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도쿄 아이돌스> 스틸컷

다큐멘터리 <도쿄 아이돌스> 스틸컷 ⓒ EyeSteelFilm


"일본에는 아이돌이라 자처하는 10대 소녀가 약 만 명."
"이런 건 처음 봐요. 이건 일시적 유행 같은 게 아니라 종교예요."

어두운 객석에서 '야광봉'을 흔들며 아이돌을 응원하는 수많은 팬의 모습. 팬들 앞 무대에 서서 열심히 춤추고 노래하는 소녀들. 다큐멘터리 <도쿄 아이돌스>는 이와 같은 장면들로 시작한다. 팬이나 아이돌이 아닌 제3자의 시선으로 아이돌 문화를 본 사람들의 내레이션을 동시에 깔면서. 다큐는 '도쿄 아이돌 페스티벌'(후지TV 방영)에 참가한 소녀들의 모습으로 막을 여는데, 이는 일본 각지에서 아이돌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아이돌 선발 대회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아이돌을 자처하는 10대 소녀 1만 명 중에서 '슈퍼스타'급의 인기를 누리는 사람도 있지만, 일본의 지방 도시에서 잔잔하게 알려져 수백 명의 팬을 보유한 아이돌도 있다. 말하자면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같은 규모의 아이돌이 전국 각지에서 활동한다는 소리다. 다큐 <도쿄 아이돌스>는 이처럼 '지하 아이돌'(아직 전국적으로 유명해지지 않은 아이돌)과 그를 매주 만나기 위해 애쓰는 팬들의 모습을 비춘다.

최근 한국에서도 서바이벌 형식의 아이돌 선발 예능 프로그램에 많은 참가자들이 몰려드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런 아이돌 문화와 시스템이 이제 한국에서도 마냥 낯설지는 않다. 다만 다큐가 여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가서 비추는 일본 아이돌계의 실상은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아이돌 악수회 "성적 의미 깃들어 있다"

"청순함을 지키고 싶어, 교복을 벗을 때까지. 태어난 모습 그대로 천사와 같이..."

다큐 초반부에서 여성 아이돌 그룹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청순함'과 '교복'을 강조한다. 이에 관해 다큐에서는 문화계 종사자의 의견을 소개하는데, 작곡가인 한 남성은 "많은 일본 남성이 여성의 청순함을 동경하고 있고, 아이돌 문화는 이를 자양분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을 인용하면, 일본 아이돌 산업에 깔린 정서가 '처녀성 숭배'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아이돌 문화가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하면서, 팬들의 바람은 10대 소녀의 청순함을 멀리서 동경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어 다큐에서는 10대 여성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공연 직후 팬들을 상대로 '악수회'를 여는 장면이 나온다. '악수회'라는 이름만 들으면 한국에서 아이돌 그룹이 팬들과 직접 만나는 '사인회'를 떠올릴 수도 있는데, 행사 분위기나 취지가 조금 다르다.

 다큐멘터리 <도쿄 아이돌스> 스틸컷

다큐멘터리 <도쿄 아이돌스> 스틸컷 ⓒ EyeSteelFilm


악수회는 아이돌 멤버가 일정 금액의 돈을 지불하고 참석한 팬들과 약 1분씩 악수하며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옆에 선 스태프가 타이머로 시간을 재는 동안  "머리 잘랐네요" 하고 안부를 묻는 등의 대화가 아이돌과 팬이 손을 꼭 잡은 채로 오고 간다. 얼핏 다정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10대 아이돌 멤버의 '감정노동'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큐에서 어느 일본 학자는 아이돌 악수회에 관해 '안전한 회색지대'라고 표현하면서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일본에서) 역사적으로 악수에는 성적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원래 (남녀간) 신체 접촉은 금지인데 요즘 몇 십 년 전부터 악수가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니 악수회 개최는 굉장히 머리를 잘 쓴 경우죠. 가수 입장에서는 청순함을 잃지 않으면서 팬 입장에서는 성적 의미로 받아들이니까요." (사카이 마사요시, 경제 및 산업 분석가)

'아이돌 만나려고 한달에 200만 원 쓴다'는 중년 남성들

"천 엔짜리 CD 1장을 사면 악수를 하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보통 한 달에 20만 엔 정도 써요. 저금할 돈은 없죠."
"P.IDL(아이돌 이름)을 알기 전에는 일주일에 두세 번 부모님을 뵈러 갔어요. 지금은 거의 가지 않게 됐는데, 부모님도 이유를 알고 계세요."

다큐에서는 매주 아이돌 여성 멤버를 만나기 위해 아낌없이 돈을 쓰는 중년 남성들의 사례가 이어진다. 이들의 모습과 인터뷰 내용을 보면 흡사 돈을 쓰며 '유사 연애' 관계를 가지려는 것처럼 보인다. 다큐 제작진이 중년 아이돌 팬에게 '연애 감정이 있느냐'고 묻자 한 남성 팬은 "실제로 연인 관계가 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라고 답한다. 돈을 주고 아이돌을 만나는 관계에 한계가 있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왜 이들은 아이돌 문화에 심취하는 걸까?

"현실에서는 별 볼 일 없는 남성도 아이돌 공연에 가면 여성이 자신을 응원해주고 함께 싸워 준다는 생각에 유대감을 느낍니다." (히야다인, 작곡가)
"1990년대에 갑자기 경제가 부흥하다가 어느 순간 곤두박질쳤고 그 여파는 굉장했습니다. 지금의 도쿄는 1970년대 런던과 비슷합니다. 경제가 침체되고 문화계가 얼어붙게 되면 대중은 새로운 걸 찾게 됩니다. 결국 런던에선 '섹스 피스톨스'가 떠올랐고, 일본은 아이돌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아키오 나카모리, 문화 평론가)

 다큐멘터리 <도쿄 아이돌스> 스틸컷

다큐멘터리 <도쿄 아이돌스> 스틸컷 ⓒ EyeSteelFilm


다큐에서 인용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주류 문화에 편승하지 못한 일본 남성들이 경기 침체와 관계 단절에 소외감을 느끼고,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쉽게 관계를 맺고 만족을 얻기 위해 아이돌 문화에 빠져든다'는 진단이 나온다. 거액의 돈을 지불한 팬이기에 아이돌로부터 거절당할 염려가 없어 안도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규모를 생각하면 일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 바라봐야 할 정도다. 다큐는 자막에 통계를 인용하면서 이러한 팬덤층이 일본에서 결코 소수가 아니라고 말한다.

"장기화된 경기 침체로 아이돌 산업은 호황을 맞아, 산업 가치가 1년에 10억 달러(약 1조 1255억 원)에 달한다."

아이돌과 팬의 삶 비추며 사회적 영향까지 조명한 다큐

다큐 <도쿄 아이돌스>에서는 다양한 측면에서 아이돌 문화를 비추고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담으려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특히 '지하 아이돌'이 지역에서 소규모 공연을 열고 데뷔한 상황부터 극적으로 정식 앨범을 발매하기까지의 과정을 약 2년에 걸쳐 담아내기도 했다.

그 사례로 다큐에서는 아이돌 리오(19)와 그의 중년 남성 팬 고지(43)의 만남을 보여준다. 리오가 몇 년의 노력 끝에 마침내 도쿄에서 가장 큰 공연장에서 무대에 선 날, 팬 고지는 객석 앞자리에서 지켜보며 눈물을 흘린다. 고지의 말을 들으면, 아마 아이돌의 성장을 함께했다는 뿌듯함에 '대리만족'이 섞인 감정일 것 같다.

"결혼 준비 자금을 모으기도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다른 남자가 생겼더군요. 그래서 그 돈을 모두 아이돌에게 썼죠. 그해에만 아이돌 공연을 700회 정도 다녔어요. 날린 돈을 다 합치면 집 한 채는 샀을 걸요." (고지, 아이돌 팬)

 다큐멘터리 <도쿄 아이돌스> 스틸컷

다큐멘터리 <도쿄 아이돌스> 스틸컷 ⓒ EyeSteelFilm


이와 같은 사례를 다루면서도 <도쿄 아이돌스>는 지나치게 인터뷰 대상에 감정을 이입하거나 멀리서 너무 냉소적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감정적 비판이나 판단을 유보해 거리감을 잘 유지한 점이 다큐의 장점으로 돋보인다. 그러면서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고 적절한 분석을 덧붙여 시청자로 하여금 10년간 진화한 일본 아이돌 시스템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촘촘하게 쌓아갈 수 있게 돕는다. 그리고 아이돌 산업이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과 배경까지 여러 측면에서 조명했다.

<도쿄 아이돌스>를 제작한 여성 감독 교코 미야케는 지난 2017년 선댄스 영화제 월드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영화가 상영된 후 'Asian Film Vault' 등 해외 매체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일본 아이돌 문화를 처음 접했을 때 나의 소녀 시절이 떠올랐는데, 어느 지점이 날 불편하게 했는지 탐구하고 싶었다"며 "수많은 팬덤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했다"라고 제작 의도를 설명했다. 인터뷰에서 교코 미야케 감독은 "이 다큐멘터리가 들여다 보기 불편한 거울 같았으면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근 한국에서도 투표를 통해 아이돌 그룹의 최종 멤버를 선발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몇 년째 인기를 얻고 있다. 물론 한국 아이돌 예능은 AKB48 등의 일본 사례와는 시스템이 다르지만, 일본의 아이돌 산업이 성장하는 방향을 보면 한국의 오늘날 아이돌 문화와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된다. 미래의 한국 가요계는 일본과 같은 고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도쿄 아이돌스>에 담긴 기괴한 지점들이 한국 아이돌 문화의 내일은 아니길 바랄 뿐이다.

 다큐멘터리 <도쿄 아이돌스>의 포스터

다큐멘터리 <도쿄 아이돌스>의 포스터 ⓒ EyeSteel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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