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군-사랑을 그리다>의 양녕대군(손병호 분). 극중에서는 양안대군이란 이름으로 나온다.
 <대군-사랑을 그리다>의 양녕대군(손병호 분). 극중에서는 양안대군이란 이름으로 나온다.
ⓒ TV조선

관련사진보기


TV조선 드라마 <대군-사랑을 그리다>에 세종대왕의 큰형인 양녕대군(손병호 분)이 등장한다. 드라마 속 이름은 양안대군이지만, 실제로는 양녕대군이다. 드라마 속에서 그는 탐욕스러운 이미지를 띠고 있다. 인정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또 세종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수양대군(극중에서는 진양대군)이 왕실의 분란을 일으키도록 유도한다. 세종의 장남인 문종의 혈통에서 왕위가 계승되기보다는 세종의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세 결집을 도와준다. 동생인 세종한테 왕위를 빼앗긴 원한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이, 드라마 속의 양녕대군은 수양대군을 부추기고 세종의 후손들을 분열시키고 있다.

구체적 줄거리는 작가의 상상에서 나왔지만, <대군> 속의 양녕대군은 <태종실록> 속의 양녕대군과 대체로 일치한다. 성격이나 이미지가 흡사하다. 실록 속의 양녕대군은 동생한테 자리를 양보할 사람이 절대 아니다. 유능한 동생에 대한 질투심을 드러냈다. 그래서 아버지 태종이 항상 걱정스럽게 양녕을 지켜봐야 했다.

양녕이 세자 자리에서 물러난 이유

음력으로 태종 14년 10월 26일자(양력 1414년 12월 8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은 세자 시절의 양녕에게 "세자는 동생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라고 나무랐다. 자신을 동생, 특히 충녕대군(세종)과 비교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충녕에 대한 양녕의 질투심을 경계하는 태종의 심리를 보여주는 기록은 이 외에도 여럿이다.

그런 질투심을 품은 사람이 동생한테 선선히 왕위를 내놓기는 쉽지 않다. 그가 세자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동생에 대한 양보심 때문이 아니라, 듣기에도 민망한 일련의 성추문 때문이었다. 기생 초궁장을 놓고 큰아버지 정종과 삼각관계를 형성한 적도 있었다.

주로 유부녀들로 구성된 무수리들의 숙소가 궁에 설치되자, 세자 시절의 양녕은 이것도 놓치지 않았다. 태종 17년 윤5월 21일자(1417년 7월 5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그는 일부 무수리들에게 자기 숙소 근처에서 불침번을 설 것을 요구했다. 측근들은 그러지 마시라며 세자를 만류했다. 세자가 왜 그러는지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이다. '#Me Too'가 벌어졌다면, 양녕은 결코 무사치 못했을 것이다.

실제론 그런 사람이었는데도, 양녕은 '유능한 동생한테 시원하게 양보한 멋있는 형'으로 후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분명히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오늘날에는 스마트폰으로도 조선왕조실록을 열람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실록 열람이 쉽지 않았다.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선비들한테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양녕의 실제 모습이 후세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거기엔 다른 이유가 있다. 정치적 이유다.

양녕은 1462년 세상을 떠났다. 약 200년 뒤인 1659년부터 조선 정계는 이른바 예송논쟁에 휘말렸다. 인조의 차남인 효종 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효종의 세금 인상 정책에 불만을 품은 보수세력이자 다수파인 서인당은 '효종은 차남이므로 어머니인 자의대비가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며 효종을 격하시켰다.

이에 맞서 반대파 남인당은 '차남이지만 왕이 됐으므로 적장자에 준해, 자의대비가 3년간 상복을 입도록 해야 한다'고 효종을 격상시켰다. 이 문제를 중심으로 양당은 정권 쟁탈전을 벌였다. 1659년의 제1차 예송에서는 서인당이 승리했다. 효종이 인조의 차남으로 인정된 것이다.

하지만 1674년 제2차에서는 남인당이 이겼다. 효종의 부인인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15년 전과 똑같은 논쟁이 벌어졌다. 자의대비가 며느리를 위해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가 문제됐던 것이다. 이때는 남인당이 승리해, 효종이 적장자로 인정됐다.

조선시대의 국상.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 경내에 있는 조선왕릉전시관에서 찍은 사진.
 조선시대의 국상.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 경내에 있는 조선왕릉전시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예송을 중심으로 전개된 17세기 후반의 정쟁 속에서, 200년 전의 양녕대군을 떠올린 정치가들이 있었다. 바로, 남인당 사람들이다.

이들은 '동생한테 자리를 빼앗긴 양녕대군'의 이미지를 '동생한테 자리를 양보한 형'으로 바꾸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다. '장남이건 차남이건 유능한 쪽이 왕이 돼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한 사람으로 양녕대군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면, '장남·차남을 가리지 말고 효종을 적장자로 대우해야 한다'는 자신들의 논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왕들의 이익에도 부합됐다. 적자이자 장남인 왕자가 보위를 잇는 경우는 적었다. 그래서 적장자 출신이 아닌 왕들의 입장에서는 '장남이건 차남이건 유능한 쪽이 돼야 한다'는 논리에 마음이 끌릴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어땠든 간에 일단 왕이 되면 떠받들어야 한다'는 그런 논리는, 상류층 양반들의 권익을 대변하며 왕권을 억압하는 보수파를 견제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정치적 목적에 따른 양녕대군의 재평가

그 같은 남인당과 왕실의 공감대를 발판으로 양녕대군 재평가에 적극 나선 인물은 남인당 지도자 허목(1595~1682년)이다. 어머니 쪽으로 양녕대군 피를 이어받은 허목은 제2차 예송 뒤에 숙종 임금에게 간청해서 양녕대군 사당인 지덕사를 세웠다. 지덕사는 지금은 서울시 상도동에 있다.

지덕사를 세운 허목은 '양녕이 동생한테 양보할 목적으로 일부러 비행을 저질렀다'는 주장을 폈다. 지덕사기(記)에서 허목은 이렇게 말했다.

"양녕대군은 사냥과 말 달리기와 술 마시고 취하는 것을 좋아하여 스스로 미친 짓을 했을 뿐, 다른 일은 없었다."

허목의 구체적인 동기에 관해, 이기대 고려대 초빙교수의 논문 '양녕대군 관련 기록의 형성과 변이 양상'은 이렇게 말한다. 이 논문은 2012년 <우리문학연구> 제36호에 실렸다.

"허목에 의해서 양녕대군에 대한 형상이 긍정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우선적으로 허목의 정치적 입장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허목은 왕권 강화론의 연장선상에서, 왕권 계승자는 장자(장남)나 차자(차남)의 순서와 관계없이 왕위 계승자가 장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아울러 이러한 입장은 이후 숙종 대의 중요한 정치적 이념 논쟁으로 확대되어 간다."

숙종과 허목의 합작에 의해 지덕사가 건립되고 양녕대군의 이미지가 개선된 뒤로 다음과 같은 양상이 나타났다. 위 논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지덕사가 건립되고 허목의 기록이 있은 이후에 양녕대군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확산된다. 대신에 정치적으로 신권(신하 권력) 강화의 입장을 강조했던 노론(서인당 분파) 계열의 인물들에게서는 양녕대군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어떤 동기였든 간에 허목의 행위는 역사왜곡이다. 보수파인 서인당을 약화시킬 목적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왜곡에 정조 임금도 동참했다.

정조도 탕평정치를 하기는 했지만, 보수파인 서인당과 그 분파인 노론당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 있었다. 이들은 왕권 약화를 추구하는 세력이었다. 그래서 정조 역시 양녕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부각시키고 남인당의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데 참여했다. 1789년에 정조가 지은 또 다른 <지덕사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수록된 글이다. 

"(양녕대군은) 거짓으로 미친 척 하면서 10년을 하루 같이 술과 기생 속에서 보냈다."

<홍재전서>.
 <홍재전서>.
ⓒ 장서각 디지틸 아카이브

관련사진보기


<태종실록>과 명백히 상치되는 기록이 이처럼 임금인 정조의 붓끝에서도 나왔다. 정조뿐 아니라 그 측근이었던 다산 정약용도 왜곡에 가담했다. 정약용은 남인당 출신이었다.

정약용은 양녕이 또 다른 동생인 효령대군과 함께 만덕사란 절에 가서 추태를 벌인 사건을 소개할 때도, 은밀한 방법으로 역사를 왜곡했다. 조선 전기 관료인 남효온(1454~1492년)의 <추강냉화>에 따르면, 효령이 불공을 올리는 동안에 양녕은 불고기를 만들어 먹고 술을 마시는 추태를 부렸다. 그러면서 "나는 살아서는 왕의 형이고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다"라며 호기를 부렸다. 그런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에 실린 글에서 그 일화를 이렇게 간략하게 변형시켰다.

"효령대군이 만덕사에 가 논 일이 있어, 드디어 그 절을 원찰로 지정하고 기적비를 세워두었지만, 임진왜란 때 그 비석이 깨져서 전해지지 않는다. 양녕대군이 효령대군에게 '나는 살아서는 왕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만덕사에서 추태를 부린 사람이 효령대군인 것처럼 기술됐다. 양녕대군은 호기로운 말을 남긴 사람으로만 묘사됐다. 공정할 것 같은 정약용도 당파의 이익이 걸린 사안에서는 이렇게 은근히 역사를 왜곡했던 것이다.

양녕대군은 결코 미담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위와 같이 조선 후기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미담의 주인공으로 재창조됐다. 남인당 지도자 허목이 주도한 이 같은 역사왜곡에 나중에는 정조와 정약용도 가담했다. 보수파인 서인당과 그 분파인 노론당을 견제할 목적에서 그렇게 했다고는 해도, 그것이 역사왜곡이라는 점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태그:#대군 사랑을 그리다, #양녕대군, #역사왜곡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