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에 출연한 배우 이명행 포스터.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에 출연한 배우 이명행 포스터. ⓒ 악어 컴퍼니


무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데는, 사랑하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다. 나는 무대 위에서 만들어지는 낭만에 취한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무대 위의 공기는 객석에 앉아 있는 나를 설레게 한다. 실시간으로 구현되는 환상이 나를 꿈꾸게 한다. 무대와 객석이 하나 되는 순간, 극은 나에게 속삭인다. 함께 꿈꾸자고. 희망, 사랑, 용기, 정의, 이상 등 그게 무엇이든 지금 이 현실보다 나은 현실을 그려보자고.

무대는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 추악한 현실을 그려내든, 인간의 그림자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든, 빛나는 미래를 제시하든, 숭고한 인간의 신념을 표현하든 상관없다. 방법이 어떻든, 공연은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관객을 치유하고, 멋진 내일을 만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관객에게 준다.

이런 공연을 만드는 중심에는 배우가 있다. 연극의 3요소 중 어느 하나 중요치 않은 것이 없지만, 희곡과 관객을 잇는 매개체가 바로 배우이다. 마치 무당이 누군가의 영(靈)을 자신의 몸에 빙의시켜 그를 대리하듯, 배우는 그 순간 자신이 연기하는 사람을 대리하고 그를 대변한다. 배우는 그래서 과거와 미래를 오가고,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며, 성별과 나이와 같은 경계를 넘어서 희곡 속 인물을 대변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배우를 통해 목소리를 얻고,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각자의 인물들이 서로 공명하며 종이 위 글자로만 존재하던 세계를 무대 위에 구현한다. 비록 커튼콜과 동시에 끝나버릴 마법이지만, 그 마법 같은 세계는 관객 각자의 마음속에 선명히 각인되어 누군가의 평생을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작품을 사랑하는 만큼, 내가 사랑하는 배우의 이름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이다. 땀을 쏟아내며, 혼을 담아 관객을 매료시키는 그들의 연기와 노래를 사랑한다. 그런 연기와 노래를 보여준, 그 순간 정말로 작품 속 인물에게 생명력을 보여준 배우를 사랑한다. 그런데 그 사랑이 이토록 사무치는 배신감으로 돌아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다른 배우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그였단 말인가.

배우 이명행이 공연계에 준 충격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제작사 악어 컴퍼니 측은 11일 배우 이명행의 성범죄 의혹에 대해 사과했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제작사 악어 컴퍼니 측은 11일 배우 이명행의 성범죄 의혹에 대해 사과했다. ⓒ 악어 컴퍼니


이명행.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를 뜨겁게 달구고, 수많은 기사(라는 이름의 정크 데이터)가 '복사, 붙여넣기'되거나 자극적으로 편집되어 이 가상의 세계에 흩뿌려졌다. 그는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중도하차했다. 최근 그가 여성 스태프를 향해 저지른 성범죄(추행과 희롱을 포함한)가 익명의 누군가에 의해 폭로된 직후였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는 눈치가 많았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황과 시기 등이 거론됐다. 특히 몇몇 극장에서 그의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고, 그래서 출연 혹은 출입금지 당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며 폭로는 힘을 얻었다(블랙리스트 관련 건에 대해, 해당 극장과 소속사 측 모두 공식적으로는 부인하고 있다).

올림픽 취재 때문에 서울을 벗어나 강릉에 머물면서 이 소식을 뒤늦게 봤다. 보고 나서 손이 떨리며 일이 잡히지 않았다. 사실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덧없는 기대는 때때로 사람을 기만한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의 기획사인 악어컴퍼니에 따르면, 악어컴퍼니가 이같은 사실을 처음 인지한 것은 지난 9일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명행 배우의 소속사인 한엔터테인먼트에 사실 관계 확인을 요청했다. 소속사는 다음날인 10일, 이명행 배우의 하차를 기획사에 통보했다고 한다. 10일과 11일, 기획사의 캐스팅 변경에 관한 공지와 소속사를 통한 배우의 사과문이 SNS를 통해 올라왔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측은 지난 10일 캐스트 변경 공지를 게재했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측은 지난 10일 캐스트 변경 공지를 게재했다. ⓒ 악어 컴퍼니


 배우 이명행의 소속사 한 엔터테인먼트는 지난 11일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문을 게재했다.

배우 이명행의 소속사 한 엔터테인먼트는 지난 11일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문을 게재했다. ⓒ 한 엔터테인먼트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고 작품에서 하차했지만, 그를 향한 관객의 실망과 분노는 지속되고 있다. SNS 등에는 그의 과거 성추행 이력에 대한 추가적인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이명행 배우뿐만이 아니라 다른 연출가나 기획자, 대표 등에 대한 이야기도 취재와 추가 폭로를 통해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미투 운동'의 바람이 공연계까지 불어닥쳤고, 그 바람을 따라 공연계 전체가 파도치게 된 것이다.

한 공연 관계자는 "이명행 배우의 소문에 대해서는 몇 달 전에 이미 들었지만, 처음 들었을 땐 그냥 루머라고만 치부하고 믿지 않았다"라면서 "그렇게 의식 있는 척, 좋은 사람인 척하더니 이렇게 실망감을 안겨줄 줄 몰랐다. 공연계를 떠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이런 일을 하고 다닐 줄 상상도 못했다"고 덧붙였다. 익명의 다른 관계자 역시 "처음에 이야기를 듣고 귀를 의심했다. 진짜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라면서 "공연하러 온 날 분장실에서 내가 봤던 그 모습이 그 사람의 다가 아니라는 생각에 소름 끼친다"라고 말했다.

이명행 배우의 이번 성추행 사건이 공연계에 큰 충격을 준 건 하나, 그가 대외적으로 신사적이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사람이었으며 주변 사람들과도 그런 관계를 만들어왔던 것. 둘,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진보적인 메시지를 가진 작품이 많았고, 성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 등을 주로 연기했다는 것(물론, 성범죄에 있어서는 좌우가 따로 없다. 오히려 위선이라는 가면을 쓰고 진보계에 발생한 성범죄건만 해도 수두룩하다. 진보 논객이 데이트 폭력을 저지르고, 진보 정당이나 시민단체 활동가가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피해자를 '꽃뱀'이라는 프레임에 몰아넣어 윽박지르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이명행을 가까이서 보고 응원했던 사람들은 '설마, 내가 아는 그 사람이 그랬을 리가'라는 생각에 소문을 들어도 애써 무시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그는 일상에서도 연기를 해왔던 것일까.

특히나 본인이 대학로에서 인지도가 있는 남배우라는 기득권을 십분 활용, 여성 스태프(주로 신입)라는 상대적 약자를 주 성추행 타깃으로 삼았다. 여기에 '유부남'이라는 타이틀도 자신의 범죄를 가리는 데 한몫했다. 반듯했던 이미지에 훌륭한 연기력을 겸비한 '믿고 보는 배우'마저 이 지경이었다니, 관객들의 불신은 배우 이명행 개인을 떠나 공연계 전체로 퍼지고 있다. '혹시 내가 좋아하는 다른 배우도 그런 게 아닐까'라는 자문에 단언하듯 부정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하필이면 이명행이었으니까.

여기에 이명행이 지금까지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게끔 터전을 마련한 공연계의 책임도 회피할 수 없다. 그의 진실에 대해 공연계가 알고 있었는지 몰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알았다면, 그를 향한 위험신호들을 진즉 눈치 채지 못하고 제2, 제3의 피해를 방관한 가해자라는 얘기이다. 몰랐다면, 자신들과 함께 일하는 누군가가 한 사람 때문에 상처입고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얘기이다. 때로는 무지도 죄가 된다. 관객들이 공연계 전체에 실망을 표출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돌아와서는 안 된다

숙소 화장실에 핸드폰을 이용해 몰래 여자 동료의 영상을 촬영했던 배우가 실형을 치르고 나와서 무대에 소리소문 없이 복귀했다. 제보를 받고 해당 사건을 취재하는 도중, 한 관계자로부터 항의성 전화를 받았다. '성범죄를 저지른 게 공연계에 그 배우 한 명만 있는 것도 아닌데, 인지도도 별로 없는 이 배우의 과거를 굳이 다시 캐내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게 항의의 요지였다. 하지만 정작 배우 측은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 사건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뉘앙스가 강했다. 그래서 약속했다. 인지도와 관계없이, 앞으로 누가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됐을 때도 글을 쓰겠다고.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다. 때로는 모르고 실수하기도 하고, 알고도 죄를 범하기도 한다. 사람은 그 잘못을 후회하고, 반성하고, 자신을 다져가며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실언이든 뭐든 어떤 누군가가 과오를 저질렀을 때, 죗값을 치르고 나서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기회가 무한정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명행에게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다. 그가 성추행을 저지른 건 아주 먼 과거의 일도 아니고, 최근에 우발적으로 일어난 한 번의 사건도 아니다. SNS상 폭로에 의하면, 몇 년 전부터 오랫동안 수차례 반복된 일이었다. 그때마다 그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그에게 항의하고, 그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잘못된 것이며 피해자에게 큰 상처가 되는 일이라는 것을 누군가는 주지시켰다. 하지만 그는 그때뿐이었고, 그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모두 걷어찼다. 그의 사과문에 성의도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충분한 반성과 성찰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그는 마치 처음 이런 일이 있었던 것마냥, 이게 잘못인 줄 처음 안 것처럼 본인의 죄를 축소했다. 왜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어야 하는지, 나는 그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이명행의 연기를 사랑했다. 그는 시대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며 고통 받는 성소수자였다. 나도 가슴 한 구석이 시큰하게 아파왔다. 그는 보도지침 사건을 폭로하는 친구의 곁에, 또 다른 지침이 되어주고 싶었던 변호사이기도 했다. 나도 그처럼 누군가의 옆에서 버팀목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가 감옥에 갇힌 채 날 서있던 한 혁명가를 사랑했을 때, 그에게 고인 슬픔이 나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가 탈북 후 새로운 터전을 닦으며 희망을 놓지 않는 새터민이었을 때, 그가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남자의 옆에 있던 또 다른 남자였을 때…. 내가 본 모든 이명행이 좋았다. 그래서 이명행을 사랑했다.

이 모든 게 그저 밥벌이를 위한 생활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그는 '좋은 삶'이 '좋은 연기'를 낳는다고,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동료들을 배반했다. 그를 믿고 작품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관계자들을 기만했다. 그의 연기를 사랑하고, 그로 인해 위로 받고 힘을 얻었던 모든 관객을 능멸했다. 그 순간 관객이 느꼈던 모든 좋은 종류의 기억과 감정을 무위로 돌리고, 부정하고, 침을 뱉은 샘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계속 대학로에 발을 붙임으로서, 그로 인해 고통 받았던 피해자들에게 무형의 가해를 지속했다.

그가 용서받는다면, 그가 공연계에 복귀한다면, 그것은 공연계 전체에 잘못된 신호를 주는 하나의 징표이자 사례가 될 것이다. '적당히 사과하고, 적당히 자숙하고, 적당히 돌아오면 된다'는 신호. '성범죄를 저질러도 쉽게 돌아올 수 있다'는 신호. 이미 비슷한 종류의 것들은 공연계에 차고 넘친다. 그런 가운데 또다시 피해자만 더 상처받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부여잡은 채 고통을 견뎌야 한다. 그가 정말 보답하고 싶다면, 범법사실에는 형사적 처벌을 받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가 만약 "연기로 보답하겠다"는 말을 한다면,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공연은 낭만과 환상을 만드는 마법이지만, 그 마법은 인류애에 기초해야 한다. 누군가를 상처입히고, 누군가를 착취하고, 누군가를 침묵하게 하는 기반 위에 선 마법은 존재 자체가 자기부정이다. 공연계는 제2, 제3의 이명행과 같은 배우가, 기획자가, 대표가, 관계자가 없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더는 누구도 권력을 가진 누군가에 의해 상처입고도 사과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가해자는 멀쩡히 하루를 살아가는 와중에 피해자만 삶의 기반을 위협받아야 하는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 나 역시 방관 혹은 무지로 동조했던 가해자가 아닌지 반성한다.

그 악순환을 끊는 작업을, 내가 사랑했던 어느 배우의 이름을, 이렇게 지우는 것으로 시작해본다.

미투 이명행 성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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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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