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세월에 비례해 현명함이 저절로 생긴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 5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늘 갈등하고 잘못하고 후회하고 배우며 살아갑니다. 오늘 실수하고 내일은 그만큼 지혜가 쌓이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중년의 좌충우돌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나는 같은 아파트에 15년째 거주중이다. 몇 층 아래에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이사를 온 60대 중반 부부가 살고 있다. 그들은 항상 밝은 얼굴, 명랑한 목소리로 주민들에게 인사말을 건넨다. 승강기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꿀이 뚝뚝 떨어진다. 재혼한 부부인가. 저 연배에 어떻게 저렇게 사이가 좋지? 집과 연결된 작은 산에 다정히 산책을 다니고 서로를 향한 존경과 애정 어린 말들을 나눈다.

그가 우리 부부를 초대했다. 오랜 시간 얼굴을 봐온 사이라 낯을 가리는 나도 좀 편안해진 상태였다. 그는 덩치가 크고 목소리가 좋다. 자동 에코가 장착되어 있는지 중저음의 동굴 목소리가 난다. 그녀는 아담한 체격에 나이와 도저히 맞지 않는 맑은 얼굴, 티 없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넷이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그는 12세에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소년가장이 되었다. 먹고사는 일이 시급하니 공부는 꿈만 같았던 시절이다. 그렇게 스무 살이 넘어 어렵사리 고입, 대입 검정고시를 치르고 9급 공무원이 되었다. 첫 근무지는 당시 서울역에서 기차로 열 시간 걸리는 삼척등기소. 그 길 위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책을 좋아해 세계문학전집을 몇 번이나 읽은 문학처자다. 둘은 살아온 이야기, 문학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안동 본가에 가는 중이었고 4시간의 짧은 만남을 뒤로 그들은 헤어졌다. 기차에서 내리는 그녀의 손에 수첩 한 장을 찢어 근무지 주소를 적어 주며 아쉬운 작별했다.

그녀에게 연락이 없었다. 그 후로 10개월. 잊을 무렵, 드디어 기다리던 그녀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녀는 그 사이 독일에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니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빴다. 우연히 수첩들을 꺼내 정리하다가 그의 주소가 적힌 쪽지를 발견하고 그제야 편지를 보낸 거다.

한번 스친 남자에게 '올인'한 여자

둘은 편지로 마음을 나눴다. 그렇게 서신을 주고받으며 서로 가까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사법고시에 응시하고 싶지만 당장 일을 그만두면 먹고사는 일이 문제가 되니 고민이라고 털어놨다.

그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타국에서 죽도록 일해서 번 돈을 기차에서 스치듯 만난 사람에게 전부 보내준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일까. 놀랍게도 그녀는 2년 동안이나 그를 지원했다(그는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어떤 확신이 있었던 걸까. 겨우 한번 만난 사람인데. 그냥 운명이었을까.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쉽다. 타인의 노력과 힘든 결정을 수고로움 없이 한번에 정리해 버리니까. 어떤 선택은 보기 좋은 열매를 맺기도 하지만 또 어떤 선택은 모든 걸 앗아가 버리기도 한다. 마음 주고 돈 주고 다 주고 나니 성공하면 떠나버리는 스토리는 흥부와 놀부 이야기만큼 유명하다. 그만큼 그런 일들이 흔하니까. 그런데 그녀는 그에게 올인했다.

드디어 3년 만에 그녀가 돌아왔다. 둘은 결혼했다.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물었다. 그녀는 '기차에서의 4시간'이 그에 대한 믿음을 주기에 충분한 시간이라 했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믿음. 이 후 편지를 주고받으며 느낀 그의 진솔함.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두 분의 닉네임)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두 분의 닉네임)
ⓒ 문하연

관련사진보기


반전은 이후에 있었다. 그녀의 갑작스런 고백. "결혼한 지 40년인데, 결혼 후 30년은 내 선택에 의심이 들 만큼 힘든 시기였어." 한평생 사랑만 받고 살았을 것만 같아보였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영화라면 이쯤에서 해피엔딩을 찍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리 호락호락하면 인생이 아닌 거지. 감동적인 이야기에 취해 내가 잠시 깜빡했다.

그는 효자란다. 감이 온다. 세상 없는 효자와 사는 불행한 여자의 스토리는 소양강댐을 채우고도 넘친다. 시댁 일은 부인이 다하고 남편은 효자가 되는 시스템. 나도 그렇게 20년이 넘게 살아 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이 분야 전문가다.

효자란 단어만 들어도 어떤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었는지 눈앞에 그려지고 가슴 속에서 뜨거운 동지애 같은 것이 올라온다. 해병대도 이런 심정일까. 나도 20살 전후의 아들 둘이 있다. 나의 목표는 이 아들들이 독립적인 불효자가 되는 것이다.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부모도 자식에게 기대지 않는 서로 독립적인 관계.

또, 그는 한 가지에 빠지면 깊숙이 빠져 그것밖에 모르는 사람이 된다. 한동안 골프에 빠져  밖으로만 돌았다. 듣다 보니 참, 남자는 부럽다. 낚시에 빠지고, 운동에 빠지고, 자동차에 빠지고, 자꾸 빠진다. 여자들은 빠지고 싶어도 허락을 받아야 하니 빠지기가 힘들다. 어디가도 되냐, 뭐 해도 되냐, 늦어도 되냐.

어쩌다 백만 년 만에 친구들과 여행을 가려 해도 절차가 복잡하다. 말을 꺼내기 전에 1안, 2안으로 계획을 짜야한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힘들게 이 말을 꺼내는지 보여주기 위해 "저기..."하면서 말을 더듬고, 깎던 과일을 떨어뜨리며 불안한 심경을 흘려야 한다.

안 된다고 했을 경우 강경책으로 나갈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신파로 나갈지 분위기를 봐가며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순발력도 필요하다. 아, 그녀는 '그가 효자라는 말과 뭔가에 빠져 가정을 소홀히 한 이야기'는 단 1분 했을 뿐인데 나는 슬프게도 이 말에 완벽하게 감정이입했다.

당신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사랑이 인내라고 했다. 그렇게 참고 기다렸더니 마침내 그녀가 꿈꾸던 그가 되었다. 가정에 충실하고 말이 통하는 남편의 모습이 된 건 최근 10년이다. 그도 점점 깨달아갔다. 그가 효자로 살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가정이 평화로울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희생과 인내가 있어서 가능했음을. 그의 에너지가 한쪽으로 쏠릴 때마다 중심을 잡아주는 그녀가 있어 가능했음을. 그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가며 그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깊어졌다.

"따스한 봄날에야 누군들 꽃을 피우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엄동설한의 추위에 꽃을 피워내긴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좋은 일만 있을 때야 누군들 사랑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어렵겠는가. 하지만 진짜 사랑은, 진짜 행복은 인생의 고비 고비에서 드러난다. 더 이상 바닥을 칠 수 없을 때, 바닥에 떨어진 그 사람을 버리지 않고 손 내밀어주는 누군가가 있을 때, 추위 속에서 더 향기롭게 피어나는 것. 그것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당신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p307)

사랑과 고마움과 애틋함이 범벅인 채로 결혼해도 살다 보면 후회와 원망의 날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 또한 여기까지 오는 데 30년이 걸렸단다. 공연히 주먹이 쥐어졌다. 나는 이제 7년 남았구나. 고지가 눈앞이다. 문득 내 남편이 꿀을 흘리며 나를 바라볼 걸 생각하니 닭살이 돋는다. 그러지는 말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참고 살다 보니 좋은 날이 왔다는 건데, 참고 살기만 하다 한평생이 가버리면 어쩌지?  내 빈약한 사랑과 커다란 걱정 사이 다시 잠 못 드는 밤이 왔다.


태그:#사랑, #인내, #꿀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 기사는 연재 주간애미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