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눈물과 홀로 수만 번을 되뇌었을 '죄송하다'는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스승의 손길에는 제자가 겪어야 했던 그간의 설움을 토닥여주지 못한 미안함이 엿보였다. 20년 만에 재회한 축구계 스승 차범근과 제자 하석주는 그렇게 서로를 꼭 껴안았다. 어긋났던 것들이 이제야 제 자리로 돌아온 순간처럼 보였다.

지난 5일 SBS에서 방송된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서 차범근 전 국가대표팀 감독과 하석주 아주대 감독이 무려 20년 만에 재회했다. 하석주 감독은 앞서 지난 6월 21일 출연한 방송에서 "얼굴을 못 들었다. 도망 다녔다. 축구 행사에도 차범근 전 감독님이 계시면 도망갔다. 아직도 감독님한테 너무나도 죄송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석주의 사과는 지난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당시 축구대표팀 선수였던 하석주는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백태클을 가했고, 결국 퇴장 당했다. 그 결과 하석주의 선제골에도 불구하고 퇴장으로 인한 수적 열세로 역전패 당하고 말았다. 실망스러운 경기 결과 때문에 당시 축구대표팀 감독이었던 차범근은 사령탑에서 경질당했다. 1998년 월드컵 이후 20년이 지나도록 하석주는 차마 미안함을 털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미안해" 20년 만에 '눈물의 재회'한 스승과 제자

 5일 방송된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중 한 장면. 하석주가 차범근과 20년 만에 눈물의 재회를 했다.

5일 방송된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중 한 장면. 하석주가 차범근과 20년 만에 눈물의 재회를 했다. ⓒ SBS


 5일 방송된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중 한 장면. 하석주가 차범근과 20년 만에 눈물의 재회를 했다.

5일 방송된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중 한 장면. 하석주가 차범근과 20년 만에 눈물의 재회를 했다. ⓒ SBS


스승이었던 차범근은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제자 하석주에게 "왜 이렇게 마음에 두고 사냐. (축구를 하다 보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퇴장)인데. 축구를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닌데"라면서 위로를 전했다. 차범근은 "1998 프랑스 월드컵은 나만 힘든 게 아니었고 하석주 감독도 힘들었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하석주 감독은 "(차범근 감독을 만나 뵐 기회가) 두 번 있었다. 눈이 나쁜 데도 감독님은 눈에 확 들어오더라. 감독님이 나오시면 도망갔다. 1~2년 지나니 소식만 듣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퇴장당하고 나서 너무나 큰일들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나는 비판을 받아도 되는데 감독님은 만약 그때 그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지금도 대표팀 감독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감독님한테 '죄송하다' 말 한마디 못하고 이렇게 흘러왔다"면서 스승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재차 드러냈다.

차범근 전 감독도 연신 '미안해'를 반복했고, "그럴 줄 알았다면 불러서 이야기를 했을 텐데. 경기장에서 그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하석주 감독을 토닥였다. 이후 스승과 제자는 2018 러시아 월드컵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본업인 축구 이야기를 통해 어색함은 금세 사라졌고, 이후 방송에서는 농담도 주고받는 모습도 보였다.

하석주 감독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축구 경기에서 때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로 인해 무거운 짐을 홀로 떠안았다. 차범근 전 감독도 마찬가지다. 국민 '영웅'이었던 그는 1998 프랑스 월드컵 실패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짊어진 채 '역적' 같은 존재가 됐다.

스스럼 없이 과거 월드컵의 이야기를 나누는 스승과 제자를 바라보면서, 씁쓸한 감정이 솟구쳐 올라왔다. '백태클과 퇴장, 경질의 아픔이 사제지간을 갈라놓을 만큼 치명적이어야 했을까' 싶기도 하다. 20년 동안 얼굴도 마주하지 못한 채, '죄송하다'는 진심도 전하지 못하고 숨어 지내야 했을까 안타깝다.

 5일 방송된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중 한 장면. 하석주가 차범근과 20년 만에 눈물의 재회를 했다.

5일 방송된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중 한 장면. 하석주가 차범근과 20년 만에 눈물의 재회를 했다. ⓒ SBS


대한민국에는 권위 있는 축구인들이 있다. 그들은 '의리로 똘똘 뭉쳐있다'는 비판을 자주 듣기도 한다. 자격증이 없이도 국가대표팀 코치가 되어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는 비판에도 신뢰와 지원을 받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짧은 기간 성적을 내지 못해 감독직에서 물러나지만, 다른 이는 자신의 실수로 인한 실패의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직을 유지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 축구계에서는 낯설지 않은 일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축구인'이라 칭한다. '하나'로 뭉치는 자세를 중시한다. '똘똘 뭉쳐 밝은 내일로 나아가야 한다'고 외치고, '힘들 때는 서로를 도와야 한다'면서 격려를 요구한다. 아이러니하다. 축구계의 '하나'가 후배의 마음까지 보듬는 '하나'일 순 없을까. 축구인들을 자처하는 다른 사람들이 하석주 감독의 마음에 난 상처를 보듬어 줄 순 없었던 것일까 궁금하다.

같은 날 후배들 향해 '쓴소리' 뱉은 홍명보

같은 날 오전, '한국 축구의 레전드' 홍명보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는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기자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홍명보 전무이사는 지상파 방송 3사 해설자로 활약하는 후배 박지성(SBS)과 이영표(KBS), 안정환(MBC)을 향해 쓴소리를 던졌다.

홍명보 전무이사는 "세 해설가가 바라보는 월드컵과 내가 보는 월드컵에 거리가 있는 것 같다"면서 "나 같은 경우 2002 월드컵 이전 1990년대 기억을 갖고 있고, 단 한 번도 증명하지 못했던 과거의 시간과 선배들의 힘이 모여 2002 한-일 월드컵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세) 해설 위원들은 젊은 나이에 처음 나간 첫 월드컵에서 성공했고, 그다음도 계속 성공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은 성공하고 다른 사람들이 못하는 것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이어 "현장의 꽃은 지도자"라면서 "감독 경험을 했다면 조금 더 깊은 해설을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는 소신을 전했다. 지난 한국 축구대표팀 경기 해설 중 한국 축구계의 문제를 지적했던 세 해설 위원의 발언에 반박하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앞서 깊은 공감을 불러 모은 차범근-하석주의 사례와 달리, 홍명보 전무이사의 쓴소리에는 다소 의아하다는 반응이 많이 나왔다. 축구팬을 비롯해 많은 누리꾼들은 SNS를 통해 '조금도 공감하기 힘들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홍명보 전무이사의 발언이 비판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홍명보 대한축구협회 신임 전무이사(오른쪽) 등 새 임원진이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하기에 앞서 기자들에게 향후 계획과 각오를 밝히고 있다.

왼쪽부터 이임생 기술발전위원장, 최영일 부회장, 홍명보 전무이사.

홍명보 대한축구협회 신임 전무이사(오른쪽) 등 새 임원진이 지난 2017년 11월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하기에 앞서 기자들에게 향후 계획과 각오를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홍명보 전무이사의 쓴소리, '공감 제로'라 비판받는 이유

우선, '2002 한-일 월드컵 성공 원인'을 크게 잘못 보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과거의 시간과 선배들의 힘"이 모여 성공할 수 있었다고 홍명보는 말했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이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실력 부족'이었다. 우리는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기 전까지 한국 축구는 '체력이 강하고 기술이 부족한' 줄 알았다. 현실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1승을 거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2002 한-일 월드컵의 성공 요인은 누가 뭐래도 선수 선발에서 '편견을 깬' 히딩크 감독이었다. A매치 경력이 얼마이든 어디서 뛰든, 히딩크는 최고의 모습을 보이는 선수만 선발했다. 당시 스타급 선수였던 이동국과 고종수가 월드컵 무대를 밟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명이었고 윙백이었던 박지성을 공격수로 끌어올리고, 대학생이던 차두리를 월드컵에 데려간 것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히딩크 감독은 한국 축구계의 기존 인식을 깨면서 파격적인 선수 선발을 했고, 박지성과 이영표가 2002년 월드컵에서 활약한 것도 이 덕분이었다. 이들의 월드컵 출전을 두고 '첫 월드컵에 나가 성공했다'고 말한 홍명보 대표이사가 비판받는 이유는, 이와 같은 전후 사정을 지우고 마치 '(박지성 이영표 등이) 그저 무임승차했다'는 식으로 들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히딩크 감독은 당시 월드컵 개막 약 6개월을 앞둔 시점까지 강인한 체력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반면 '체력이 강점'이라던 기존 축구계의 인식에서 벗어나 '우리의 기술이 세계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전과 달리 세계 강호들을 상대로 평가전을 치렀고, 0-5로 패해도 주눅 들지 않았다. 자신의 길이 옳다는 확신이 있었고, 여론에 흔들리지 않았다. 1990년대 볼 수 없었던 지도 철학이 신화를 만들어낸 셈이었다.

또 하나의 월드컵 성공 요인이 있었다면 막대한 지원이었다. 숱한 해외 전지훈련을 치렀고, 두려움 없이 강팀과 평가전을 치를 수 있었다. 히딩크의 뜻대로 대표팀이 나아갈 수 있게끔 도왔다. 무엇보다 히딩크란 명장을 데려온 투자가 있었다. 그 당시, 과거에 사로잡힌 선배들은 어떠한 목소리를 냈나. 당시 많은 축구계 인사들은 월드컵 본선 전까지 '평가전 5골차 패배' 등을 이유로 히딩크의 판단에 의문을 드러내곤 했다. 이를 알면서도 과거의 시간과 선배들의 힘이 '신화'를 만들었다 할 수 있을까.

박지성과 이영표, 안정환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저 '운'이었다는 식으로 말할 수 없다. 예로 박지성은 그 선배들이 주름잡고 있던 2002년 월드컵 전까지 대한민국 축구판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해외 무대를 떠돌던 선수였다. 피나는 노력과 남다른 도전 정신이 유럽 무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인정받는 박지성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국내에선 찾아볼 수 없는 지도자를 만난 행운도 따랐다. 이것이 더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관점에 가깝다. 적어도 '자신은 성공하고 다른 사람들이 못하는 것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이라는 해석보다는 말이다.

다시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로 돌아와서 그리고 마지막 질문을 던져 보자. 2018년 한국 축구에서 하석주와 차범근의 사례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후배들의 땀이 헛되지 않도록, 홀로 실패의 책임을 떠안지 않도록 도울 수 있는 선배들이 존재하는가. 선뜻 '그렇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같은 날 축구협회의 주요 보직에 앉은 이의 발언과 과거 대표팀 감독직에서 경질된 이의 발언을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홍명보 전무이사가 소신을 밝혀 후배들을 비판한 것과 차범근 전 감독이 후배인 하석주 감독을 위로한 것이 선명하게 비교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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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의 블랙하우스 차범근 하석주 홍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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