년의 어느 날, 이일만 선생은 전자사전이 고장났는데 고칠 방법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때는 스마트폰의 발달로 전자사전 시장이 쇠퇴기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A/S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새로 사야겠는데, 요즘은 한국에서도 좋은 전자사전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씀드렸다. 선생의 부고 소식을 접한 뒤 그때 전자사전을 못 고쳐드린 게 마음에 걸려 펑펑 울었다.

꽉 막힌 교류

참여정부 당시에는 입국허가가 비교적 쉬웠음을 알 수 있다.
▲ 2007~2017 조선적 재일동포의 여행증명서 신청.발급.거부 건수 및 발급률 참여정부 당시에는 입국허가가 비교적 쉬웠음을 알 수 있다.
ⓒ 심재권 의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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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에 사는 조선 국적자를 무국적자로 분류한다. 그들이 한국에 올 수 있는 방법은 임시여권 발급뿐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에는 임시여권 발급률이 높아 조선 국적자가 비교적 자유롭게 한국에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부터 임시여권 발급율은 급격하게 하락했다.

2017년 8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 기념사에서 "재일동포의 경우 국적을 불문하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고향 방문을 정상화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일만 선생을 서울에서 볼 날이 멀지 않았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선생이 입국을 준비한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서울에 그렇게 오고 싶어하셨는데, 왜 소식이 없을까 궁금해하는 도중, 조선 국적자가 영사관을 찾아가 입국 신청을 해도 외교부가 처리해주지 않는다는 기사를 접했다.

혹시 '조선 국적자'라 하면 일본에 살고 있는 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들은 남한도, 북한도 선택하지 않은 우리 동포일 뿐이다. 법률상 지위는 무국적자인 난민이다.

통일부 홈페이지에 게재된 북한주민접촉과 관련된 개념에는 조선 국적자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다.
▲ 통일부 홈페이지 북한주민접촉 통일부 홈페이지에 게재된 북한주민접촉과 관련된 개념에는 조선 국적자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다.
ⓒ 통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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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적 재일동포를 만나기 위해 통일부에 '북한주민 접촉신고'를 해야 하는 건 무리한 법 적용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주민 접촉신고라는 단어만 봐도 부당하다는 게 입증된다. 그들은 북한 주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국적자인데 왜 북한 주민인가. 북한주민이라 함은 북한 땅에서 북한 국적을 갖고 거주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일본에 거주하며 조선 국적을 갖고 사는 그들을 통일부는 왜 북한 주민이라고 판단하는 걸까. 과도하다.

법률 명확성의 원칙은 처벌하고자 하는 행위와 대상이 무엇인지 법에 명확하게 규정돼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 법률에도 명시 돼 있지 않은 조선 국적자를 북한 주민과 동일하게 다루고 있다. 이것은 죄형법정주의가 표방하는 법률의 명확성에 어긋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불러드리지 못했습니다

2013년, 도쿄국립박물관이 오구라 컬렉션 중 투구와 갑옷을 공개햇다. 이에 한국, 일본 문화재 관련 단체들이 반환운동 전개 방법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이일만 선생님이 반환 운동과 관련하여 발표 하고 있다.
▲ 오구라 컬렉션 반환 세미나 2013년, 도쿄국립박물관이 오구라 컬렉션 중 투구와 갑옷을 공개햇다. 이에 한국, 일본 문화재 관련 단체들이 반환운동 전개 방법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이일만 선생님이 반환 운동과 관련하여 발표 하고 있다.
ⓒ 구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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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만 선생은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내게 노래를 한 곡 부르라 청했다. 처음에는 너무 쑥쓰러워 주저하며 불렀으나 언제부턴가는 헤어지기 전에 당연히 불러드려야 할 노래로 인식했다. 노래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내가 장례식에 참여할 수 없었던 이유는 통일부의 직접 접촉 신고가 나긴 났으나 내가 속한 단체이름으로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체 대표만 참석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별할 수 있는 기회마저 사회적 판단에 따라야 하는 일이 2018년에도 벌어지고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두고 '평양 올림픽'이라면서 비아냥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이들을 볼 때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말이 얼마나 가슴 절절한 말인지 어쩜 그렇게도 이 말의 가치를 모르는지 화가 난다.

올해는 해방된 지 73주년이 되는 해다. 그런데 나는 왜 같은 민족의 장례식에도 갈 수 없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빼앗긴 들에 봄은 언제 올 것인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태그:#이일만, #조선국적자, #통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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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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