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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4개의 이름이 있다. 그 하나는 片岡礼佳(かたおか あやか, KATAOKA AYAKA), 일본인 아버지가 첫 딸에게 지어 준 이름이다. 두 번째는 9살이 되던 해에 한국으로 이주하면서 갖게 된 이름, 가따오까 아야까. 세 번째는 귀화를 하고 발급받은 주민등록증에 적힌 이름, 카타오카 아야카.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가 이예가. 밥벌이를 위해 내가 즉석에서 만들어 낸 이름이다.

첫 번째 이름, 片岡礼佳

서른셋의 아버지는 딸에게 片岡禮佳(KATAOKA AYAKA)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서른셋의 아버지는 딸에게 片岡禮佳(KATAOKA AYAKA)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 카타오카아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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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3년 겨울 일본 교토 야와타 시(京都府八幡市)에서 태어났다. 좁은 부지에 빽빽하게 들어선 5층짜리 공공주택 단지. 철봉과 그네, 미끄럼틀 따위의 최소한의 놀이기구가 오밀조밀 배치된 소박한 놀이터.

어린 딸은 퇴근하는 아버지를 단지 입구에서 기다렸다가 털털거리는 낡은 스쿠터 앞자리를 떡 하니 차지하고 선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붉은 해를 등지고 어린 딸과 함께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아버지는 비로소 하루 일을 마칠 수 있었다.

내 기억 속에 조각조각 잔상처럼 남아있는 동네 풍경도 그렇거니와 그 시절 아버지의 형편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내가 나고 자란 곳이 결코 잘 사는 동네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하고도 남는다.

서른셋의 아버지는 딸에게 片岡礼佳(KATAOKA AYAKA)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일본에서 '아야카'라는 이름은 흔한 축에 속하지만, 예절 예(禮/礼)를 써서 '아야'로 읽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아버지는 자랑스레 말했다. 일례로 유치원 선생님이 한자로만 적혀 있는 발표자 명단을 보고 '카타오카 레이카'라고 호명하는 바람에 내 순서라는 것을 알면서도 잠시 주춤했던 기억이 있다.

남들에게는 그저 혼란스러운 이름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젊은 아버지에게는 며칠 동안 한자 사전을 뒤지는 수고를 들여 '예절 예'를 '아야'라고 읽을 수 있다는 근거를 찾아낸 것이 무척이나 특별하고 뿌듯한 경험이었던 듯하다.

일본인 남편과 어린 한국인 아내. 그 시절 부모님의 사정이 어떠했는지는 이 나이가 되어서야 다만 짐작할 뿐이다. 감사하게도 두 분의 노력으로 나는 대체로 평범하고 무난한 유년기를 보냈던 것 같다. 소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난생 처음 보는 신기한 모양의 글자와 단어들을 생존을 위해 익혀야만 하는 상황에 부닥치기 전까지는.

아버지는 어머니의 마음이 편안해야 자식도 잘 키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기러기 아빠를 선택했노라 했다. 좀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행여 제 자식이 "너희 엄마는 조센진이지?"라는 말에 위축될까 염려되어 아내와 자식을 먼저 한국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 했던가.

누구나 한가지 생각에 사로잡히면 스스로 제 눈과 귀를 닫아 버리는 경우가 있다. 애석하게도 그 시절 젊은 아버지는 아내가 다시 돌아간 고향에서 '현지처'라는 의심을 사고, 제 자식은 '쪽발이'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국으로 이주하되 아비 된 욕심으로 자식의 국적과 이름을 바꾸지 않기를 바랐다.

두 번째 이름, 가따오까 아야까

젊은 어머니는 아이의 이름을 바꾸지 말라는 남편의 당부를 떠올리고는 하릴없이 입학 서류에 '가따오까 아야까'라고 힘주어 또박또박 적어 넣었다.
 젊은 어머니는 아이의 이름을 바꾸지 말라는 남편의 당부를 떠올리고는 하릴없이 입학 서류에 '가따오까 아야까'라고 힘주어 또박또박 적어 넣었다.
ⓒ 카타오카아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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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이른 봄, 어머니와 우리 남매는 어머니의 고향인 전라북도 전주(全州)에 터를 잡았다. 처음 몇 달간은 외할아버지 댁에서 방 한 칸을 빌려 살았다. 어머니는 단칸방에서 살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집에서 가까운, 아이 걸음으로도 5분이면 충분한 거리의 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담임 교사는 무엇보다도 내가 학급 평균을 깎아 먹을 것을 우려했던 듯하다. 아직 한국어가 서툰 내가 마침 1월생이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다행한 일이라는 듯 어머니에게 나를 1학년으로 입학시킬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어린 딸이 말을 떼기가 무섭게 가전제품에 새겨진 영문 로고를 보며 제비 새끼 같은 주둥이로 소니와 도시바, 히타치를 종알종알 읊어대던 모습이 눈에 선했단다. 어디 그뿐인가. 소학교 1학년 시절 담임 교사는 딸의 책 읽는 모양새가 꼭 아나운서 같다고 극찬을 하지 않았던가. 어머니는 아득바득 우긴 끝에 나를 2학년에 진학시켰다. 그리고 주변의 충고에 따라 담임 교사에게 양주 한 병을 선물했다.

한글 맞춤법 외래어 표기법 제1장 제4항에서는 파열음 표기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배울 기회도, 굳이 배워야 할 이유도 없었던 젊은 어머니는 아이의 이름을 바꾸지 말라는 남편의 당부를 떠올리고는 하릴없이 입학 서류에 '가따오까 아야까'라고 힘주어 또박또박 적어 넣었다.

그 이후로 나는 학창 시절을 통틀어 반에서 1번을 놓친 적이 없었다. 대한민국에 '가'보다 앞설 수 있는 성씨가 어디 있겠으며 심지어 두 번째 글자가 쌍디귿이라니.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고 심지어는 외국인 학생들도 적지 않은 대학에서조차 내 학생증 번호는 '200100001'이었다.

아버지의 편협한 기대와는 정반대로 한국에서 '가따오까 아야까'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이마 한가운데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를 새긴 전과자처럼 나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이질적인 존재임을 스스로 증명해야만 했다.

학창 시절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과 수군거림 속에서 나는 나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성적을 방패로 삼았다. 예나 지금이나 입시 위주로 돌아가는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성적은 곧 권력이었다. 때가 되면 서울대생으로 부화할지도 모를 금쪽같은 유정란을 함부로 깨트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등생이라는 황금 갑옷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책상머리에 앉아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나는 서울대생으로 부화하지 못했고 덤으로 흉추측만증이라는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만 했다.

세 번째 이름, 카타오카 아야카

법무부 직원들은 외래어 표기 규정을 정확히 숙지하고 있었고 나는 한국인 '카타오카 아야카'가 되었다.
 법무부 직원들은 외래어 표기 규정을 정확히 숙지하고 있었고 나는 한국인 '카타오카 아야카'가 되었다.
ⓒ 카타오카 아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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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인생 공부를 하며 그럭저럭 대학을 졸업했다. 빠듯한 살림에 내 밥벌이는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던 나는 적당한 회사를 찾아 사회생활을 시작할 참이었다.

그러나 취업을 준비하면서 예상치 못한 행정상의 문제에 부딪혔다. 2000년대 초반 외국인 신분으로 마뜩한 직장을 구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외국인 등록증 번호로는 본인 인증이 되지 않아 입사 지원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고민 끝에 귀화를 결심했다. 수화기 너머 법무부 직원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몇 가지 필요한 서류를 일러주며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귀화 신청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신청서가 접수되면 필기시험과 면접심사 통지가 있을 거고요, 면접까지 합격하고 나면 주민등록증이 나올 거예요."

참으로 간결하고 기계적인 설명을 끝으로 전화를 끊고 나니 귀화가 마치 홈쇼핑으로 간장 게장을 주문하는 것 못지않게 간단한 일로만 느껴졌다. 귀화 신청서를 접수하고 나서야 상황에 따라서는 서류 심사에만 1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될 수 있으며, 그 기간에는 합법적인 경제 활동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서류 심사의 진척 상황은 별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무작정 귀화시험 통지서가 날아오는 날을 목을 빼고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신청서를 접수하고 1년이 다 되어갈 무렵, 우편으로 필기시험과 면접심사 통지를 받고 어머니와 함께 과천 정부청사를 찾았다.

나는 별다른 준비 없이 필기시험과 면접심사에 임했다. 시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를 몰랐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어쨌거나 대한민국의 정규 교육 과정을 마치고 남들처럼 수능시험을 치러 대학에 입학했던 나에게 필기시험은 그저 절차에 불과했다. 가뿐하게 필기시험을 통과하고 곧바로 면접 심사장으로 향했다.

네 명의 면접관이 특유의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맞은편 책상에 앉아 있었다. 각자 할당된 서류 더미를 오른편에 쌓아 두고 한 장 한 장 해치우듯 접수번호와 이름을 읽어갔다.

"국민의 4대 의무가 뭔지 아세요? 말씀해 보세요."
"애국가 1절 불러보세요. 더 크게요."

저것이 과연 귀화심사에 온당한 수준의 질문과 요구인가. 나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이마에 맺힌 땀을 연신 소맷부리로 훔쳐내며 마른 침을 삼키는 구릿빛 피부의 곱슬머리 아저씨. 대한민국이 그를 썩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나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불편한 광경에 살짝 배알이 꼴린 상태에서 면접관을 마주했다.

"귀화는 왜 하려고 하세요?"
"저는 어릴 때부터 한국에서 자랐고, 한국 국적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면접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대답했다. "당연하다..."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짧은 순간 순화된 언어 속에 날 선 나의 분노와 반감을 그는 알아챘을까.

면접 심사를 통과하고 2006년 5월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다. 과연 유능한 법무부 직원들은 외래어 표기 규정을 정확히 숙지하고 있었고 나는 한국인 '카타오카 아야카'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 서울의 한 중견기업에 입사했다.

네 번째 이름, 이예가

일본 기업에서 근무한 1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이예가'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일본 기업에서 근무한 1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이예가'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 카타오카아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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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입사한 회사는 일본 의류 브랜드에 제품을 제조, 납품하는 기업이었던 만큼 나의 성장 배경과 일본어 실력에 상당히 호의적인 분위기였다. 유일한 문제라고 한다면 사내에서 부를 나의 이름이었다.

"혹시 한국 이름은 없니? 이런 얘기 정말 미안한데... 회장님께서 다른 직원들이 편하게 부를 수 있는 한국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네. 그래도 자기 이름인데 나는 좀 미안해서... 어쩌지? "

만약 본부장님이 회사 방침을 운운하며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면 욱하는 성질에 반항 섞인 투쟁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품위있는 그녀를 곤란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그럼 앞으로 이 예가라고 불러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어머니의 성씨인 오얏 이(李), 아야카(礼佳)를 한자 그대로 발음한 예가. 나는 앉은 자리에서 이예가라는 이름을 만들어냈고 그녀는 기뻐했다. 그리고 며칠 후 앞면에는 해외 영업 2본부 이예가 사원, 뒷면에는 'Kataoka Ayaka, Assistant'라고 인쇄된 첫 명함을 갖게 되었다.

그날 이후 일본 기업에서 근무한 1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이예가'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밥벌이라는 필요 때문에 뚝딱 만들어진 이름이지만 때로는 독특하고 예쁜 이름이라는 칭찬까지 들어가며 지금껏 함께해 온 이름이다.

출생지: 일본 교토
국적: 대한민국
성명: 카타오카 아야카
한국명: 이예가

이렇게 서른여섯 해를 살아온 나는 한국인인가 아니면 일본인인가. 지금까지 4개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오면서 상당히 오랜 시간 내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왔다.

하프저페니즈 문제를 다룬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 <hafu: the mixed-race experience in japan> 이미지.
 하프저페니즈 문제를 다룬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 <hafu: the mixed-race experience in japan> 이미지.
ⓒ HA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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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나와 같은 사람들 즉, 일본인과 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을 일컬어 하프 저페니즈(Half Japanese), 줄여서 '하프'라고 부른다. 일본 사회는 노골적으로 우리를 반쪽짜리라고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어느 사회에나 그들만의 세상에 묵직한 한 방을 날리는 선구자는 있게 마련인가 보다.

"私はハーフではありません。ダブルです。"
(저는 하프가 아닙니다. 더블이에요.)

그랬다. 나는 하프가 아니라 더블이었다. 토마토와 감자를 접붙이기하여 탄생한 톰테이토는 토마토도 감자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종(種)인 것이다. 꽤나 많은 양의 눈물을 흘리고 난 뒤에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내 인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동안 내 심장을 옥죄고 있던 크고 작은 매듭들이 하나씩 풀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어머니도 딸에게 상처를 주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다. 낯선 세상에 던져진 딸에게 새 책가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해서 소학교에서 매던 란도셀(*일본 소학교 학생용 가방) 그대로 들려 국민학교에 보냈을 뿐이다.

나는 나를 지키고자 있는 힘껏 몸을 웅크리고 가시를 세웠던 것이었지만 그런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던 이들은 그 가시에 상처를 입고 씁쓸히 돌아서야 했다는 것을 이제서야 비로소 미안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어쩌면 남들과는 조금 다른 소수자로서 겪어내야 할 아픔은 그 결이나 깊이도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픔을 곱씹으며 평생을 상처로 품고 살 것인가, 아니면 지독한 아픔을 인간의 품격으로 승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롯이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할 몫이다.

백발이 곧 지혜를 뜻하지 않는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으로 나는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파보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과 아파본 경험이 있기에 미루어 알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아픔을 딛고 아름답게 나이 든다는 것은 인생을 살면서 스스로 쟁취할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한국인인가 아닌가, 하는 이분법적인 잣대는 지금의 나에게 큰 의미가 없다. 나는 이제부터라도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그러나 무겁지 않게 살아가고 싶다. 흰머리와 주름의 개수만큼 삶의 지혜도 더불어 늘어가는 아름다운 인생을 그리며 나는 오늘도 나의 내면의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본다.


태그:#이름, #귀화, #주민등록증, #기러기아빠, #다문화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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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방인 같지 않은 이방인 AYA입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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