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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무비서에 대한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14일 오전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 성폭력 혐의 무죄 받은 안희정 정무비서에 대한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14일 오전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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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분들께 정말 죄송합니다. 무엇보다 저로 인해 고통을 받았을 김지은 씨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저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입니다.모두 다 제 잘못입니다. 오늘부로 도지사 직을 내려놓겠습니다. 일체의 정치 활동도 중단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모든 분들께 정말 죄송합니다.

안희정 올림

지난 3월 6일 새벽,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전날 저녁 그의 수행비서 김지은씨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안 전 지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폭로 인터뷰를 한 지 불과 몇 시간 후에 게시된 글이었다.

이 글에서 안 전 지사는 방송 직후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해명을 뒤집고 자신의 "잘못"이라고 못 박았고, 도지사 직에서 자진 사퇴하겠다고 했다. 김씨는 6일 서울서부지검에 안 전 지사를 고소했고, 안 전 지사는 이틀 뒤인 8일 예정된 기자회견을 "검찰 수사 협조가 우선"이라며 돌연 취소했다가 9일 검찰에 자진 출석했다.

"다시 태어나도록 더 노력하겠다."

그로부터 다섯 달여가 지난 14일 오전, 카메라 앞에 선 안 전 지사는 "국민들에게 죄송하다"며 "다시 태어나겠다" 했다. 피해자 김씨에 대한 사과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물음엔 침묵했다. 첫 입장문에서 그 누구보다 먼저 "김지은씨에게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했던 충남도지사 안희정은 이제 없었다. 변호인을 통해 적극적으로 합의에 의한 관계였음을 소명하고, 김씨의 과거와 행실을 문제 삼던 피고인 안희정만이 "국민"을 소환하고 있었다. 

"정조" 운운하며 무죄 판결한 재판부

그런 안 전 지사에게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조병구 부장판사)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안 전 지사의 피감독자 간음·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강제추행 혐의에 대해 "증거가 부족한 이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처럼 피해자가 성관계에 대해 명시적으로 동의한 적이 없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거절했다고 해도 현재 우리 처벌 체계 하에서 이런 사정만으로 피고인의 행위가 처벌의 대상이 되는 성폭력 범죄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검찰의 공소사실만으로는 피해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 침해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재판부가 내린 무죄 판결의 요지였다. 잘 알려지다시피, 검찰의 구형은 4년형이었다.

여성단체는 즉각 반발했다. "재판부가 이 사건의 사회적 의미와 무게감에 대한 고민 없이 무죄추정 원칙과 죄형법정주의에만 치중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일부 법조인은 '일부 무죄'도 아닌 전부 무죄 판결에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내놓기도 했다.

정치권 중 야권은 일제히 유감을 표명했다. 자유한국당과 정의당, 바른미래당은 이날 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내고 재판부의 무죄 판결에 심각한 유감을 나타냈다. 반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민주평화당은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자유한국당 신보라 원내대변인은 "대한민국 곳곳에서 안도하고 있을 수많은 괴물들에게 면죄부를 준 사법부의 판결"이라며 "안희정 전 지사 무죄 판결은 미투 운동에 대한 사형선고"라고 주장했다. 정의당 최석 대변인은 "'술을 먹고 운전을 했으나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다"고 꼬집었다.

"법원은 안 전 지사가 피의자에게 위력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위력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위력은 있는데 위력행사는 없었다. '술을 먹고 운전을 했으나,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다. 상식적으로 법원의 판결을 납득하기 어렵다.

이번 사건으로 사법부의 한계는 뚜렷이 나타났다. 관행상, 판례상 법 해석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판결문을 통해 재판부조차 현재 우리 성폭력 범죄 처벌 체계가 국민의 생각과 동떨어져 있음을 시인하면서도, 그와 동떨어진 법해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지금과 같은 법체제하에는 동일한 성범죄 사건이 또 다시 일어나도 처벌받을 일이 없다는 말이다. 결국 조직 내에서 권력을 가진 이가 위력을 행사해 성범죄를 저지를 수 있도록 허용한 것과 다를 바 없다. 현재 대한민국 여성 성범죄엔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다. 이제는 우리 국민 모두가 가해자를 찾을 때이다." (정의당 최석 대변인)


"대한민국 여성 성범죄엔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다"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1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1심 무죄 판결을 규탄하고 있다.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1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1심 무죄 판결을 규탄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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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미리 예고되었던 결과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재판정에서 피해자다움과 정조를 말씀하실 때, 결과는 이미 예견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부당한 결과에 주저앉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굳건히 살고 살아서, 안희정의 범죄 행위를 법적으로 증명할 것입니다. 권력자의 권력형 성폭력이 법에 의해 정당하게 심판 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판결 직후 입장문을 낸 김지은씨는 "끝까지 싸울 것"이라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러면서 안 전 지사의 혐의를 "권력자의 권력형 성폭력"이라 강조했다. 이날 김씨가 내놓은 입장문 중 눈에 띄는 대목은 판사가 재판정에서 "피해자다움과 정조"를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이날 재판에 참석한 여성단체 역시 소셜미디어를 통해 "판사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정조를 지키지 않고 뭘 했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도지사 직위의 남성 권력자가 스무 살이나 어린 여성 비서를 위력과 위계에 의해 성폭행했다는 혐의를 받은 사건을 두고 그 피해자에게 "정조"를 들먹였다면 재판부는 과연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가. 이날 재판 결과를 두고 정의당의 논평과 같은 반응이 주를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재판부의 무죄 판결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거나 재판부가 위력행사에 의한 성범죄를 사실상 용인한 것이란 반응 말이다.

소셜 미디어와 여성 커뮤니티 사이에선 사법부의 무죄 판결에 거센 반발이 일고 있다. 특히나 전날인 13일 서울서부지법 형사6단독 이은희 판사가 '홍대 누드모델 불법 촬영' 사건의 피의자인 여성 모델에게 1심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한 것과 관련해 경찰의 '편파수사' 논란이 사법부의 '편파 판결'로 불붙는 분위기다. 기존 몰카 범죄나 디지털 성범죄를 저지른 초범들에게 벌금형이나 집행유예를 선고했던 사법부의 기존 판결과 상반되는 결과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이날 안 전 지사의 무죄 판결 역시 동일선상에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사법부가 위력에 의한 성범죄를 인정하는 것은 물론 한국 사회 전반에 물든 여성 성범죄에 대한 무지와 몰상식을 그대로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란 규정과 반발이 들끓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국가가 사법부가 경찰이 공범인 수준도 아니고 이쪽이 진범이다."

안 전 지사의 판결 직후 한 트위터 사용자가 적은 게시글이다. 이틀간 사법부가 내놓은 판결과 관련해 "어이없다"는 반응은 약과다. "청부살인"이란 단어까지 들먹이는 여성들이 등장하는 중이다. 여성 성범죄 피해자들이 믿지 못할 한국의 법체계보다 "청부살인"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낫다는 웃지 못할 한탄이 넘쳐나고 있다.

누구의 책임인가. 안 전 지사의 선고 직후 '안희정 무죄판결에 분노한 항의행동'이란 이름의 단체가 오늘(14일) 저녁 7시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안희정 무죄 선고한 사법부 유죄'라는 제목의 집회를 예고하고 있다.

이렇게 안 전 지사에 대한 사법부의 무죄 판결은 '홍대 몰카 편파수사' 집회로 가시화된 여성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됐다. 여성들이 남성 중심의 한국 사회 분위기 전반을 재고하는 것을 넘어 광장에 나와 '편파 수사'와 '편파 판결' 반대를 외치며 실질적인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는' 자 누구인가.

바로 '시대를 거스르는' 수사기관의 미심쩍은 수사와 상식에 반하는 사법부의 판결 아닌가. "현재 대한민국 여성 성범죄엔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다. 이제는 우리 국민 모두가 가해자를 찾을 때"라는 정의당의 논평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지금이다. 


태그:#안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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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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