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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기자말

「동작 민주올레」 – <대방길>
▶ 코스안내 : ①서울영화초 - ②영등포고 - ③유일한기념관 - ④실미도 사건의 현장 - ⑤캠프 그레이 미군기지 터(미군 502군사정보단) - ⑥서울시립부녀보호소 터 - ⑦공군기념탑 - ⑧숭의여중고 - ⑨성남고 - ⑩서울공고


[기사 수정 : 2020년 7월 20일 오전 11시 49분]

서울의 동작구에 속해 있는 대방동은 원래 번댕이라 불리던 마을이었다. 현 대방초등학교 자리(행정구역상 지금은 영등포구 신길동)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그 둘레에 마을이 형성되어 번댕이라고 불렀고 한자로는 '울타리 번'자와 '못 당'자를 써서 樊塘里(번당리)라고 했다. 이어 조선 후기에 들어와 번대방리(番大坊里)로 불리다 경기도 시흥군에 속해 있던 이 지역이 1936년에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번대방정(町)으로 바뀌었고, 해방 후 대방동이 되었다.

①「혼혈아 학교」로 출발한 서울영화초, '다문화 시대'를 생각하다
 
영화초등학교 입구 영화초등학교는 1962년 개교 당시 국내 유일의 「혼혈아 학교」였다.
▲ 영화초등학교 입구 영화초등학교는 1962년 개교 당시 국내 유일의 「혼혈아 학교」였다.
ⓒ 양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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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길 탐방은 서울영화초등학교에서 시작한다. 영화초가 있는 동네는 예전에는 높은절이(高寺里)라 불렀는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재편 당시 번대방리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1962년에 설립된 영화초는 특별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영등포중학교 교실을 빌려 개교한 영화초는 출범 당시 전국 유일의 「혼혈아 학교」로 일종의 특수학교였다. 영화초의 뿌리는 1958년 미군의 원조로 이태원에 세워진 「유엔 성자학원」이다. 「유엔 성자학원」이 경영난에 봉착하자 서울시가 이를 인수하여 대방동에 정식으로 세운 학교가 바로 영화초였다. 6·25한국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하면서 참전한 외국군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교육할 기관의 필요 때문에 탄생한 학교였던 것이다. 

그러나 63명의 어린이로 시작한 영화초는 출범부터 '혼혈아'들을 격리 교육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64년 9월부터 일반학교로 전환하여 대방동, 노량진동 학생들이 대거 편입해 들어오게 되면서 특수학교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배움의 이색지대"(동아일보, 1962. 11. 3) 영화초등학교는 개교 당시부터 '혼혈아 학교'라는 특성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 "배움의 이색지대"(동아일보, 1962. 11. 3) 영화초등학교는 개교 당시부터 "혼혈아 학교"라는 특성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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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학교가 출범할 당시 동아일보는 「배움의 이색지대」(1962. 11. 3)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지나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외부사람들의 호기심과 「이상한 눈초리」를 가장 싫어한다. 비록 선의의 손길일망정 외부와 접촉을 꺼리는 반면 자기들끼리의 친화와 단결은 대단하다"고 소개하고 있다.

「보호권 외의 혼혈아」(1963. 3. 20)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우리들을 잘 보살펴주든지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무관심해 달라. 제발 놀리지는 말아 달라. 순진하게 자라고 싶다』는 열두 살짜리 혼혈아의 호소(?)는 이들의 공통된 심리인 것 같다"고 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우리 사회가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을지, 해당 어린이들이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런 영화초의 역사는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되돌아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초 개교 당시 전국의 '혼혈아'는 5천여 명(보사부 등록 기준 1,500여 명)이었지만, 대부분 초등교육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대개 외국에 입양되는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혼혈아 학교」였던 영화초 앞에서 1960년대 당시 우리에게 너무 부족했고 지금도 여전히 부족한 소수자에 대한 개방적이고도 포용적인 자세,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열린 자세의 중요성을 새삼 곱씹어 보게 된다.

② 영등포고 학생들, 민주화운동에 나서다
  
영등포고등학교 입구 1959년 개교한 영등포고등학교는 1964년 굴욕적 한일회담반대운동에서부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섰다.
▲ 영등포고등학교 입구 1959년 개교한 영등포고등학교는 1964년 굴욕적 한일회담반대운동에서부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섰다.
ⓒ 양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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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초 바로 옆에는 영등포중고등학교가 있다. 동작구에 영등포중고가 있는 이유는 이곳에 1973년까지는 영등포구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영등포중은 서울공고와 영등포중으로 분리된 서울공업중학교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그 역사가 1899년 세워진 상공학교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서울공고 이야기를 할 때 자세히 다룰 예정이므로 오늘은 1959년에 개교한 영등포고 이야기에 집중하고자 한다.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의 영등포고는 1, 2학년 학생만 있는 신생학교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런지 4·19혁명 과정에 학교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참여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등포고가 4·19혁명의 한 페이지에 등장하게 된 것은 전혀 뜻밖의 일 때문이다.

영등포고 학생 정하웅(당시 2학년)과 한무섭(당시 1학년)은 동네 친구 이용우(당시 선린상고 2학년), 김의웅(낙양공고 2학년)과 함께 4·19혁명 과정에서 부상당한 동료 학생들을 돕기 위한 모금운동을 벌인다. 모금운동은 남달리 의협심이 강했던 한무섭이 친구 이광국(당시 한국직업학교 학생)이 4.19혁명 당시 경무대 앞에서 부상당해 서울대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발생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동네 친구들에게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동네에 있는 건의함으로 모금함을 만들고 '서울 학생 대표'라고 쓴 어깨띠를 두른 다음 인천 자유시장, 서울 남대문시장과 평화시장 등을 돌면서 모금활동을 벌였고, 심지어 피난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멀리 부산까지 가서 국제극장에서 모금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무섭 일행은 모금한 돈 2만9180환을 한 언론사 부산지국에 전달하였고, 그 사실이 해당 언론에 보도된다.
 
 4.19혁명 당시 영등포고 1학년이었던 한무섭은 친구 이광국이 경무대 앞에서 부상당한 후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해 동네 친구 정하웅, 이용우, 김의웅과 함께 부상자들을 돕기 위한 모금활동을 벌였다.(<동아일보> 1960년 5월 3일자 기사)
 4.19혁명 당시 영등포고 1학년이었던 한무섭은 친구 이광국이 경무대 앞에서 부상당한 후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해 동네 친구 정하웅, 이용우, 김의웅과 함께 부상자들을 돕기 위한 모금활동을 벌였다.(<동아일보> 1960년 5월 3일자 기사)
ⓒ 동아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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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때는 집단적으로 나서지 못한 영등포고 학생들이었지만, 1964년부터 시작된 한일회담반대투쟁에는 그 선두에 선다. 5·16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군사정권이 국민의 뜻을 거스르고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추진하자 신속하게 투쟁의 대열을 갖추고 나선 것이다.

한일회담반대운동(6·3항쟁)은 1964년 초 박정희 군사정권이 조속한 한일협정체결방침을 천명하고 이즈음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해 6월 3일을 정점으로 1965년 굴욕적인 내용의 한일협정이 조인되고 여당 단독으로 국회비준이 이루어지는 시기까지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었다.

영등포고생들은 한일회담반대운동 초반부터 전면에 나선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대생 등 5천여 명이 「사수하자 평화선」, 「일본제국주의를 말살하자」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위를 벌이면서 한일회담반대운동이 본격화된다. 4일간 계속된 시위의 마지막 날인 3월 27일에 영등포고생 900여 명이 중앙청 앞 시위에 합류한 사실이 당시 언론에 보도된다.   
   
영등포고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 관련 신문 기사(경향신문, 1964. 3. 27) 1964년 3월 27일 900여 명의 영등포고 학생들은 중앙청 앞까지 진출하여 박정희 군사정권의 굴욕적 한일회담 추진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 영등포고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 관련 신문 기사(경향신문, 1964. 3. 27) 1964년 3월 27일 900여 명의 영등포고 학생들은 중앙청 앞까지 진출하여 박정희 군사정권의 굴욕적 한일회담 추진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 경향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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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고생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은 해를 넘긴 1965년에도 계속된다. 문교당국은 영등포고에 대해 3일간(6.22~24)의 휴교 조치도 모자라 학생들의 데모를 막기 위해 여름방학을 20일이나 앞당겨 7월 5일 조기방학을 실시한다. 이에 반발한 영등포고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 한일협정비준반대의 구호를 외치면서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중앙청 쪽으로 행진하다가 경기도청 앞에서 경찰에 의해 동교 3년 이용문 군 등 20여명 전원이 종로서에 연행"되기도 한다. 

영등포생들의 의로운 투쟁의 전통은 1989년 '참교육'을 내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과 이에 대한 징계 파동이 일어났을 때 다시 한 번 힘을 발휘한다. 600여 명의 학생들이 교내 운동장에 모여 농성을 벌이면서 김수환 전교조 분회장에 대한 징계 철회 등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3일 후에는 교사 15명과 영등포고 졸업 서울대생 21명의 농성으로 이어지고, 교사들의 출근 투쟁이 계속되자 결국 교장이 사표를 내기에 이른다.

한신대 학생운동 출신으로 노동운동을 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노동운동가 박태순은 영등포고 24회 졸업생이다. 박태순은 1992년 퇴근길에서 행방불명된다. 10년 만인 2001년에야 새로 만들어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 시흥역에서 의문의 철도사고로 사망하자 신원불명으로 처리되어 용미리 무연고자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경찰이나 보안사 등 당시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하다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여전히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면 박태순 의문사 사건에 대해서도 재조사가 이루어질 전망이다.
 
노동운동가 박태순의 묘(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박태순은 영등포고등학교 출신의 노동운동가로 1992년 실종되는데, 2001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으로 파주 용미리에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 노동운동가 박태순의 묘(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박태순은 영등포고등학교 출신의 노동운동가로 1992년 실종되는데, 2001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으로 파주 용미리에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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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영등포고 교정에 학생들의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조형물조차 없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 곧 「동작 민주올레」 -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역사 탐방 ②(<대방길> 2회)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학규씨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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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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