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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쉰 지 벌써 10개월이 되어 간다. 몸은 편한데, 마음은 점점 불편해진다. 최저 시급이라도 벌어야 하는 게 아닐까,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제는 내 성향을 잘 알아, 이력서 한 장 내밀기도 쉽지가 않다. 그걸 생각하기 전에, 한 분야에서 꾸준히 경력을 쌓지 못한 내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을까, 더 걱정스럽다. 구직 사이트에 접속을 한다. 잡다한 생각들을 놓지 못하면서 말이다. 

생각 1
티비를 켰다. <인간극장>을 재방송하고 있었다. 피곤을 핑계 삼아 소파에 앉아 몇 편을 연속으로 봤다. 영종도에서 어부 일을 하는 43살 박재연씨가 주인공이었다(본 방송은 2014년도). 아버지가 평생 해온 어부 일을 둘째 아들인 박재연씨가 이어받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내용이었다.

박재연씨도 젊었을 적엔 도시에서 여러 일을 했는데, 이제는 아버지 곁으로 돌아와 어부 일을 했다. 박재연씨는 몇 년째 매일매일 어획량을 기록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아침에 잡아온 생선을 구읍 뱃터에서 팔아 돈을 벌었다. 활기가 넘치고, 행복해 보였다. 부부는 성실했고, 직장인들만큼 돈도 번다고 했다.

박재연씨는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생업이 있다. 나는 그가 부러웠다. 내 부모님의 오랜 경험을 전수받아서, 그걸로 내가 먹고 살 수 있다는 것. 형제들 중 유일하게 둘째인 박재연씨만 어부 일을 하는 걸 보면, 그 일이 만만치 않다는 건 알겠지만, 세상 일 중 쉬운 일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남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내 부모 밑에서 일하는 게 낫지 않을까.   

 비내리는 날의 '삼색수타면집'
 비내리는 날의 '삼색수타면집'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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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2
이시가키 섬에는 '삼색수타면'집이 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비수기의 섬에서 음식점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시가키 섬은 터미널 근처에 식당이 몰려있고, 그 외의 지역은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점심을 먹기 위해 390번 도로가의 한 식당을 찾았다. 이사가키 섬을 남북으로 반으로 자르면 중간쯤에 있는 가게였다.

'삼색수타면'집이었다. 수풀에 가려져 있는 가게는 큰 간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폭우 속에 찾기가 싶지 않았다. 마당에 들어가 보고서야 그 곳이 밥집임을 알 수 있었다. 넓지 않은 마당에는 차가 두세 대 빗속에 주차되어 있었다. 우리도 주차를 하고 비를 흠뻑 맞으며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테이블은 4개였다. 자리가 마땅치 않아 6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에 합석을 했다.

 삼색수타면집
 삼색수타면집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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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수타면집에는 나이든 노부부와 젊은 여자가 일을 하고 있었다. 노부부가 요리를 하고 젊은 여자가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내어왔다.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그래서 내가 틀릴 수도 있지만), 아마도 부부와 그들의 딸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조만간 구직을 해야 하는 압박감에 사로잡힌 내가 그 젊은 여자에게 감정이입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여자가 그 집 딸이어서, 구직 스트레스 없는 삶을 살기를 바랐는지도.

삼색수타면을 주문했다. 삼색수타면은 어떤 종류의 간장에 찍어 먹는데, 이 간장이 뚜껑달린 작은 항아리에 담겨 나왔다. 그러한 방식이 이 식당의 특징 같았다. 수타면은 담백했고 같이 나온 야채튀김은 바삭했다.

삼색수타면집은 낮에만 장사를 했다. 테이블 4개에 낮에만 장사하는 식당,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언젠가 이 집 딸이 이 가게의 주인이 될 테지. 부러웠다. 나도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부모님의 생업을 이어받을 수 있었을까.

 삼색수타면
 삼색수타면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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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3
젊을 적 건축일로 돈을 모으신 것 같은 아버지는, 건축일이 본인과 맞지 않으신지 어느 순간부터, 농사일을 생업으로 삼으셨다. 그 농사일이 우리를 풍족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지만, 내가 대학교를 별다른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도 졸업을 한 걸 보면 못 먹고 살 정도의 벌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부모님은 겨울에 비닐하우스에서 고추농사를 하셨는데, 그 곳은 집에서 차로 30여 분 떨어진 곳이라 나는 가볼 일이 없었다.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시기 1년 전, 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언니와 4살 조카랑 함께 부모님의 비닐하우스를 찾았다.

비닐하우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은 겨울인데도 열기로 가득했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고추를 땄다. 똑똑똑. 한손으로 똑똑똑.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자리를 옮겨가면서 고추를 따기만 했다. 엄마가 켜 놓은 라디오에서 흥겨운 노래가 흘려 나왔다.

엄마가 끓여주는 라면을 더운 비닐하우스 안에서 먹으면서, 나는 어쩌면 이 일이 내게 천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내가, 식물을 상대하면서 할 수 있는 일. 아빠가 건축 일을 완전히 접고 농사일을 했던 것처럼, 나도 내가 공부한 건축에는 더 이상 미련을 버리고 농사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울 생활이 만만치 않을 때, 엄마한테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엄마는 결혼 안 하고 있던 내가 골칫거리였던지라, 같이 살 남자만 있으면 그렇게 살아보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내가 귀농하고 싶은 남자를 만났더라면 나는 지금씩 젊은 농부가 되어 있었을까.

그러나 내가 귀농을 꿈꾸는 남자를 찾아보기도 전에, 상황은 종료. 1년 뒤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그 이후 아버지는 농사일을 접으셨다. 곧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시고, 나는 부모님의 생업이었던 고추 농사를 이을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만약 부모님이 살아계셨더라면, 나는 인간극장의 박재연씨처럼 부모님의 뒤를 이어, 농부가 되었을까. 솔직히 자신할 수는 없다. 다만 이제는 젊은 농부가 될 가능성마저도 없어졌으니, 무슨 일이든 해서 먹고 살아야 한다. 잡다한 생각에 더 빠지기 전에, 다시 구직 사이트에 접속을 하자.


태그:#이시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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