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소심해보였던 박차오름이 한세상에게 부당하게 자리를 뺏긴 뒤 당당하게 말하는 장면.

늘 소심해보였던 박차오름이 한세상에게 부당하게 자리를 뺏긴 뒤 당당하게 말하는 장면. ⓒ JTBC

 
지난 5월부터 7월까지 방영됐던 JTBC <미스 함무라비>는 새내기 여성판사 박차오름(고아라)이 만나는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진정한 평등과 정의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였다.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도 묵직한 메시지를 전했던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박차오름. 그녀는 똑똑하고, 활달하며, 자기주장 강한 현대 전문직 여성 캐릭터의 맥을 잇는다. 하지만, 박차오름은 그 동안 남성중심의 시각에서 비하되어왔던 여성적 특징들, 그러니까 ▲정서적 풍부함 ▲보살핌 능력 ▲공감 능력 등을 강점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다. 특히, 이와 같은 강점들을 발휘하는 시점이 그녀가 가부장적 억압에서 벗어난 후부터라는 설정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가부장제의 그림자에 가려진 당당함

드라마의 첫 회. 박차오름은 판사로 첫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무례한 행동을 하는 이들을 제압하며 등장한다.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는 남성, 큰 목소리로 전화통화를 하는 아주머니에게 불편함을 표현하고, 성추행하는 남성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토록 당당한 그녀의 학창시절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고등학생 박차오름은 말 수가 적고, 다른 사람과 눈을 잘 마주치지조차 못하는 소심한 소녀였다.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피아노 개인교습 강사에게도 'No'라고 말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며 지냈던 소녀는 성인이 되어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박차오름을 좋아했던 임바른(김명수)조차 알아보지 못할 만큼 정반대의 모습으로 변신한 그녀의 진짜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까.
  
드라마의 마지막 부분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이에 대한 답을 알려준다. 고등학교 시절, 박차오름은 도서관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고시준비생 한세상(성동일)에게 "아저씨, 여기 제 자리예요. 저는 못 비키겠으니까 저기 빈자리에 앉으세요" 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임바른의 요구에도 물러서지 않던 한세상은 박차오름의 당당함에 자리를 옮기고 만다. 이는 박차오름이 본래 불의를 참지 못하고 맞서는 용기를 지닌 인물임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이런 당당함을 숨기고 주눅이 든 채 살아왔던 걸까.

이는 드라마 곳곳에서 드러나는 성장배경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박차오름의 아버지는 성공한 기업인이었지만, 집안에서는 독재자로 군림하는 인물이다. 집 안에 작은 먼지라도 발견되면, 사정없이 어머니를 구타하며 가정폭력을 자행하던 아버지.

이런 아버지의 군림 아래 어머니는 참고 또 참으며 숨죽여 울어야 했고, 박차오름 역시 자신의 본성을 숨긴 채 아버지에게 맞춰주며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여성이 활기차고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가부장적 억압은 이토록 밝고 활달한 소녀가 자신의 본성을 숨긴 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가부장의 죽음, 그리고 되찾은 나
 
 박차오름은 부당한 일을 당한 이들의 사연에 함께 눈물 흘리며 공감해준다.

박차오름은 부당한 일을 당한 이들의 사연에 함께 눈물 흘리며 공감해준다. ⓒ JTBC

 
이런 환경 속에서 박차오름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자신에 대한 미움으로 돌린다. "전 그 때가 젤 별로예요. 바보 같이 미워할 거랑 무서워할 거랑 구분도 못하고. 그래서 모든 걸 무서워했던 것 같아요. 저 자신만 미워하고. 아 진짜 별루였다." 6회 박차오름의 이 대사는 소녀시절 잔뜩 겁먹은 채 지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다.

아마도 박차오름에게 집안의 경제적 몰락과 아버지의 자살은 오히려 숨통을 틔워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아버지의 자살을 목격하고 무너져 가는 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들은 분명 그녀에게도 큰 상처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박차오름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되찾는다.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충격으로 치매에 걸려 요양병원에 입원한 후 박차오름은 시장에서 일하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그 곳엔 가부장이 없다. 외할머니와 오갈 곳 없는 시장 이모들과 함께 꾸린 가정은 서로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보듬는 연대의 공간이었다.

가부장이 사라진 이곳에서 박차오름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억압해 둔 자신의 본성을 마음껏 발산하며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또한, 남성에게 의존했다 상처받은 이모들을 보며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판사의 길을 선택한다.

감성적인, 보살피는 판사, 꽃피우는 여성 리더십

이렇게 판사가 된 박차오름은 밝고 활달하며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하는 '튀는 판사'로 명성을 날린다. 하지만, 그녀가 보여준 모습들은 단지 씩씩하고 당당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의료사고로 아들을 잃고 홀로 시위를 하는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법정에서 만나는 약자들의 사연에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공감한다.

부모 없이 지내는 아이들과 비행 청소년을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보살펴주기도 한다. 박차오름이 보여주는 이런 특성들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그토록 비하해왔던 여성성의 전형들이다. '여성은 감정적이고, 감정적인 것은 열등한 것이다'라는 논리는 오랫동안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을 냉철한 사회생활에는 적응할 수 없는 '돌봄제공자'로만 규정하고, 남성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도록 유도해 온 근거가 되어왔다.
  
드라마 초반 박차오름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선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선배 판사들은 늘 그녀에게 감정을 숨기라고 충고한다. 또한, 법원사회의 부당함을 개선하기 위해 시작한 일들을 '감정이 앞서 사리분별을 하지 못한 행동'쯤으로 치부한다.  
 
 박차오름은 법원의 다른 직원들과 서열을 허물고 보다 평등하고 인간적인관계를 맺어간다.

박차오름은 법원의 다른 직원들과 서열을 허물고 보다 평등하고 인간적인관계를 맺어간다. ⓒ JTBC

 
하지만,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그녀의 감성과 공감능력은 가치를 발한다. 박차오름이 공감한 약자들은 판결에서 정당함을 인정받았고, 패소하더라도 강자의 부당함에 경종을 올린다. 특히, 성추행 사건에서 '증거불충분'으로 패소했지만, 박차오름의 진한 공감에 다시 살아갈 힘을 내는 피해자의 모습은 여성의 감성과 공감능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그녀가 법원 내에서 평등한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장면이었다. 박차오름은 '판사'임에도 서기, 법원공무원 심지어 환경미화요원들과도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를 맺는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판사님'으로 불리는 걸 즐기지 않고 먼저 '언니'라고 부르며 상하관계를 허무는 모습은 수평적 관계를 선호하는 여성적 관계 맺기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평등한 관계는 직장 구성원들 간의 마찰을 최소화해 업무의 효율까지 높여주었다.
 
이처럼 <미스 함무라비>의 박차오름은 가부장제가 여성을 어떻게 억압하는지를, 그리고 그 억압이 풀렸을 때 발휘되는 여성의 능력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캐릭터였다. 드라마에서 박차오름으로 표현되는 여성적 가치들은 이성, 판단, 냉철함, 서열 짓기 같은 남성적 가치들로 무장한 법원이라는 조직의 부조리를 밝혀내고 이를 개선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어쩌면 오랫동안 가부장적 질서로 유지되어 온 우리 사회에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박차오름이 보여 준 여성적 리더십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제발 여성들을 가부장적인 잣대로 판단해 구속하려 하지 말자. 박차오름이 그랬듯, 여성이 품은 고유한 능력이 이 사회에 균형감을 선사하고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덧) '남성적 가치' '여성적 가치'라는 이 말 자체가 어쩌면 가부장 사회의 이분화 논리를 따른 부적절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박차오름이 감수성과 단호함을 함께 지녔듯,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느 한 가지 성향만 가진 것은 아닐 테다. 우리 모두가 가부장문화에서 규정짓는 성역할이 아닌, 타고난 본성을 그대로 표현하고 존중받을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이런 다양성이 인정될 때 보다 나은 세상이 되리라 믿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미스함무라비 박차오름 고아라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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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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