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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명의 희생자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의 삶이 세월호가 침몰한 지난 2014년 4월 16일에 멈춰 서 있다. <오마이뉴스>는 유가족과 생존자, 단원고 교직원, 민간잠수사, 진도 어민 등 아직도 세월호에서 내리지 못한 사람들의 숨죽인 이야기를 전한다. 다섯 번째로 세월호참사 당시 희생자 수습에 참여한 황병주 민간잠수사의 글을 싣는다. [편집자말]
지난 2014년 5월 3일 세월호 침몰사고 현장에서 민간잠수사들이 입수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2014년 5월 3일 세월호 침몰사고 현장에서 민간잠수사들이 입수를 준비하고 있다.
ⓒ 황대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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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저는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실종자 수색에 참여했던 민간잠수사 황병주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이전에 저는 산업잠수사 황병주였습니다. 1988년에 처음 잠수 일을 시작해 27년간 산업잠수사 일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제 직업은 대리운전기사입니다.

저는 이제 더는 산업잠수사 일을 하지 못합니다. 세월호 실종자 수습에 참여하고 돌아온 이후 저는 일주일에 3번 투석을 받아야 하고, 매일 저녁 수면제를 먹어야만 간신히 잠들 수 있는 몸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산업잠수사 일은 힘들지만, 벌이가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무엇보다 잠수사 일이 좋았습니다. 깊고 고요한 바닷속에서 홀로 잠수를 하며 느끼던 그 자유와 평온함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처럼 바다 깊이 오랜 시 간 잠수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산업잠수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이제는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전히 한 가족의 가장입니다. 그래서 밤마다 대리운전을 합니다.
   
작년 봄 저는 동료잠수사들과 목포신항에 있는 세월호를 보고 왔습니다. 바닷속에서 수없이 드나들던 세월호를 육지에서 바라보니 마음이 참 무거웠습니다. 처음 세월호 선내로 진입하던 순간부터 일방적인 철수 명령을 받고 바지선을 떠나던 날까지 그사이 보고 듣고 겪었던 일들이 모두 생각났습니다.

'세월호 침몰사건' 사흘째인 2014년 4월 18일 오후, 전남 진도군 인근해 사고현장에서 배가 물에 완전히 잠겨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침몰한 세월호를 부력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설치한 리프트 백(공기주머니) 뒤로 해상크레인이 보인다.
 '세월호 침몰사건' 사흘째인 2014년 4월 18일 오후, 전남 진도군 인근해 사고현장에서 배가 물에 완전히 잠겨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침몰한 세월호를 부력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설치한 리프트 백(공기주머니) 뒤로 해상크레인이 보인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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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했던 현장... 지금도 잊히지 않아

2014년 4월 20일 첫 번째 선내진입을 하던 날, 저는 정말 처참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좁디좁은 선실 안에 서로의 몸을 꼭 부둥켜안고 모여 있었습니다. 고통과 두려움으로 가득했을 그들의 모습을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첫 번째 희생자를 수습하고 바지선에 올라와 저는 난생처음으로 통곡을 했습니다. 뱃속의 것을 모두 토해내고 몸속의 모든 수분을 눈으로 코로 입으로 다 흘려내고 나서도 좀처럼 진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놀랐고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렇게 희생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아이들이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서로를 부둥켜안고 구조를 기다렸을 그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다가간 사람이 내가 아니라 해경이었다면, 그때가 4월 20일 저녁이 아니라 4월 16일 아침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제 동료들과 저는 생존자 구조가 아니라 희생자 수습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매 순간 정말 미안했고 그래서 화가 났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청와대 대변인은 실종자 1명당 500만 원의 수당을 받는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500만 원이건 뭐건 우리는 당시 아무런 계약도 하지 않았고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산업잠수사가 아니라 민간잠수사로 달려갔던 거니까요. 계약과 대가를 바라고 간 거라면 결코 그 일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실종자 수습은 500만 원이 아니라 1000만 원을 준다고 해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매번 선내진입을 위해 준비를 할 때마다 우리는 정말 무서웠습니다. 가족을 애타게 기다리는 유가족들을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실종자를 모셔와야겠다는 다짐으로 망설임 없이 입수했습니다만... 솔직히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참혹한 모습을 마주하게 될지 몰랐으니까요.

목포신항의 세월호는 저와 제 동료들에게 희생자들의 절규와 고통을 다시 떠올리게 했습니다. 남겨진 아홉 분의 미수습자에 대한 죄책감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해경에게 쫓겨나다시피 하고도 우리는 우리 손으로 모셔오지 못한 그분들을 생각하면서 여전히 죄책감을 안고 살아갑니다.

지난 2월 정책간담회에 앞서, 2017년 11월 10일 세월호참사 피해자 증언대회가 국회에서 개최됐다. (오른쪽부터) 황병주 민간잠수사, 소명영 진도어민, 김덕영 단원고 교사가 참석하여 증언하고 있다.
 지난 2월 정책간담회에 앞서, 2017년 11월 10일 세월호참사 피해자 증언대회가 국회에서 개최됐다. (오른쪽부터) 황병주 민간잠수사, 소명영 진도어민, 김덕영 단원고 교사가 참석하여 증언하고 있다.
ⓒ 4.16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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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에 육체적 고통까지, 끔찍한 트라우마

우리에게 세월호가 남긴 트라우마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바로 기억과 죄책감입니다. 우리는 정말 더는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때 바지선에서 겪었던 추위와 배고픔과 무시당했던 일들을 더는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때 세월호 안에서 보았던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모습들을 더는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희생자 시신 수습으로 떼돈을 벌지 않았냐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동료 잠수사의 죽음을 우리 탓으로 몰아 재판을 받는 동안의 억울함을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중 단 한 가지도 잊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잊고 싶어 아무리 노력해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혹여 잊었는가 싶으면 어김없이 꿈속에서 우리는 다시 그때 그 세월호 안으로 들어가 있으니까요. 불면에 고통스러우면서도 우리는 그 악몽 때문에 잠드는 것이 또 두렵습니다.

두 번째는 육체적 고통입니다. 당시 실종자 수색을 위한 잠수는 우리가 산업잠수사로 일하며 해왔던 잠수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기본적인 의식주 자체가 없었습니다. 최소한의 의료지원도 이광욱 잠수사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겨우 마련되었습니다. 하루 서너 번씩 반복된 잠수로 인해 크고 작은 부상들도 많이 입었습니다. 저처럼 돌이킬 수 없는 상태까지 이른 사람도 있고 수술과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직접 부상을 당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돌아와 이러저런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해경에서 저희들에게 치료비 지원을 해주겠다며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치료비를 받기 위해서는 세월호 수색 참여로 인해 입은 부상이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증명해야 했습니다. 트라우마는 기억과 죄책감으로 인한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지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육체적 고통은 무리한 잠수와 트라우마로 인해 생겨난 것인데 이 또한 정확히 어느 시기부터 왜 아팠던 것인지를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민간잠수사들 중 현업에 복귀한 잠수사들은 일하다 몸이 나빠지면 세월호에 다녀온 후유증 아니냐며 산재처리를 거절당합니다. 현업에 복귀하지 못한 잠수사들은 세월호에 다녀왔으니 건강이 좋지 못한 상태일 거라며 매번 고용을 거절당합니다. 그런데 해경은 우리의 부상이 세월호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냐고 의심하며 그 인과관계를 증명하라고 합니다. 최종적으로 보상등급을 심사하면서도 세월호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은 매우 사소한 것처럼 다뤄졌습니다.

세월호 현장에서 병원으로 옮겨진 직후, 당시 해경청장은 입원치료 중이던 우리 잠수사들을 찾아와 매우 의로운 일을 하였다고 한껏 치하했습니다. 우리를 형제로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충분한 보상을 할 것이라 공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의사상자 신청에 대해서는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급할 때는 의로운 일을 하다 부상당했다며 말 잔치를 벌이더니, 시간이 흐르자 당신들은 의상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중적인 태도였습니다. 잠수사들은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또 한 번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대답을 듣고 싶다

저는 우리가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과 동일한 만큼의 고통을 갖고 있다고 주장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세월호 참사의 첫 번째 피해자는 희생자와 유가족들입니다. 이렇게 저의 고통을 말을 하는 것이 미안하고 민망합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잠수사들도 세월호 참사의 또 다른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부의 역할을 대신해 실종자 수습을 주도적으로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갖게 된 트라우마와 부상은 우리 잘못이 아니라,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정부의 잘못으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지난 2월 세월호 피해지원법(4.16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특별법) 개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우리 민간잠수사는 간신히 손실보상대상으로 추가되었지만, 여전히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픔의 인과관계를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것도 여전합니다. 

여러분! 우리 민간잠수사들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저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국가가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 일을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트라우마와 육체적 부상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가 아니라면 세월호 실종자 수습의 과정에서 갖게 된 우리의 고통은 과연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인가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꼭 듣고 싶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이 우리가 아닌 박근혜 정부에게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기억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랜 법정 싸움 끝에 동료 잠수사의 죽음이 우리가 아닌 박근혜 정부 당시 해경청장 잘못이라고 판결을 받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사과 한 번 듣지 못했고 김석균 당시 해경청장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누명의 억울함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민간잠수사들이 명예를 회복하고 위로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관심을 놓지 말아 주십시오. 긴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 기사]

☞ [① 오지원(前세월호특조위 피해지원점검과장) 세월호에서 제천까지...'사람'이 없는 국가재난매뉴얼]

☞ [② 장동원(세월호 생존학생 아버지) 세월호 참사, 숨죽인 생존자의 아픔]

☞ [➂ 장훈(세월호 유가족) 세월호참사 유가족, "우리가 아픈 이유는..."]

☞ [➃ 김수영(세월호 민간잠수사 법률대리인) 마침내 개정된 세월호 피해지원법, 그러나 남겨진 과제]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세월호참사 수색 구조에 참여했던 황병주 민간잠수사의 글입니다. 지난 달 '세월호 피해지원법'이 개정되었지만 세월호 민간잠수사는 여전히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태그:#민간잠수사, #세월호 , #세월호 피해지원법, #세월호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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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약칭 4.16연대)는 세월호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생명이 존중받는 안전사회 건설을 위해 세월호 피해자와 시민들이 함께 만든 단체입니다. 홈페이지 : https://416act.net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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