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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0대' '우0옥' '봉0양' '필0면옥'... 어제하루 종일 SNS와 언론에 오르내린 식당 이름이다. 모두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맛집들이다.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평양'랭면'을 평양에서 '어렵사리' 판문점까지 가져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그 맛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식당 앞에 긴 줄을 섰다고 한다. 맛도 맛이지만, 아마 남북정상회담의 감격을 함께 즐기며 기념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으리라 생각한다. 젊은 층들은 벌써 버킷리스트에 '평양 옥류관에서 냉면 먹기'를 추가하고 있단다.

뉴스를 보며 깨달았다. 내가 2005년 평양, 2006년 금강산에서 먹었던 냉면이 바로 '옥류관'의 평양냉면이었다는 걸. 확신이 서지 않아 당시 함께 여행했던 이들에게 재차 확인을 했다. 다들 당연한 걸 묻는다는,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한참동안 이 사실을 잊고 있었다. 게다가 금강산에선 평양냉면을 못 먹을 뻔 하기도 했다. 버킷리스트에 넣을 것도 없이, 이미 북한의 맛집에 다녀온 것을 잊은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문득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엄마와 함께 평양에 가다

2005년 남북교류 사업을 하는 시민단체에서 '광복 60주년 기념 아리랑 축전' 참가자를 모집했다. 1박 2일 동안 평양을 방문해 유적지를 돌아보고 저녁에 아리랑축전을 관람하는 일정이었다. 단체관광을 싫어했고 일사분란한 대집단체조에도 관심이 없어 가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주위에서 너도나도 신청을 하자 마음이 동했다. 전세 비행기를 이용해야 했기에 비용이 꽤 비쌌다. '관계가 좋아져 비용이 좀 저렴해지면 그때 갈까?'하는 생각도 있었다. 한편으론 왠지 다시없을 기회 같기도 했다. 고민 끝에 엄마와 함께 그곳, 평양에 가보기로 했다.

신청을 한 뒤에도 바쁜 일상에 밀려 평양에 간다는 것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떠나기 직전에야 부랴부랴 달러 환전을 하고 회사에 제출할 연가 신청서를 작성했다. 해외에 나갈 경우 해당 국가를 적어야 한다. '평양'이라는 글자를 적는 순간부터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상사에게 결재를 받는데, 그분이 나를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혹시, 못 돌아오는 거 아니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그때부터 버스로 이동했다. 선글라스를 낀 북측 안내자는 무척 친절하고 유머가 넘쳤다. 긴장됐던 마음이 일순간에 편안해졌다. 평양에선 모든 일정이 완벽하게 짜여 있었다. 다들 돌아보는 곳마다 사진 찍기에 바빴다. 그런데 안내자는 "버스 안에서 평양 시내를 촬영하는 건 안 된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북한'의 특정 이미지를 이용해 온 방식을 걱정했다. 가난한 독재국가, 김일성 사상에 세뇌당한 불쌍한 국민. 실제로 평양의 거리는 온통 회색빛이었고 저녁이 되면 사방이 컴컴했다. 그나마 시내엔 세련되고 깔끔한 복장을 한 이들이 많았지만 조금만 벗어나도 낡은 국방색 옷을 입고 지게를 진 이들이 보였다. 엄마는 "1960년대의 한국을 보는 것 같다"며 옛 생각에 눈물을 글썽였다.

어느 나라든 그 사회가 움직여 온 '맥락'이 있다. 그 맥락과 역사는 무시하고 우리보다 못한 모습만 부각해 이를 정치에 이용해 온 것이 우리나라가 북한을 대해 온 방식이었다. 여기에 '빨갱이'와 '미사일'까지. 평범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북한의 이미지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북측에선 모처럼 찾아온 평화와 교류의 시간이 이전의 방식을 재생산하는 데 이용되지 않길 바란 것이다. 난 그의 말에 동의했다. 평양의 거리를 찍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었지만, 버스에 타면 카메라를 가방 안에 넣고 꺼내지 않았다.

우리가 평양에 왔다는 걸 시민들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탄 버스가 줄지어 지나가면 그들은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린 아이들은 무척 쑥스러워하면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흔들던 손을 내리지 않았다. 이게 진짜 현실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고작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 그럴 수 없다니, 반가운 만큼 속상함도 컸다.

 떠나기 직전 먹은 옥류관 금강산분점의 평양냉면.
 떠나기 직전 먹은 옥류관 금강산분점의 평양냉면.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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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관에 간 건 첫 날 점심이었던 것 같다. 그땐 옥류관이 그렇게 유명한 곳인지 몰랐다. 식당 안은 아주 넓었고 동그란 테이블들이 늘어서 있었다. 평양냉면과 빈대떡이 함께 나왔다. 빈대떡은 그동안 먹어온 것과 생김새가 달랐다. 가장자리가 울퉁불퉁한 곳이 없이, 거의 완벽한 원 모양이었다. 아주 깔끔하고 정갈해보였다.

잠시 후 냉면이 나왔다. 새콤달콤한 물냉면과 달리 평양냉면은 슴슴하고 밍밍했다. 정말 그랬다. 면도 질기지 않고 이로 뚝뚝 잘라졌다. 딱히 맛있다고 하기 힘든, 약간 고전적인 듯 생소한 맛이었다. 엄마는 가뜩이나 냉면을 좋아하지 않았다.

"안 달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이것이 엄마와 나의 옥류관 평양냉면에 대한 한줄평이었다.

이듬해인 2006년엔 금강산에 갔다. 평양도 다녀왔는데 금강산쯤은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이번에도 엄마와 함께 갔다. 금강산여행은 현대아산이 담당하고 있었다. 동해선도로 남북출입사무소를 거쳐 육로로 올라갔다. 버스로 이동을 하니 2박 3일 일정인데도 비용은 훨씬 저렴했다. 금강산의 유명한 장소를 각자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식사도 짜인 일정 없이 원하는 곳에서 했다. 평양 참관 때보다 훨씬 자유롭고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버스에는 현대아산 직원이 한 명씩 배정돼 관광객을 인솔했다. 우리 차에는 20대의 젊은 남성 직원이 배치돼 이동하는 틈틈이 갖가지 설명을 곁들였다. 그는 이왕 북한에 왔으니 두 가지는 꼭 먹어보길 바란다고 했다. '금강원'의 흑돼지구이와 옥류관의 평양냉면이었다. 평양의 옥류관이 금강산에 분점을 낸 것이다. 엄마와 나는 동시에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 그 맛없는 냉면? 우린 안 먹어도 돼."

 금강산 구룡연 올라가는 너럭바위 에서
 금강산 구룡연 올라가는 너럭바위 에서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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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오후 늦게 도착해 금강산엔 가지 못했다. 다음날 아홉 마리의 용이 산다는 구룡연과 구룡폭포, 상팔담까지 둘러보았다. 특히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의 배경인, 여덟 개의 연못이 이어진 상팔담은 옥색 물빛이 고왔고 주변 경치도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그날 저녁 흑돼지구이를 먹었다. 맛은 당연히 좋았다.

마지막 날엔 만물상에 오르기로 했다. 피로가 약간 쌓인 아침, 여행 내내 우리의 발이 되어준 관광버스에 올랐다. 마지막 관광지로 향하던 차 안에서 현대아산 직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오늘처럼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면 아쉬움 때문인지 차 안 분위기가 이전과 많이 달라진다고 했다. 그런데 가장 마주하기 힘든 것은 이산가족 상봉 행사 참가자들의 마지막 날 아침이었다.

그는 금강산 관광 안내만이 아니라 당시 활발히 이뤄지던 이산가족 상봉 참가자 인솔도 맡고 있었다. 50년이 넘도록 생사 확인도 못한 채 그리워하기만 했던 가족을 만났으니 얼마나 들뜨고 설레였을까. 그러나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활기 넘치던 이들이 마지막 날 아침이 되면 무거운 침묵 속에 잠긴다는 것이다. 잠시 후면 언제 만날지 기약 없는, 또다시 길고 긴 이별을 받아들여야한다. 어쩌면 마지막이 만남이 될지 모르는.

 금강산 만물상 정상 천선대
 금강산 만물상 정상 천선대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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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은 코스가 길어 시간이 꽤 걸렸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수직으로 쩍쩍 갈라진 절벽들과 셀 수 없이 솟은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진,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내려와 한숨을 돌린 뒤 간단히 점심을 먹으려 했다. 이제 잠시 후면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휴게장소에 앉아 느긋하게 쉬며 여행을 되돌아봤다. 그 순간, 오전에 차안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한창 신났던 기분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이산가족의 마음에 너무 깊이 동화가 된 것인지, 어쩌면 나도 이곳에 다시 올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했다.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영원한 이별이라니, 눈물이 나왔다. 내가 훌쩍거리자 엄마는 "너무 힘들었나보다"라며 나를 달랬다. 나는 울면서 말했다.

"엄마, 우리 마지막으로 평양냉면 먹어요. 그거 먹어야 될 것 같아."

버스 시간까진 한 시간 남짓 남았다. 엄마와 나는 옥류관을 향해 달렸다. 마음은 급했지만 최대한 천천히 꼭꼭 씹고 국물 맛을 음미하며 한입한입 온 감각으로 냉면을 먹었다. 돌아가면 맛 볼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을까. 내게도, 엄마에게도, 그날 먹은 냉면은 인생 최고의 냉면이었다.

결국 그날 평양냉면은 북에서 맛 본 마지막 식사가 되었다. 다시 북에 갈 수 없었으니까.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맛집을 찾아다니며 평양냉면 타령을 할 때, 나는 내가 먹은 냉면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북과 관계가 단절된 후, 내가 눈물로 삼킨 그 냉면도 나와 완전히 끊어진 듯 여겼기 때문이다. 그날을 떠올리면 눈물처럼 밍밍했던 냉면이 떠올라 슬퍼졌다. 사람들이 가벼운 한 끼 식사로 그토록 '슬픈' 냉면을 원할 리 없지 않은가?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날의 냉면과, 금강산의 화려한 풍경과, 이산가족과, 단절된 슬픔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온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에서 '멀리서 어렵사리 평양냉면을 가져왔다'라는 말을 듣고 잊었던 냉면이 떠올랐다. 그랬지, 내가 그 냉면을 먹었었지. 하루 종일 눈물을 찔끔거리느라 눈이 퉁퉁 부었다.

그래도 아마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린 이들은 이산가족 당사자와 그 가족들이었을 것 같다. 다른 무엇보다 이산가족 상봉이 가장 먼저 이뤄졌으면 한다. 상봉 후 그들이 맞이해야 할 마지막 아침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아프다. 편지든, 통신이든, 그들이 지속적으로 교류를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나도 버킷리스트에 '옥류관에서 평양냉면 먹기'를 추가할까 한다. 아, 이건 너무 쉽겠구나. 그렇다면 '북한 주민들과 어깨동무하고 사진찍기' 미션도 이룰 수 있기를.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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