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기자말

「동작 민주올레」 - <대방길>
▶ 코스안내 : ①서울영화초 - ②영등포고 - ③유일한기념관 - ④실미도 사건의 현장 - ⑤캠프 그레이 미군기지 터(미군 502군사정보단) - ⑥서울시립부녀보호소 터 - ⑦공군기념탑 - ⑧숭의여중고 - ⑨성남고 - ⑩서울공고

③ 참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 유일한 선생과 '유일한기념관'

영등포고등학교 후문으로 나와 남북으로 난 언덕길을 따라 북쪽으로 내려가면 유한양행 빌딩이 금방 나타난다.

유한양행 빌딩 1층으로 들어가면 유일한기념관이 있다. 유한양행의 창업자로 참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의 삶을 산 유일한 박사(1895~1971)를 기리는 공간이다. 평생 소박한 삶을 살았던 유일한의 정신을 반영하여 기념관도 소박하게 만들어져 있다.
  
유일한기념관 대방동 유한양행 빌딩 1층에는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 선생을 기리는 유일한기념관이 있다.
▲ 유일한기념관 대방동 유한양행 빌딩 1층에는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 선생을 기리는 유일한기념관이 있다.
ⓒ 양승렬

관련사진보기

 
유한양행의 설립자(1926)인 유일한은 1991년 중앙대에서 주는 '참기업인상'의 1회 수상자로 선정되는 등 참기업인의 표상으로 통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천한 인물이자 1969년 기업의 제일선에서 은퇴할 때는 혈연관계가 없는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넘김으로써 전문경영인 시대의 서막을 연 인물이기도 하다.

3대·4대 경영세습이 일반화돼 있는 한국의 기업문화에서 보기 드문 인물이다. 기념관에는 유일한의 이러한 기업가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어록'도 전시돼 있다.

유일한은 독립운동가의 삶을 산 인물이기도 하다. 1904년 10살의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오른 유일한은 1909년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세운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한 후 최연소로 졸업했다. 미시간대에 재학 중이던 1919년에는 3·1혁명이 일어나자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서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釋明)하는 결의문>의 작성은 물론 대회장에서 직접 낭독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유일한은 1941년 4월 해외 독립운동단체들이 공동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해외한족대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는데, 대회 결과 창설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집행부 위원에 선임돼 독립운동자금 조성에도 크게 기여한다.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으로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미 육군전략처(OS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1945년에는 50이 넘은 나이임에도 OSS의 후방교란 작전인 냅코작전(NAPKO Project)에 1조 조장으로 한반도에 파견되기 위한 특수군사훈련까지 받지만, 일본의 패망으로 실행에는 이르지 못한다. 유일한기념관에는 선생의 이러한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5년에 추서된 건국훈장 독립장이 전시돼 있다. 
  
고 유일한 선생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독립장 유일한 선생은 참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 고 유일한 선생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독립장 유일한 선생은 참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 양승렬

관련사진보기

 
유일한은 교육가이기도 했다.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교(부천 소사공장 내)를 시작으로, 1957년에는 고려공과학원(대방동)을 설립·운영하는데, 이 학교는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로 발전한다.

이때 유일한은 개인 소유주식을 각종 장학기금으로 출연하는 등의 방식으로 자본의 사회 환원에도 힘쓴다. 유일한기념관은 교육가로서 선생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원 유한양행 건물 '정초' 1926년에 설립된 유한양행은 종로2가와 신문로 시대를 거쳐 1961년에 대방동으로 이전하였다. 이전 당시에는 현 유한양행빌딩 서쪽의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에 있었다.
▲ 원 유한양행 건물 "정초" 1926년에 설립된 유한양행은 종로2가와 신문로 시대를 거쳐 1961년에 대방동으로 이전하였다. 이전 당시에는 현 유한양행빌딩 서쪽의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에 있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④ '실미도 사건'의 현장 유한양행 앞

유한양행빌딩 앞 인도에는 이곳이 <실미도 사건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동판이 설치되어 있다. 실미도 사건은 우리나라 최초로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실미도>(2003)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미도 사건(1971. 8. 23)의 마지막 격전지가 대방동 유한양행 앞이었다는 사실은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실미도부대(684부대)는 1968년 북한의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침투한 '1·21 사건'이 발단이 돼 그해 4월 실미도에서 창설된 특수부대였다. 형식적으로는 공군 소속이었지만, 사실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가 만들고 지원한 부대였다.

북한의 124부대원 31명이 청와대 500m 지점까지 침투한 '1·21 사건'은 28명이 사살되고 1명이 생포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2명은 북으로 탈주). 하지만 우리 측에서도 30명의 사망자와 5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더군다나 생포된 김신조가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다"라고 말해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한 실미도부대는 그래서 북한의 124부대와 똑같이 31명으로 구성되었다.

대방동에서 멈춘 실미도부대
  
영화 <실미도>의 포스터 1971년 8월 23일 발생한 실미도사건은 영화화한 영화 <실미도>는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 영화 <실미도>의 포스터 1971년 8월 23일 발생한 실미도사건은 영화화한 영화 <실미도>는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 시네마 서비스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이듬해 미국의 베트남전 군사개입 회피 구상 등이 담긴 닉슨독트린이 발표되고 미국과 중국의 핑퐁외교가 시작되면서 실미도부대에 위기가 닥쳐온다. 졸지에 박정희 군사정권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것이다.

이 와중에 부대원들에게 지급돼야 할 부식비마저 중간에 누군가 떼어먹는 일까지 발생하고, '국가기밀을 염려하여 처단될 것'이라는 소문마저 돈다.

결국 부대원 24명(31명 중 7명은 여러 사건·사고로 이미 사망한 상황)은 기간병 14명을 사살하고 폭동을 일으킨다. 이들은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따지자!"라면서 인천을 거쳐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하다 대방동로타리를 지나면서 군경과 마지막 격전을 치른다.

이때 운전병 김종철이 복부 관통상을 당하면서 유한양행 앞 가로수를 들이받는데, 이때 수류탄이 터지면서 6명을 제외한 전원이 사망한다. 살아남은 2명도 병원에서 곧 사망하고, 4명은 군사재판을 통해 총살형에 처해진다.
  
'실미도사건 현장' 동판 서울시는 인권의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상징적인 장소에 이를 알리는 동판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실미도사건 현장'을 알리는 동판은 당시의 유한양행 건물(현 유한양행 건물 서편 2층짜리 건물) 앞이 아니라, 현 유한양행 빌딩 앞 인도에 설치되어 있다.
▲ "실미도사건 현장" 동판 서울시는 인권의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상징적인 장소에 이를 알리는 동판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실미도사건 현장"을 알리는 동판은 당시의 유한양행 건물(현 유한양행 건물 서편 2층짜리 건물) 앞이 아니라, 현 유한양행 빌딩 앞 인도에 설치되어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남북분단의 희생양 실미도부대원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실미도 사건'이 터지자 처음에는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라고 거짓 발표한다. 버스승객의 증언을 통해 곧 북한의 무장공비가 아니라 한국군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번에는 '군 특수범의 난동'이라고 또다시 거짓 발표한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김일성 제거를 목적으로 한 실미도부대의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미군이 주도한 켈로(kelo)부대로 시작된 북파공작원의 역사는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기 전까지 무려 1만1000명을 넘어섰고, 이 중 7726명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남이나 북이나 분단 상황에서 정권안보를 위해 애꿎은 시민들이 이렇게 희생되고 있었던 것이다.

(* 「동작 민주올레」 -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③ 기사로 이어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