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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8.07 09:34수정 2018.08.15 06:31
연일 폭염이다. 더워도 너무 덥다. 일부러 잡은 출장은 아니지만 북쪽 강원도는 그나마 시원하겠다 싶어서 강원도 양구로 향했다. 서울시내를 빠져나올 때 온도를 확인해보니 38도다. 북쪽으로, 북쪽으로 차를 몰아 양구에 도착하니 37도다. 도긴개긴이다. 차량 문을 열기가 두려울 정도로 강원도도 뜨거웠다.

벚꽃, 아카시아, 때죽, 밤꽃이 지면 대부분 지역에서는 한 해 꿀 농사를 접는다. 하지만 양구에서는 8월 중순까지 꿀을 채취한다. 밤꽃이 지고나면 바로 피나무가 꽃을 피운다. 예전에는 피나무 껍질은 밧줄로, 목재는 생활용품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특히, 아름드리 피나무는 최상의 바둑판 재료여서 양구에서 군 복무를 하다가 전역하거나 전출할 때 기념품으로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피나무 꽃이 지면 엄나무 꽃이 핀다

피나무에서 나는 꿀은 장마가 오래 지속되면 흉년이고, 올해처럼 장마가 짧으면 풍년이다. 장마가 짧아 애 태우는 농부들과는 정반대다. 피나무 꿀은 향이 강하다. 쌉싸름한 맛도 있어 여느 꿀보다 품격이 있다.

피나무에서 나는 꿀은 장마가 오래 지속되면 흉년이고, 올해처럼 장마가 짧으면 풍년이다. 장마가 짧아 애 태우는 농부들과는 정반대다. 피나무 꿀은 향이 강하다. 쌉싸름한 맛도 있어 여느 꿀보다 품격이 있다. ⓒ 김진영


양구 서화면 안쪽, 군 훈련장과 생태보존 지역으로 지정한 곳은 민간인 출입을 통제한다. 허가받은 몇몇 현지인들만 출입이 가능하다. 벌 농사 짓는 분의 차량을 얻어타고 비포장 계곡 길을 따라 10여 분 올라가니 좌우 산비탈에 피나무 군락지가 나타났다. 5분 거리 간격으로 벌통이 놓여 있었다.

피나무 꿀은 장마가 오래 지속되면 흉년이고, 올해처럼 장마가 짧으면 풍년이다. 장마가 짧아 애 태우는 농부들과는 정반대다. 피나무 꿀은 향이 강하다. 쌉싸름한 맛도 있어 여느 꿀보다 품격이 있다. 피나무 꽃이 지면 마지막으로 엄나무 꽃이 핀다. 봄철 개두릅으로 알려진 엄나무는 8월 중순에 꽃이 핀다. 민간인 통제구역이라 수령이 몇 백년된 엄나무들이 수두룩하다. 만일 사람 손을 쉽게 타는 곳이었다면 남아있지 않았을 듯 하다.

계곡 옆 그늘 속에 들어가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계곡 물을 손으로 떠서 마셨다. 시원하면서도 달았다. 물맛 좋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바로 앞 몇 백년된 엄나무를 보면서 내년 봄에 순을 따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밭에 꼬챙이 같은 모양새에서 나오는 엄나무순과는 달리 훨씬 센 쌉싸름한 맛이다. 아름드리 나무에 누가 올라가 순을 따줄 것 같지는 않았다. 포도나무 아래에서 군침만 삼키던 여우 꼴이었다.

출장온 MD에겐 양구는 '경후식(景後食)'이다. 일을 본 뒤에 밥을 먹는다. 이제 볼 일을 다 봤으니 민생고를 해결할 차례다. 점심 때가 지나 양구읍내로 갔다. 작년 펀치볼 시래기 취재 때 우연히 알게 된 콩탕집으로 향했다. 콩탕은 사골 국물에 콩을 갈아 넣고 끓인 음식이다. 이열치열이라고 해도 적당히 더웠던 과거 이야기지, 올해 여름은 그게 아니다.

콩을 불리고 갈아 걸러낸 콩국을 차게 식히고 국수를 만 음식. 시원한 맛으로 여름 한 철 냉면과 자웅을 겨루는 콩국수가 점심 메뉴다. 전국 웬만한 식당에서는 여름이 시작되면 '콩국수 개시'를 써붙이지만, 제대로 하는 곳이 드문 게 콩국수다. 전국 방방곡곡 출장을 다니다 두붓집에서 콩국수를 한다고 하면 고민없이 들어가 한 그릇 먹는다. 그런 곳은 아무리 못해도 기본은 한다.

이번에 찾아간 식당 역시 콩탕 백반 전문식당이지만, 여름철에는 한시적으로 콩국수를 낸다. 지난해에 왔을 때도 옥수수와 감자가 나기 전이었으니 비슷한 시기였다. 양구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름철 파프리카의 주산지이기도 하다. 콩국수를 주문하면 채를 썬 파프리카를 고명으로 얹어준다. 오이도 좋지만 아삭하고 달콤한 파프리카 또한 콩국수 고명으로 별미다.

꿩 대신 닭? '콩국수' 대신 '김칫국물 국수'

전국 방방곡곡 출장을 다니다 두붓집에서 콩국수를 한다고 하면 고민없이 들어가 한 그릇 먹는다. 그런 곳은 아무리 못해도 기본은 한다.

전국 방방곡곡 출장을 다니다 두붓집에서 콩국수를 한다고 하면 고민없이 들어가 한 그릇 먹는다. 그런 곳은 아무리 못해도 기본은 한다. ⓒ 김진영


양구 중앙시장 주차장에 주차하고, 밥 때가 지난 시간이라 천천히 시장을 둘러보며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문을 여니 손님이 없다. 없어도 너무 없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사장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하는 말. "영업 끝났는데요." 그제서야 시간을 봤고, 숨어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곳 영업시간은 오후 3시까지. 그 전이라도 콩물이 다 떨어지면 영업을 끝낸다.

내가 식당에 들어선 시간은 오후 4시가 다 됐을 때다. 혹시나 하고 사장님을 쳐다봤지만 "다음에 오세요"라는 인사만 듣고 돌아나왔다. 어쩌지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바로 옆에 콩국수 집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단체손님이 있어서 콩국이 다 떨어져 콩국수만 안 된다고 한다. 나갈까, 망설이는데 '김칫국물 국수도 시원해요'라고 하기에 그냥 앉았다.

주방 옆에 있는 제면기가 몇 번 움직이더니 얼마 있다가 국수가 나왔다. 다른 고명없이 김칫국물에 면이 다다. 단순한 음식이다. 김칫국물을 맛 보니 시원하지만 달다. 곁들여 나온 김치는 달지 않았다. 김칫국물을 만들 때 설탕을 넣은 거다. 농사를 짓다가 새참을 따로 준비할 시간이 없을 땐 찬물에 설탕을 타고 찬밥을 말아 훌훌 마시듯 먹기도 한다. 단시간에 에너지를 보충하는데는 설탕이 최고다.

농사 일을 하다가 오는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다 보니 단맛이 강하다. 면은 다 먹었지만 국물은 달아서 남겼다. "국수 맛있죠?" "제 입맛에는 다네요." "진작에 이야기하지, 그럼 (설탕을) 안 넣을 건데." "다음에는 미리 말씀드릴게요." 5000원 지폐 한 장을 건네고 나왔다.

8월 중순이 지나면 다시 양구에 갈 거다. 다른 어떤 꿀보다 향기롭다는 엄나무꿀을 보러 가는 길이다. 꿀도 꿀이지만, 고소하고 시원한 콩국수도 맛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오후 3시 전에 도착해야지. 다음번 양구는 식후경(食後景)이다. '식(食)'은 콩국수다.

주방 옆에 있는 제면기가 몇 번 움직이더니 얼마 있다가 국수가 나왔다. 다른 고명없이 김칫국물에 면이 다다. 단순한 음식이다.

주방 옆에 있는 제면기가 몇 번 움직이더니 얼마 있다가 국수가 나왔다. 다른 고명없이 김칫국물에 면이 다다. 단순한 음식이다. ⓒ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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