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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해인사는 합천의 얼굴이요, 자랑거리다. '합천 해인사', 두 낱말이 하나로 사람들 입에 붙어 다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명산중의 명산으로 꼽히는 가야산 아래에 있어 태생부터 명찰의 요건을 갖추었다. 승보사찰 송광사, 불보사찰 통도사와 함께 법보사찰로 불리며 1200년 역사를 합천과 함께한 해인사는 합천사람들 마음 속에 고맙고 듬직한 존재로 남아 있다.

해인사 상징인 대장경판전 중 수다라장에 들어가는 문이다. 모양이 둥글어  월문이라 불린다. 판전구역은 직선이 강조되고 이 월문은 곡선으로 대조를 이룬다.
▲ 해인사 월문 해인사 상징인 대장경판전 중 수다라장에 들어가는 문이다. 모양이 둥글어 월문이라 불린다. 판전구역은 직선이 강조되고 이 월문은 곡선으로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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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폐사지로 불리는 영암사지도 합천 가회면에 있다. 외진 절치고는 그 본새가 범상치 않다. 통 돌을 깎고 갈아 만든 돌계단과 네모반듯한 화강암 석축, 엉덩이가 두툼한 쌍사자석등만으로도 폐사지의 백미, 합천의 백미라 불린들 이상할 리 없다.
 
석축과 쌍사자석등, 돌계단은 돌 다루는 우리의 솜씨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영암사터가 최고의 폐사지, 합천의 백미라 불린들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2010년 8월에 촬영)
▲ 영암사터 쌍사자석등, 돌계단, 석축 석축과 쌍사자석등, 돌계단은 돌 다루는 우리의 솜씨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영암사터가 최고의 폐사지, 합천의 백미라 불린들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2010년 8월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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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의 인물을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두말이 필요 없는 걸출한 인물, 조식(1501-1572)은 합천 삼가면에서 태어났다. 조식의 수제자로 인조반정 이래 역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해인사 근처에 조용히 묻혀 있는 정인홍(1535-1623)도 합천사람이다.

정인홍 무덤처럼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꼭꼭 숨어 있는 합천의 보물을 들라면 묵와고가가 아닌가 싶다. 해인사와 영암사지를 합천의 얼굴, 백미라 한다면 묵와고가는 속마음이다. 예전에 몇 차례 다녀와 얼굴과 '눈썹'으로 합천의 인상을 알았고 이번엔 속마음을 알고 싶어 묵와고가를 찾았다. 대문채 담에 기대 햇발을 쬐고 있는 키 작은 굴뚝에 이끌려간 것이다.

해인사는 합천의 자부심이요 자랑거리다. 굴뚝은 암키와 수키와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높게 만들었다. 세상에 알리고 싶은 거다.
▲ 해인사 굴뚝 해인사는 합천의 자부심이요 자랑거리다. 굴뚝은 암키와 수키와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높게 만들었다. 세상에 알리고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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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와고가는 합천의 속마음이다. 굴뚝은 키 작고 얌전하게 만들었다. 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은 거다.
▲ 묵와고가 대문채 굴뚝 묵와고가는 합천의 속마음이다. 굴뚝은 키 작고 얌전하게 만들었다. 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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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살기 좋은 곳, 합천 묘산면 화양리

묵와고가가 있는 묘산면 화양리는 가야산 줄기, 달윤산 자락에 있는 산골마을이다. 화양과 나곡, 상나곡마을로 이루어졌다. 숨어 살기 좋다고 소문난 것일까. 조선전기에서 중기까지 이런저런 사연을 달고 화양과 나곡마을에 여러 명이 숨어들었다.

먼저 540여 년 전, 윤장이 화양마을에 몸을 숨겼다. 파평윤씨 14세손으로 1380년 고려문과에 급제했으며 조선 문종 대에 사재판서(司宰判書)를 지냈다. 윤장은 김종서의 장인, 윤원부의 종형제로서 김종서(1383-1453)가 1453년 계유정난으로 희생되자 화를 피해 들어왔다.

이어 야천 박소(1493-1534)는 1530년, 훈구파에 의해 파직 당하자, 낙향하여 이 마을에 들어왔다. 야천의 어머니는 윤장의 손자인 윤자선의 딸로 화양마을은 야천의 외가였다. 현재 나곡으로 가는 고갯마루에 야천을 기리는 신도비가, 그 아래에 재실이 남아 있다.

나곡마을로 접어들기 전 고갯마루에 서있다. 중종 때 문신, 야천 박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다. 글씨는 석봉 한호가 썼다.
▲ 야천 신도비 나곡마을로 접어들기 전 고갯마루에 서있다. 중종 때 문신, 야천 박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다. 글씨는 석봉 한호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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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곡마을에 있다. 마을로 가는 길처럼 구불구불하면서 꿈틀대어 살아 움직이는듯하다. 마을사람들은 당산목으로 섬기고 있다.
▲ 상나곡마을 묘산소나무 상나곡마을에 있다. 마을로 가는 길처럼 구불구불하면서 꿈틀대어 살아 움직이는듯하다. 마을사람들은 당산목으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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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3년에는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모함을 받고 역적으로 몰려 삼족이 멸하게 되자, 김제남 6촌뻘 되는 이가 상나곡마을 소나무 아래 초가를 짓고 살았다 한다. 이 소나무가 마을사람들이 신목(神木)으로 여기는 '묘산소나무'로 다랭이논 옆에서 500년 이상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화양마을과 묵와고가

화양, 나곡, 상나곡마을 중에 화양마을은 윤장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파평윤씨 집성마을이 되었다. 말이 집성마을이지 집들은 산자락을 감아 돌아 성글게 들어서 집성(集姓)일지 몰라도 '집촌(集村)'은 안 되는 마을이다.

이름처럼 조용하고 잠잠한 집이다. 솟을대문이 굳게 닫혀있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대문채 아래에 있는 키 작은 굴뚝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 묵와고가 이름처럼 조용하고 잠잠한 집이다. 솟을대문이 굳게 닫혀있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대문채 아래에 있는 키 작은 굴뚝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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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이라면 화양마을은 세상 밖 마을 같아 고요하고 잠잠하다. 너무나 적막한 나머지 발걸음 떼기가 민망할 정도다. 마을경로회관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묵와고가(默窩古家)가 있다. 고가의 이름처럼 잠잠하고 고요한 집이다.

윤장이 터를 잡고 인조 때 윤사성이 지었다 하니 350년은 넘은 집이다. 윤사성의 현손, 묵와 윤우(1784-1836)에 이르러 가세가 번성하였다 한다. 고가 옆 육우당(六友堂)은 묵와의 여섯 아들의 뜻을 잇기 위해 후손이 건립한 제실로 묵와 이후 번창한 가세를 짐작케 한다. 

육우당은 1960년대까지 서당으로도 쓰였다. 독립운동가 만송 윤중수(1891-1931)도 이곳에서 수학하였다. 만송은 1919년 파리장서 서명운동 당시 함경도 책임자로 활동하였고 2차유림단의거 때 수천석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내놓았다.

묵와고가는 한창 때 600평대지에 집채만 여덟 채, 칸수는 100칸에 이르렀다. 지금은 솟을대문채, 사랑채, 안채, 중문채, 중문행랑채, 사당채만 남아 있다. 독립자금을 댄 것과 연관이 없지는 않을 터, 건국훈장애족장이나 겸손하게 대문에 달려 있는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 마을회관 앞에 있는 공적비로는 이 집안을 위로하기에 부족해 뵌다.  

묵와고가는 산자락을 다듬어 지은 집으로 기단은 막돌로 허튼층쌓기로 높게 쌓고 그 위에 사랑채와 안채를 올렸다. 사랑채는 내루(內樓)가 돌출된 'ㄱ' 자형 집으로 처마에 '묵와고가' 현판이 달려 있다. 홑처마에 남쪽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누마루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단아한 가운데 다채로운 맛이 난다.

막돌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앉아 있다. 남쪽지붕은 맞배지붕, 내루지붕은 팔작지붕으로 특이하다. 내루의 덤벙주초와 기둥, 토방 위 섬돌은 모두 거칠고 막 생겨 우락부락한 사내를 보는 것 같다.
▲ 묵와고가 사랑채 막돌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앉아 있다. 남쪽지붕은 맞배지붕, 내루지붕은 팔작지붕으로 특이하다. 내루의 덤벙주초와 기둥, 토방 위 섬돌은 모두 거칠고 막 생겨 우락부락한 사내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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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지붕은 맞배지붕이나 남쪽에서 보면 한쪽은 맞배지붕, 다른 쪽은 우진각지붕처럼 보여 사랑채 지붕같이 다채롭다.
▲ 묵와고가 안채 남측 안채지붕은 맞배지붕이나 남쪽에서 보면 한쪽은 맞배지붕, 다른 쪽은 우진각지붕처럼 보여 사랑채 지붕같이 다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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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락부락한 사랑채 누마루의 덤벙주초와 주춧돌 결 따라 들어앉은 휘어진 기둥이 멋스럽다. 잘 다듬은 뽀얀 화강암 주초나 여러 번 대패질한 매끈하고 곧은 기둥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자연미가 있다. 그랭이법으로 다듬어 맞추긴 했어도 애초에는 이리 잘 맞지 않았으리라 짐작되건만 무거운 세월이 내려앉은 겐가, 이제 나무기둥 밑동과 주춧돌이 한 몸이 되었다.

묵와고가 굴뚝

내가 본 묵와고가의 굴뚝은 세 개다. 대문채와 안채의 키 작은 굴뚝과 사랑채의 기단굴뚝이다. 대문채 굴뚝은 눈구멍을 크게 뜨고 오는 이를 지켜보며 경계하고 있다. 황토를 주물러 암키와로 굴뚝 몸을 만들고 수키와로 연기 구멍을 냈다. 귀여운 모습에 솟을대문 위세가 누그러질 만하건만, 지금은 염(殮)하듯 종이로 두 구멍을 막아 애처로워 보인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사랑채 기단굴뚝은 숨어 살기로 작정한 묵와고가 선조의 생각이 담긴 상징물이 아닌가 싶다. 마루 밑에서 토방을 거쳐 기단까지 내굴길(煙道)을 내고 굴뚝 몸은 만들 생각 없이 기단에 연기구멍만 내었다. 연기구멍에 거미줄이 쳐 있어 안타깝게 보인다. 더 이상 연기를 뿜지 않는다는 뜻이다.

마루 밑에서 기단까지 내굴길을 내고 굴뚝 몸 없이 기단에 연기구멍만 내었다.
▲ 사랑채 기단굴뚝 마루 밑에서 기단까지 내굴길을 내고 굴뚝 몸 없이 기단에 연기구멍만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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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채굴뚝보다 더 키가 작다. 대문채나 사랑채 굴뚝과 달리 연기구멍에 검댕이 잔뜩 묻어 있어 아직 ‘살아있는’ 굴뚝으로 보인다.
▲ 안채굴뚝 대문채굴뚝보다 더 키가 작다. 대문채나 사랑채 굴뚝과 달리 연기구멍에 검댕이 잔뜩 묻어 있어 아직 ‘살아있는’ 굴뚝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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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는 살림하는 공간이어서 보여줄 수 없다는 집주인의 야속한 말에 안채 마당은 둘러볼 수 없었다. 내가 때를 잘못 잡은 거겠지. 집주인은 오늘 몸이 안 좋아 보였다. 야속하다고 한 내 속말이 야속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안채 굴뚝은 대문채굴뚝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키는 안채굴뚝이 더 낮다. 집 밖에서 본 안채굴뚝은 다행히 구멍은 막혀 있지 않고 검댕이 잔뜩 묻어 있었다. 멀리서 보아 거미줄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오히려 잘 된 건지 모르겠다.

거미줄이 없다면 혹시, 군불연기가 안채 뒷마당에 자욱하고 600년 묵은 모과나무 허리를 휘감는 저녁풍경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집주인에 대해 야속해 하는 내 속마음이 읽힐까봐 저녁까지 못 기다리고 서둘러 나왔다.


태그:#묵와고가, #굴뚝, #합천, #화양마을, #나곡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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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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