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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0월 12일 민통련의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지지(약칭 '비지') 결정 이후 양 김의 경쟁은 더욱 열기를 더해 갔다. 김대중이 광주와 목포를 방문해 50만 이상의 인파를 결집시키자 이에 맞서 김영삼은 부산을 방문해 수영만에서 100만이 넘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개최했다. 서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세 과시가 이어졌다. 단일화의 가능성은 거의 물 건너 간 것처럼 보였다.

1987년 10월 ‘군정종식 및 후보단일화 촉구대회’라는 이름으로 부산 수영만에서 김영삼 후보가 1백만 군중을 몰고 기선을 점하자(위), 이에 뒤질세라 12월 13일 김대중 후보도 서울 보라매 공원에서 당시 선거 최대 인파를 과시하며 맞섰다(아래)
 1987년 10월 ‘군정종식 및 후보단일화 촉구대회’라는 이름으로 부산 수영만에서 김영삼 후보가 1백만 군중을 몰고 기선을 점하자(위), 이에 뒤질세라 12월 13일 김대중 후보도 서울 보라매 공원에서 당시 선거 최대 인파를 과시하며 맞섰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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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 없는 낙관론, '4자 필승론'

애초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지('비판적 지지'의 줄임말)는 민중운동에 중심을 두고 민중 역량 강화를 위해 채택된 전술적 방침이었다. 즉 '민중역량 강화'가 전략적 목표고, '대통령선거 승리'와 '김대중 지지'는 전술적 방침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선거 승리'는 6월항쟁과 마찬가지로 '민중역량 강화'에 결정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양김 후보단일화는 비지 진영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혹자는 "비지는 '김대중 단일화론'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지 진영은 점차 승리만을 목적으로 하는 선거 논리에 빠져 들어갔다. 대통령선거가 가까워오면서 '4자 필승론'이 김대중 지지자들 사이에 광범하게 유포됐다. '4자 필승론'이란 김대중,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4자가 모두 함께 나와 경쟁하는 구도가 김대중 후보가 승리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구도라는 것이었다. 지역 지지기반이 서로 다른 후보들이기 때문에 호남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고, 수도권에서 우세한 김대중 후보가 4자 대결에서 유리하다는 순전히 선거공학적인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 '4자 필승론'은 선거결과에서 드러났듯이 아전인수 격인 논리였고, 더구나 6월항쟁이라는 거대한 시대조류를 도외시하고 지역감정만을 토대로 한 계산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논리대로라면 양김 단일화는 필요 없고, 오히려 분열되어 있는 게 좋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4자 필승론'은 운동론이라고 하기보다는 김대중 후보 선거운동본부에서 김대중 지지자들을 고무하고 단결시키기 위해 만든 선거용 구호였다. 그러나 어쨌든 김대중 선거운동 진영뿐만 아니라 재야의 비지 그룹 역시 선거 막판에 점차 이 '4자 필승론'에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민청련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김대중 후보가 네 후보 중 지지율에서 가장 앞서 있다는 김대중 선거운동본부의 정보를 믿었고, 그래서 선거 감시만 잘하면 김대중 후보가 무난히 승리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낙관론에 빠져들었다.

후보단일화를 위한 김병곤의 고육지계

바로 이 때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병곤이 나섰다. 민통련 중집회의 직후 열린 민청련 의장단회의에서 김병곤 부의장은 양김을 공동투쟁 전선에 세워서 그 과정에서 대중 속에서 단일화를 성취하자고 제안했다.

즉 재야가 주도하는 대규모 반독재 군중집회를 전국 주요도시를 돌며 개최하고, 이 집회에 양 김을 앞장세우자는 계획이었다. 그러면 그 과정에서 보다 국민의 대중의 지지를 더 받는 후보가 가려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단일화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내놓은 고육지계였다. 의장단회의는 이 제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김병곤은 1985년 김근태 '고문공대위' 때부터 꾸준히 이어온 노학청 연대 테이블에 이 문제를 올려 청년학생 주도의 대규모 군중집회를 기획했다. 전두환 퇴진과 거국중립내각 수립을 촉구하는 집회였다. 당시 9총 이후 노학청 연대를 담당했던 최성웅 청년부장이 노학청 연대회의에서 이러한 집회의 공동개최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 집회는 당시 진행 중이던 전국적 청년학생단체 결성 날짜와 맞추기로 했다.

한편 권형택 부의장은 국본 실무자로 근무하면서 동시에 전국의 청년단체들과 전대협 산하 학생회들을 결집시켜 전국적인 단일 청년연대단체를 국본 산하에 결성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상당기간의 치밀한 조직 작업 끝에 드디어 9월 18일 대전 가톨릭 농민회관에서 민주쟁취청년학생공동위원회(아래 청학공위) 결성 총회와 대표자회의를 가졌다.

여기에서 전대협 이인영 의장과 권형택 민청련 부의장이 청학공위 공동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아울러 이 회의에서는 청학공위 공식 창립대회를 10월 중에 대중집회로 개최하기로 결의했다. 이것이 바로 김병곤이 기획한 집회와 시간상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청학공위에서는 10월 25일 청학공위 주최로 고려대 대운동장에서  '민주쟁취청년학생공동위원회 창립대회 및 공정선거 보장을 위한 거국중립내각 쟁취 실천대회'라는 긴 이름의 집회를 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여기에 양김을 연사로 초청하기로 했다.

1987년 10월 25일 청학공위 주최로 열린 "공정선거보장을 위한 거국중립내각 실천대회"에서 연설하는 김희택 민청련 의장(위)과 이인영 전대협 의장(아래)
 1987년 10월 25일 청학공위 주최로 열린 "공정선거보장을 위한 거국중립내각 실천대회"에서 연설하는 김희택 민청련 의장(위)과 이인영 전대협 의장(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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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선거운동 출발이 늦어 상대적으로 약간 열세였던 김대중 측은 기꺼이 초청에 응했고, 즉시 참석하겠다고 통고해왔다. 문제는 김영삼 쪽이었다. 평소 김대중의 탁월한 대중연설 실력을 잘 알고 있는 김영삼은 김대중과 대중 앞에 함께 나서는 걸 꺼려했다. 김덕룡 비서실장 등 김영삼의 핵심 참모들도 대체로 이번 집회 참가가 별로 득이 없고 오히려 이용당할 가능성만 크다는 이유로 김영삼을 만류했다.

이때 김병곤이 나섰다. 같은 부산 출신으로 김영삼 캠프의 분위기를 잘 아는 김병곤은 단기필마로 상도동 사저로 찾아가 김영삼을 독대한다. 김병곤의 열렬하고 진심어린 설득에 결국 김영삼이 화끈하게 참석하겠다고 응락했다. 집회가 성사된 것이다.

김영삼이 집회 참석을 수락한 것은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바로 직전 10월 17일 부산 수영만 집회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던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수영만 집회에는 100만이 넘는 인파가 몰려 김대중의 보라매집회 전까지는 최대 집회로 평가받고 있었다. 이렇게 어렵게 성사된 고려대 집회는 87년 대통령선거기간 중 유일하게 양김이 함께 선 집회가 됐다.

고대 집회의 명암

10월 25일 약 10만 군중이 고려대 대운동장에 모였다. 권형택 청학공위 공동위원장의 사회로 열린 이 집회에서 양김에 앞서 김희택 민청련 의장과 전대협 이인영 의장이 연사로 나섰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전두환 군사정권은 즉시 퇴진할 것이며 양김은 군사독재 종식을 위해 공동투쟁에 나서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마지막으로 이 집회의 하이라이트인 양김 연설 순서가 됐다. 김영삼, 김대중 순으로 등단했다. 이들은 청년학생들의 촉구에 화답해 공동투쟁을 다짐하는 연설을 해서 10만 청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연설에 대한 환호의 열기는 김대중 측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김대중의 연설 실력이 돋보이기도 했지만 집회 참석자 중 다수가 김대중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연사였던 김대중은 자신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여세를 몰아 '전두환에게 심판을, 노태우에게 패배를!'이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종로5가 국민운동본부까지 '군부독재 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평화대행진'을 벌였다.

외견상으로 볼 때 양김을 반군사독재 투쟁전선에 함께 세우려 한 민청련의 1차 목적이 달성된 듯 보였다. 민청련 의장단은 후속 집회를 구상하고 있었다. 애초 민청련 의장단의 생각은 서울집회가 성공하면 이어서 부산, 광주, 대구, 대전 등 지역에서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어 투쟁 열기를 전국으로 확산하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양김 단일화를 이루어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민청련의 계획은 다음 날 김대중 측의 전격적인 분당 발표로 좌절됐다. 10월 26일 김대중 캠프는 '고대집회에서 압도적 지지를 확인했고, 분당을 고려하고 있다'는 요지의 기자회견을 했다. 그리고 이틀 후 10월 28일 김대중은 자신의 대통령 출마와 이를 위한 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했다.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김대중 측은 이미 오래 전에 분당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평민당 창당을 준비해왔다. 그리고 고대집회를 분당을 공식화할 명분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양김의 단결을 촉구하기 위한 집회가 본의 아니게 김대중의 분당을 도운 셈이 됐다.
 
집회 주최자로서 뭔가 입장표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고대집회를 주도했던 민청련은 이에 대해 아무 논평 없이 넘어갔다. 아마도 그 이전에 민통련과 전대협이 비지 입장을 밝혔고, 또 민청련 의장단 다수가 비지 입장이었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김근태 인재근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

1987년 미국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는 김근태와 인재근을 인권상 수상자로 결정했지만, 한국 정부가 인재근의 출국을 거부했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는 다음 해인 5월 직접 한국을 방문해 명동성당에서 상을 수여했다. 당시 축사를 하는 김수환 추기경 모습.
 1987년 미국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는 김근태와 인재근을 인권상 수상자로 결정했지만, 한국 정부가 인재근의 출국을 거부했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는 다음 해인 5월 직접 한국을 방문해 명동성당에서 상을 수여했다. 당시 축사를 하는 김수환 추기경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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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활동으로 여념이 없던 10월 중순 쯤에 민청련 사무실에 희소식이 하나 날아들었다. 미국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심사위원회가 민청련 초대 의장 김근태와 그의 부인이며 민가협 초대 총무인 인재근에게 한국의 인권운동에 헌신한 점을 높이 평가하여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한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그리고 11월 20일에 열리는 수상식에 참석을 요청하는 초청장을 보내왔다.

민청련은 세계 언론에 보도될 이 인권상 수상을 아직도 감옥에 있는 김근태 전 의장을 비롯한 양심수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기회로 활용하기로 했다. 마침 김근태 전 의장의 재판기록과 옥중편지 등을 모은 문집이 <이제 다시 일어나>라는 이름으로 중원문화사에서 출판된 참이었다. 그래서 민청련 사무처에서는 서둘러 준비하여 10월 22일 홍제동성당에서 책 출판기념회를 겸한 '김근태 문집 출판과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 기념 구속자 석방 촉구대회'를 개최했다.

김근태가 자신이 당한 고문을 폭로한 내용을 책으로 엮어 1987년에 펴낸 [이제 다시 일어나](왼쪽).와 인재근 여권발급 거부에 대한 규탄 성명서(오른쪽)
 김근태가 자신이 당한 고문을 폭로한 내용을 책으로 엮어 1987년에 펴낸 [이제 다시 일어나](왼쪽).와 인재근 여권발급 거부에 대한 규탄 성명서(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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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이 대회 결의문에서 "6월민중항쟁의 위대한 경험과 소중한 체험을 되살려 투쟁의 대오를 가다듬어 구속된 활동가들을 저 간악한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탄압의 사슬에서 풀어낼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김근태 인재근의 인권상 수상을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재근이 수상을 위해 신청한 출국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음으로써 수상식 참석을 저지했다. 이에 민청련은 11월 20일 민가협과 공동으로 성명서를 발표해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규탄하고 정권퇴진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민주화운동 진영이 대통령 선거를 두고 사분오열된 상황에서 이 사건은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87년 10월 22일 ‘김근태 문집 출판과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 기념 구속자 석방 촉구대회’가 열린 홍제동 성당 앞 전경(위)과 대회 진행 모습(오른쪽). 왼쪽 끝에 서 있는 사람은 이 대회 사회를 본 김종복 민청련 사무국장,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은 김병곤 민청련 부의장
 1987년 10월 22일 ‘김근태 문집 출판과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 기념 구속자 석방 촉구대회’가 열린 홍제동 성당 앞 전경(위)과 대회 진행 모습(오른쪽). 왼쪽 끝에 서 있는 사람은 이 대회 사회를 본 김종복 민청련 사무국장,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은 김병곤 민청련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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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민청련, #김영삼, #김대중, #비판적 지지, #인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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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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