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가부장제 중심의 명절 문화를 21세기에 걸맞게 직접 고치고 바꿔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것들의 명절'에서 그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추석 연휴가 2주 앞으로 다가온 9일 부산 금정구 영락공원에서 성묘객들이 조상묘에 벌초를 하고나서 절 하고 있다.
 추석 연휴가 2주 앞으로 다가온 9일 부산 금정구 영락공원에서 성묘객들이 조상묘에 벌초를 하고나서 절 하고 있다. (자료사진)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이제 벌초도 없고, 제사 안 지낸다."

올해 봄, 어머님은 오랜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아버님의 산소를 정리한 거다. 산 중턱에 모셔진 유골을 화장하겠다는 말씀을 종종 했는데, 일사천리로 일 처리를 진행하더니 앞으로는 벌초도 제사도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어머님의 결단에 놀란 것은 남편이다. 벌초라고 해봐야 일 년에 한 번뿐이고, 제사도 약소하게 지내고 있어서 큰 부담은 아니었다. 자식들과 상의 없이 어머님 혼자 결정하고 실행했다는 사실에 남편은 서운한 감정을 내비쳤다.

"그 정도는 자식 도리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 그게 뭐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아버님은 1녀 3남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막내인 남편이 2살 때 일이다. 같은 여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머님이 느꼈을 상실감과 막막함, 말 못할 고통이 헤아려진다.

요즘은 거의 화장을 하는 편이지만 그때는 보편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을 위해 40년 넘게 제사와 벌초를 해온 어머님은 자식들에게 작은 부담도 남기지 않길 바라셨고, 올해 칠순을 맞이하며 그동안 막연히 생각만 해오던 일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어머님은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정말 멋진 분이다. 호탕하고 진취적인 기질을 타고났다. 명절에 재래시장에 함께 가면 꼭 할머니들께 물건을 사고, 그분들께 100원도 깎지 말라고, 서비스로 뭐 하나 달라 흥정하지 말라고 가르쳐주기도 했다. 시대를 잘 타고났다면 성공한 사업가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 혼자 속으로 '여자로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큰일을 했을 분인데...' 하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사람 대 사람으로 생각하면 미워하거나 싫어할 여지가 전혀 없는 쿨하고 따뜻한 어른. 굴곡진 삶을 당당하게 살아낸 주인공. 그 어떤 젊은이보다 진보적인 정치에 관심이 많은 시민.

아무리 어머님이 존경할 만한 멋진 분이라 해도 오랜 성차별 관습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남자 집안을 우선시했고, 며느리는 남자 집안에 속하는 '아랫사람'으로 인식해 사소한 말 한마디로도 서로 불편해지곤 했다. 가부장제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만났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최선인 줄 알았다.

그러다 올해 어머님께서 벌초와 제사를 없애는 모습을 보며 생각을 바꾸게 됐다. 아들인 남편 입장에서는 서운할 수도 있지만, 며느리인 나로서는 없어진 제사가 내심 반가웠고 그런 결단을 내려준 어머님께 감사했다.

장기적으로 누구보다 날 생각해주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어머님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어머님을 무조건 시어머니라고 거리를 두기보다는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여자의 적은 여자?
 
 요즘 어머님은 시가에 온 남편에게 식사 후 설거지를 시킨다.
 요즘 어머님은 시가에 온 남편에게 식사 후 설거지를 시킨다.
ⓒ unsplash

관련사진보기

 
"시대가 달라졌으니까 남자들도 설거지해야지."

요즘 어머님은 시가에 온 남편에게 식사 후 설거지를 시킨다. 애 둘 키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므로 부인에게 잘해야 한다거나, 육아하는 게 곧 돈을 버는 거니까 회사 다닌다고 유세 부리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어머님이 살아오신 삶에 비하면 나의 삶은 편안하고 쉬워 보일 텐데도 당신과 나의 삶을 쉽게 비교하지 않는다. 시대가 좋아졌어도 여전히 여자의 삶은 불쌍하고 힘들다며 편들어 준다. 사십이 넘은 딸에게도 결혼하라는 흔한 잔소리 한 번을 안 하고, 비혼으로 살 거라는 딸에게 잘 생각했다고 결혼하지 말라고 호응해준다.

"나는 여자 편이다. 다시 태어나면 나도 결혼 안 하고 자유롭게 살 거다. 결혼은 여자 손해지."

며느리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이런 말씀을 하며 결혼 생활이 여성을 얼마나 힘들게 옭아매는지, 자신보다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헌신하는 삶이 얼마나 고생스러운지를 적나라하게 고발하시곤 한다. 그럴 때면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것 같아 힘이 된다.

"자식들은 오면 반갑고, 빨리 가면 더 반가운 거다. 나 힘들게 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서 친정으로 가."

명절에도 최대한 빨리 친정으로 가라며 등 떠미는 사람은 어머님이다. 아무리 잘해주고 일을 안 시켜도 며느리에게는 남편 식구들이 모인 곳이 그저 불편한 곳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며 떠나는 발걸음이 가볍도록 농담을 보태주는 어머님.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데, 어머님은 나의 적이 아니라 방패 같은 존재다.

어머님이 경험한 힘듦을 며느리에게는 반복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이 있었던 건지, 정말 내가 곁에 있으면 더 힘들고 불편한 쪽이 어머님이라 등 떠미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내가 짊어질 뻔한 많은 짐들을 먼저 나서서 내려주는 모습에 감동하곤 한다. 어머님은 여자 편이라는 말씀이 귓가에 오랫동안 맴돈다.

결혼 7년 차가 되면서 알게 됐다. 나는 어머님의 실체를 알지도 못하면서 첫 만남부터 막연히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나와 어머님이 인간적인 관계로 다정해질 수 없었던 것은 어머님의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제의 문제였다. 아무리 쿨하고 진보적인 어머님 같은 사람도 수십 년을 옭아매온 가부장제를 뛰어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연대할 수 있다

어쩌면 수많은 여성들은 가부장제에 짓눌려 서로를 나쁜 사람으로 내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가부장제가 명절마다 남자는 안방으로, 여자는 부엌으로 내모는 병폐의 근원인데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고부끼리 원망하고 갈등하는 것이다.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다른 집 '고부갈등' 사례 역시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지만, 부정적인 이야기를 너무 많이 접하다 보면 시어머니를 경험하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괜히 거리를 두게 된다.

경악할 만한 고부갈등 이야기들은 남편들의 정신승리("우리 엄마는 저 막장 시어머니보다 낫지 않냐") 또는 며느리들의 자기위안("그래도 우리 시어머니는 양반이네")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문제의 근원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프레임에서 승자는 결국 가부장제다.
 
 나는 어머님과 솔직한 대화 후 같은 여자로서 연대감을 느꼈다. 사진은 지난 2012년 방영된 KBS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고부협정'을 맺는 장면.
 KBS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고부협정"을 맺는 장면.
ⓒ KBS

관련사진보기

 
나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에 공감하지 않는다. 여자의 적은 가부장제다. 대부분의 여자는 누군가의 딸로, 며느리로, 엄마로 살아오며 가부장제의 피해를 몸소 겪어왔기에, 그 누구보다 여자의 입장을 깊이 이해할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고 본다.

달라진 사회에 발맞춰 누구보다 먼저 며느리의 입장을 헤아리며 며느리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시어머니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앞으로의 시대에서는 고부갈등 사례보다 고부연대의 이야기가 더 많이 회자되길 기대한다. 시어머니의 파격적인 태도 변화로 달라진 명절 풍경, 혹은 며느리들끼리 힘을 모아 명절 파업을 하며 직접 문화를 바꿔가는 투쟁 사례 등이 더 많이 알려지기를 바란다.

여성 연대의 사례들이 많이 알려질수록 며느리와의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지 못하던 어머님들도 자극받으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될 것이고, 순응하던 여성들도 며느리라는 역할에 작은 균열을 내볼 용기를 가질 수 있으리라.

여성이 여성과 힘을 모아서 가부장제의 나쁜 관습을 바꿔나간다면 여성들에게 부여된 과중한 부담이 조금씩 걷어지고, 갈등만이 연상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도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나는 여자 편이다"라고 말하며 변화의 물꼬를 트는 시어머니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고부연대야말로 남녀노소 모두가 즐거운 명절을 만드는 지름길이라 믿는다. 

댓글2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